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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당)

문성공주(文成公主) : 가장 성공한 화친정책

by 중은우시 2007. 7. 19.

 문성공주상

 

중국역사상 적지 않은 공주 또는 종실여인이 번국(藩國)의 국왕과 화친한 사례가 있다. 당태종때 문성공주가 멀리 토번(吐藩)으로 시집간 것은 화친의 가장 전형적인 경우이다. 그녀의 영향하에, 한족과 장족(티벳족)의 우의는 큰 발전이 있었다. 그래서 문성공주를 가장 성공한 외교관으로 불러도 될 것이다.

 

토번은 지금의 서장 즉 티벳이다. 당나라 이전까지는 중원국가와 왕래가 없었다. 토번인들은 동진(東晋) 말기 남량(南凉)의 국왕인 독발이록고(禿髮利鹿孤)의 후예라고 한다. 나라를 잃고 전전하다가 티벳고원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들은 조상을 기념하기 위하여 "독발(禿髮)"을 국호로 썼는데, 나중에 발음이 비슷한 글자로 와전되어 "토번"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토번인들은 유목위주의 생활을 하고, 야크, 말, 돼지, 단봉낙타등을 기른다. 그리고 일부 야채를 심기도 한다. 7세기, 기종농찬(棄宗弄贊)이 왕위를 계승하여 토번의 찬보(贊普, 국왕)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를 송찬간포(松贊干布)라고 부르는데, 아주 용감하고 강인한 지도자였다. 그는 군대를 이끌고 청장고원상의 많은 부락을 통일했으며, 라싸성을 중심으로 하는 강성한 왕국을 건설했다.

 

당태종 정관12년, 송찬간포는 토번대군을 이끌고 당나라의 변방도시 송주(松州)로 진공했다. 송주는 지금의 사천성 송번현이다. 당태종이 다스리던 당나라는 이때 나라가 부강하여, 후군집(候君集)으로 하여금 대군을 이끌고 토벌하게 하였고, 토번군을 송주성에서 대패시켰다. 송찬간포는 어쩔 수 없이 머리를 숙이고 당나라에 신하를 칭했고, 당나라의 강성함에 찬탄을 금치 못했다. 그는 적극적으로 사죄하는 동시에 당나라 조정에 구혼을 했다.

 

당태종은 깊이 생각한 후에 그의 요청을 받아들였고, 궁중에서 시서에 능통한 종실의 여인을 골랐으며, 그녀를 문성공주에 봉했다. 문성공주는 원래 당태종의 먼친척인 이씨성의 귀족의 딸이었다. 그녀는 단정하고 풍만했으며, 어려서부터 시서를 읽었다. 그녀는 머나먼 토번에 대하여 우려가 없지는 않았지만, 또한 신기하게 생각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동의했고, 두 달간의 준비를 거쳐 정관 15년 겨울, 결혼행렬이 출발했다. 예부상서 강하군왕(江夏郡王) 이도종(李道宗)을 대표로 한, 문성공주 호송행렬이 토번으로 떠난 것이다.

 

한겨울에 출방한 이유는, 바로 장안에서 농남(감숙남부), 청해를 거쳐 티벳에 닿으려면 1개월여가 걸리는데, 도중에 물살이 거센 큰 강이 있는데, 겨울에 강물이 약해지므로, 사람들이 건너가기 편하기 때문이었다. 이 결혼사절단은 풍성한 예물을 준비하는 외에, 대량의 서적, 악기, 비단과 종자를 가지고 갔다. 구성원으로는 문성공주의 시녀들 외에도 문사, 악사와 농업기술인원이 포함되어 흡사 무슨 "문화방문단"이나 "농업기술시범단"과 같은 형국이었다. 이들이 왜 간 것인가? 당시 토번은 이미 토곡혼(吐谷渾)을 무너뜨리고, 서남지방의 중요한 강국으로 성장하였기 때문이다. 당태종은 심모원려로 토번과 관계를 잘 유지하면 당나라의 서남변방은 안정을 도모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여러가지 방법으로 그들의 경제와 문화에 도움을 주고자 했고, 토번으로 하여금 중원문화에 동화되도록 하고자 했다. 문성공주는 실제로 이런 이웃국가와의 평화공존이라는 정치적 임무를 띄고 시집가는 것이었다. 이 결혼사절단은 바로 그녀를 도와 이러한 사명을 완성하는데 필요한 인물들이었다.

