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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당)

당고종은 현장의 요구사항을 왜 거절했는가?

by 중은우시 2007. 10. 8.

글: 유앙(劉仰)

 

현장(玄)이 인도에서 경전을 가지고 중국으로 돌아온 후, 아주 높은 위망과 명성을 누리고 있었다. 전문충(錢文忠) 교수는 <<현장서유기>>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당태종 이세민은 심지어 현장에게 환속하여 조정의 고관을 지내라고도 권유하였으나, 현장이 거절하였다고. 현장이 당태종의 두터운 사랑을 거절한 것은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당연히 종교신앙일 것이다. 비록 현장이 생전에 높은 지위를 지니고 있었지만, 전문충교수의 글에서는 현장이 생전에 그의 종교신앙때문에 조정으로부터 냉대를 받은 사실도 언급하고 있다.

 

당태종이 죽은 후, 656년, 현장은 당고종에게 글을 올린다. 그리하여 당나라의 두가지 법률을 폐지해달라고 요구한다. 하나는 "선도후불(先道後佛, 도교를 우선시하고 불교를 후순위에 두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승려가 법을 어기면 속인이 법을 어긴 것과 마찬가지의 죄로 처벌하는 것"이었다. 비록 이때 현장의 명성이 하늘에 뜬 해와 같았지만, 당고종은 그의 요구를 거절한다. 전문충 교수는 이를 언급하면서, "역사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제왕은 사실은 현장을 어느 정도 탄압했다". 이 문제에 대하여는 좀 더 논의가 필요하다. 그저 '탄압'이라는 말로 기술하게 되면 아마도 실제 경위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당나라의 황제는 이(李)씨성이었으므로, 도교의 지위는 매우 높았다(도교의 창시자로 언급되는 노자의 성이 이씨임). 관방에서는 도교, 유교, 불교의 순서로 중시했다. 현장의 요구는 불교를 제1의 위치에 놓아두거나 도교와 동등하게 대해달라는 것이었다. 조정에서 현장의 요구를 거절한 것은 불교, 도교의 서열문제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유교"의 지위문제까지 연결된다. 필자의 생각으로, 당나라에서 도교를 제1에 놓았지만. 이것은 주로 이씨성의 황제들의 출신이 고귀하다는 점을 나타내기 위한 것일 뿐이었다. 당나라에서 국가를 다스리는 이론과 수단은 도교와 별 관계가 없었다. 주로 제2위에 언급된 유학에 의하여 통치되었다. 이런 점에서 도교가 제1의 자리에 있는 것은 사실상으로는 허위(虛位)를 차지한 것일 뿐이다.

 

만일 현장의 "선도후불"을 폐지해달라는 요구가 받아들여진다면, 불교는 도교보다 앞설 뿐아니라, 사실 유학보다도 앞서게 된다는 문제가 있다. 종교신앙이 경건한 현장에 있어서, 그의 건의는 그저 불교에 더 높은 지위를 부여받게 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그는 세속사회의 영향을 감안하지 못했다. 이것이 그가 냉대받은 이유이다.

 

당나라의 황제가 진정한 불교신도였다면, 그는 자신의 신분이 고귀한지 여부에는 신경쓰지 않았을 것이고, 자기가 노자 이이의 후손이라고 표방한다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현장의 요구를 거절했다는 점, "선도후불"의 서열을 바꾸지 않겠다고 한 점은 황제가 본질적으로 아주 세속적이며 진정한 불교신도가 절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선도후불"의 규정으로 보더라도, 황제는 경건한 도교신도도 아니었다. 만일 진정한 도교신도라면, 출신문제에서 특히 자신의 조상의 영광에 대하여 그렇게 따지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정에 있어서 종교는 그저 하나의 깃발에 불과하다. 도, 유, 불의 삼자간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유학이었다. 유학은 황제와 조정이 사회를 관리하는 중요한 도구였다. 유학은 중국역사상 오랫동안 세속정치의 최고대표였다.

 

현장의 건의가 묵살된데는 사실상 하나의 근본문제가 숨어있다: 세속정치와 종교의 관계문제이다. 원래, 세속정치가 종교의 서열을 결정한다는 것이 모든 것을 보여주고 있다. 현장이 황제에게 종교의 서열을 고쳐달라고 요구했다는 것은 현장의 마음 속에 종교도 세속정치에 의지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만, 조정이 인가한 도, 유, 불의 서열에서 도교는 그저 당나라 황제가 자기의 얼굴에 금칠을 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진정으로 역할을 수행한 것은 유학이었다. 그러므로, 현장의 요구가 받아들여졌다면 이는 불교의 지위가 유학보다 앞서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는 객관적으로 종교가 세속정치보다 우위에 선다는 것을 말하게 된다.