 

1개월여의 비바람을 맞으면서 힘들게 높은 산을 넘어 봄에 꽃이 필 때쯤에 문성공주 일행은 황하의 발원지인 하원(河原)에 도착한다. 이곳은 풀이 무성하고, 소와 양이 뛰어놀아, 지금까지 지나온 황량한 풍경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사람들이 다시 기운을 차렸다. 오는동안 열악한 환경에 걱정하던 문성공주도 비로소 약간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이들은 이 곳에서 며칠간 쉬게 되었다.

 

이때, 송찬간포는 친히 대대를 이끌고 문성공주를 맞이하러 하원까지 온다. 송찬간포 일행은 당나라의 사신인 강하군왕 이도종에게 예를 표했다. 그는 이미 당나라를 토번의 상국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이도종은 문성공주와 송찬간포를 만나게 해주었다. 이 고원을 달리던 토번국왕은 중원의 금지옥엽을 보고는 한 눈에 반해버렸다. 문성공주가 화려한 옷을 입고, 모습이 단정하며, 기품이 우아한 것을 보고, 원시적이고 질박한 토번여자와는 전혀 다르다고 느꼈다. 그리고 문성공주도 송찬간포를 보고, 비록 고원의 뜨거운 햇볕과 광풍으로 검고 거칠기는 하지만, 큰 키와 두 눈 사이의 기운은 아주 뛰어났다. 문성공주도 속으로 혼자 기뻐하며 남편을 잘 만났다고 안위했다.

 

송친사절단과 영친사절단은 앞뒤로 둘러싸고 위무도 당당하게 라싸성으로 들어갔다. 이도종의 주재하에, 송찬간포와 문성공주는 한족의 예절에 따라 성대한 혼례를 치른다. 모든 라싸성의 민중들은 그들의 찬보와 부인을 위하여 노래하고 춤추며 축하를 해주었다. 송찬간포는 기뻐서 부하들에게 말했다. "우리 종족과 나의 조상은 한번도 상국과 통혼한 선례가 없었는데, 내가 오늘 당나라의 공주를 처로 얻었으니 정말로 기쁜 일이다. 나는 공주를 위하여 화려한 궁전을 지어서 후대에게 남겨주도록 하겠노라"

 

오래지 않아, 아름답기 그지없는 궁전이 만들어졌다. 집은 화려하고, 컸다. 정자는 정교하면서도 운치가 있었다. 그리고 연못도 파고, 각종 아름다운 나무도 심었다. 모든 것은 당나라 궁전의 양식을 따랐다. 그리하여 문성공주가 편안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해주었고, 그녀의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달래주고자 했다. 문성공주와 더 많은 교류를 위하여 송찬간포는 가죽옷을 벗어버리고, 문성공주가 친히 그를 위하여 만들어준 비단옷을 입었으며, 문성공주로부터 중국어를 배우기도 했다. 서로 종족이 다른 부부는 아주 마음이 잘 맞았고, 서로 아끼며 존중하며 그들의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전통적인 관습에 따르면, 토번인들은 매일 붉은 흙을 얼굴에 발라서 사악한 마귀를 쫓아낸다. 아주 보기좋지도 않고 편하지도 않았지만, 전통적인 습속이므로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었다. 대다수의 토번인들은 그저 하던대로 계속 해왔다. 문성공주가 토번에 도착한 후, 이 습속을 자세히 살펴본 후에 이렇게 하는 것은 아무런 이유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위생에도 좋지 않고 그저 비루한 누습이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그녀는 완곡하게 송찬간포에게 자기의 생각을 얘기한다. 송찬간포는 그녀의 말이 이치에 맞다고 생각하여 즉시 이 습속을 폐지하도록 명을 내린다. 처음에는 옛습관에 익숙해 있던 토번인들이 불편하게 생각하였지만, 점차 자기의 본래의 면모를 유지하게 되자, 보기에도 좋고 편리하니 모두 기꺼이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들은 심지어 문성공주가 자기들의 낡은 습속을 없애준데 고마움까지 느꼈다.

 

생활이 안정된 후, 문성공주는 한족 악사들을 데리고 임무를 수행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아주 열심히 송찬간포와 문성공주를 위하여 당나라에서 가장 유행하는 음악을 연주하였다. 음악은 느리면서도 아름다웠고, 송찬간포는 신선의 소리라고 느낄 정도였다. 그는 악사와 음악에 대하여 크게 칭찬하고 자질이 뛰어난 어린 남녀를 뽑아서 한인 악사들로부터 음악을 배우도록 지시했다. 이리하여 한족의 음악은 점차 토번의 영지에 퍼져나가게 되었고, 토번인들의 마음 속에 들어앉게 되었다.

 

농업기술자들은 선전을 해대지는 않았고, 그저 중원에서 가지고간 양식종자를 고원의 옥토에 심었다. 그 후에 정성들여 물을 대고, 비료를 주고, 잡초를 제거하며 수확의 계절을 기다렸다. 이들이 심은 곡식은 아주 풍성하게 거두어들여지게 되었고, 토번인들은 새로운 광경에 깜짝 놀랐다. 토번인들은 비록 당시에 곡식을 심기는 했지만, 관리를 제대로 할 줄 몰라서, 그저 심기만 하고 돌보지를 않아, 생산량이 아주 낮았었다. 그들은 한족의 농업기술자들의 뛰어난 기술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송찬간포와 문성공주의 지시하에 농업기술자들은 계획적으로 토번인들에게 농업기술을 전파한다. 그들로 하여금 유목을 하는 남는 시간에 대량의 양식도 수확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특히 뽕나무를 심게 하고 양잠을 하는 기술을 전수한 후, 토번인들도 스스로 비단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빛이 나고 부드러우면서도 아름다운 비단은 토번인들의 생활을 아름답게 만들어 주었다. 토번인들도 비단을 아주 좋아했고, 문성공주로 인하여 얻은 이런 풍요한 문화에 고마움을 느꼈다.

 

문성공주는 송찬간포에게 아주 다정하게 대하였고, 황량한 고원지대에서 살아왔던 토번국왕은 한족여성의 수양과 온정을 깊이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문성공주를 더욱 아끼고 사랑하였다. 또한 그녀가 하는 건의는 뭐든지 받아주었다. 문성공주는 자기의 지식과 견식을 가지고 토번의 민정을 세심하게 관찰했다. 그 후에 아주 합리적인 건의들을 많이 제안했고, 남편이 넓은 지역을 잘 다스리도록 도와주었다. 문성공주는 권력욕이 강한 여자는 아니었다. 그리하여 많이 간섭하지는 않았다. 송찬간포와 대신들도 그녀에 대하여 호감을 가지게 되고, 자주 그녀에게 당나라궁중의 정치제도를 물어봐서 그들이 참고하였다. 토번의 백성들은 그녀를 무슨 신녀처럼 모셨다.

 

정관22년, 당태종이 장사 왕현책(王玄策)을 사신으로 토번에 파견했다. 한편으로는 양국관계를 좋게 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멀리 시집간 문성공주를 보러 가는 것이었다. 왕현책은 사신일행을 이끌고 대량의 비단등 예물을 가지고 길을 떠났다. 천축국을 지나갈 때, 불행히도 천축인들의 기습을 받는다. 왕현책이 일부 사람을 데리고 도망친 이외에 대부분의 인마와 예물을 잃어버리게 된다. 왕현책은 아주 낭패한 모습으로 토번에 도착하고, 송찬간포를 배알해서 강도당한 상황을 설명한다. 송찬간포는 천축국이 고의로 도발하여 그와 당나라의 관계를 이간하려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대군을 파견하여 천축을 토벌하고, 그들의 도성을 파괴시키며, 천축국왕을 포로로 삼고, 대량의 가축을 획득하였으며, 당나라사신일행을 구해낸다. 이는 당나라사절단을 대신하여 화를 풀어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정관23년, 당태종 이세민이 사망하고, 태자가 즉위하니 당고종이다. 신임 대당천자는 송찬간포를 부마도위에 임명하고, 서해군왕으로 임명한다. 그리고 사신을 보내어 대량의 금은, 견직, 시서, 곡식종자를 주고 문성공주에게도 악세사리와 화장품을 보낸다. 이로써 그녀의 활동을 치하한 것이다.