 

종교가 세속정치보다 우위에 서는 전형적인 사례는 유럽의 중세사회 혹은 정교일치의 국가제도를 지닌 나라들이다. 이런 경우의 실제효과를 보면, 유럽인들은 1000년의 중세를 거친 후, 그것의 위험성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당고종이 현장의 요구를 물리친 것도 실제로는 중국의 역대이래의 종교정책을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종교는 세속정치보다 우위에 설 수 없다" 유럽은 르네상스이후 특히 계몽운동을 거친 후에야 이런 원칙이 확립되었는데, 중국은 고대에도 계속하여 이런 원칙을 지켜왔다. 이것은 현대의 정치이념으로 보자면 "정교분리"이다.

 

현장이 또한 "승려도 일반인과 동일한 법과 형벌이 적용된다"는 원칙을 폐지해달라고 요구한 것도, 세속정치의 입장에서 보면 거대한 위협이다. 종교인사의 범법에 대하여 세속법률이 관여하지 못하게 되거나, 세속백성과 동일하게 처리되지 않게 된다면, 종교인사들은 사실상 우월한 지위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현재의 정교분리원칙하에서도 이러한 결과는 용인되기 힘들 것이다. 종교인사와 세속인사가 동일하게 법을 위반하는데도 서로 다른 처벌원칙을 적용한다는 것은 종교가 세속정치보다 우위에 있다는 중요한 특색이 된다. 중국고대사에서 종교가 나타난 이래로 한번도 이런 국면이 나타난 적은 없다.

 

종교가 세속정치보다 우위에 있게 되면 아주 나쁜 결과가 하나 나타난다. 바로 신앙의 명의로 일으키는 전쟁이다. 이런 전쟁을 종교전쟁이라고 부른다. 십자군원정은 세계역사상 가장 전형적인 종교전쟁이다. 이 200년에 걸친 종교전쟁에 대한 후세인들의 평가는 부정적이다. 이 일의 부정적인 영향은 지금까지 미치고 있다. 중국고대역사상 종교전쟁은 거의 발생한 적이 없다. 이 결과는 종교가 세속정치의 지배하에 계속 있었기 때문에 나타난 필연적인 것이다. 종교가 세속정치보다 우위에 있을 때의 또하나의 중대한 악영향은 사상통제이다. 사상범의 개념은 바로 종교통치에서 비롯된다. 종교가 절대적인 통치지위를 점하게 되는 경우의 악영향에 대하여 여기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다.

 

현장보다 이전에, 중국에서는 두번의 "멸불(滅佛)"사건이 벌어졌다. 그러나 이것은 종교전쟁은 아니고, 세속정치와 종교가 세속사회의 지도적 지위를 다투는 소규모 대항일 뿐이다. 현장이전에 일어난 두 번의 멸불사건은 모두 세속정권이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하여 중국에서는 세속정치가 종교보다 우위에 있다는 원칙이 확립되었다. 현장이 나타나면서 불교의 지위가 다시 상승했다. 비록 당고종이 현장의 요구를 거절하기는 했지만, 종교세력의 확장을 더 이상 억제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현장이 죽은 후 180년이 지나서, 당무종은 다시 종교의 지나친 확장을 억누르게 된다. 이것을 "회창법난(會昌法難)"이라고 한다. 다시 100여년이 지난 후 후주(後周)의 주세종(周世宗)때 다시 한번 "멸불"사건을 일으킨다. 통칭하여 "삼무일종(三武一宗)"이라고 불리우는 네번의 "멸불"사건으로 인하여 종교가 세속정치에 의지하는 전통이 확립되었다. 이후 중국역사상 다시는 유사한 사건이 벌어지지 않는다. 중국인들의 종교와 세속정치간의 관계에 대한 인식을 유럽인들은 계몽시대이후에 비로소 가지게 되었고, 이러한 원칙은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그리하여, 당고종이 현종의 요구를 거절한 것은 간단하게 현장의 체면을 살려주지 않은 정도가 아닌 것이다. 이는 세속정치와 종교간의 관계라는 대명제에 관계된다. 고대 중국인들은 서방이나 다른 지역처럼 종교를 세속정치보다 우위에 두지 않았다. 이것은 아주 다행스러운 일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중국인들은 일찌감치, 종교문제에 있어서, 전세계인들인 공인할 수 있는 결론을 내렸고 시행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고대사회에서 중국과 서방의 큰 차이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