 

송찬간포는 글을 써서 고마움을 표시했다. "만일 천자께서 처음 즉위하셨는데, 조금이라도 불충한 자가 있으면, 근위병이 되어 토벌하러 가겠습니다"라고 하고, 주보 15종을 바쳐 당태종의 영전에 올려서 애도의 뜻을 표해달라고 한다. 당고종은 송찬간포의 충성심에 감동을 받는다. 그리하여 그를 다시 빈왕(賓王)에 봉하고, 채색비단 3천단을 하사한다. 토번의 사신은 당나라 장안에 도착한 후 장안의 광경에 깜짝 놀란다. 당고종이 기뻐할 때, 기회를 틈타 술만드는 기술, 맷돌기술, 지필묵연을 만드는 기술을 전수해줄 것을 요청하고, 당고종은 모두 응락한다. 당나라와 토번의 관계는 문성공주의 존재로 인하여 최고조에 달한다.

 

송찬간포와 문성공주가 개혁을 시행하고, 대론(大論, 토번의 재상직)인 녹동찬의 적절한 기획하에 토번은 군사, 정치, 경제, 문화등 각방면에서 모두 빠른 발전을 거두고, 서역의 패자로 떠오르며, 당나라의 서쪽에서 병풍역할을 하게 된다.

 

아쉽게도 얼마 되지 않아, 송찬간포가 사망한다. 그의 손자가 즉위하여 찬보가 된다. 찬보의 나이가 어려, 나랏 일은 대부분 녹동찬의 손에 장악되고, 집안 일은 문성공주가 주재한다. 이때까지는 모두가 편안하였다. 그러나, 얼마되지 않아 녹동찬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인 흠릉(欽陵)이 대론의 직위를 이어받는데, 이때는 토번과 인근국가인 토곡혼과의 관계가 악화되었고, 두 나라는 모두 당나라조정에 시비를 가려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당고종은 계속 미루고 결정을 해주지 못하고 있었다. 흠릉은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바로 병사를 일으켜 토곡혼을 궤멸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으로 당나라는 조정의 위엄에 손상을 입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당고종은 그가 판정해주기 전에 토번이 무력을 동원한 것은 당나라를 안중에 두지 않는 행동이라고 생각했고, 그리하여 함형원년에 설인귀를 독사로 하여 토번을 토벌하러 보내게 된다.

 

설인귀의 군대가 대비천 일대에서 토번군에게 일패도지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이로부터 토번인들은 당나라를 더 이상 상국으로 생각하지 않게 되고, 매년 당나라의 변경을 침략한다. 당나라조정은 대군을 보내여 변방을 지키고 토번군대의 침략을 막으려고 하게 되며 두 나라는 적대관계가 된다. 이로써 토번은 당나라가 시종 해결하지 못한 최대의 적국으로 되어버린다.

 

당태종 정관15년 초여름에 문성공주가 송찬간포에게 시집간 때로부터, 당고종 함형원년 설인귀가 군대를 이끌고 토번을 토벌하러 올 때까지, 30년의 세월동안 문성공주는 그녀의 박학다식으로 토번을 개화시키는데 큰 공을 세웠다. 당나라의 서쪽 변방을 공고히 해주었을 뿐아니라, 한민족의 문화를 서역에 전파시키기도 하였다. 이것은 당태종의 업적이다. 아쉽게도 당고종이 이를 잘 이용하지 못하고, 전쟁으로까지 치닫게 만들어 수습할 수 없는 국면이 형성되었다. 이로써 문성공주가 고심하며 닦아놓은 화목국면이 돌연 끝나게 되었으니, 아쉬울 뿐이다.

 

당고종 영륭원년, 문성공주는 라싸성에서 병으로 사망한다. 당나라조정은 사신을 보내어 제사지낸다. 그러나, 이로써도 두 나라간의 적대관계를 해소시키지는 못했다. 문성공주가 토번의 백성들로부터 존경받는 것은 토번과 당나라의 관계악화에도 불구하고 전혀 감쇄되지 않았다. 그녀의 죽음은 모든 토번인들로부터 애도를 받았다.

 

문성공주가 죽은 후, 토번인들을 그녀를 위하여 사당을 세워 기념했다. 그녀를 따라왔던 문인, 기술자들도 모두 두터운 대우를 받았다. 그들도 죽은 후에 문성공주묘의 양 옆에 배장되었다. 지금까지도 문성공주와 이들 우호사절들은 티벳인들이 신처럼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