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는 근 300년간 존속했다. <<신당서>>, <<구당서>>, <<자치통감>>등 관련서적을 읽어보면,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즉, 당고조 이연이 나라를 세운 이후 당현종에 이르기까지 93년동안 4번의 궁중쿠데타가 일어났는데, 이 네번의 쿠데타는 모두 황궁성벽의 북쪽정문인 현무문에서 발생했다.
첫번째 쿠데타는 당고조 무덕9년(626년)에 일어났다. 바로 진왕 이세민이 태자 이건성, 제왕 이원길과 황제계승을 놓고 다툰 끝에 일어난 사건이다. 이세민과 이건성, 이원길은 모두 고조 이연의 본부인인 두황후의 소생들이다. 이건성이 장남이고, 이세민이 다음이고, 이원길은 넷째이다. 당고조가 전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이세민은 먼저 태원에서의 봉기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봉기이후 여러 군웅을 제압하는 과정에서도 그의 공이 가장 컸다. 그러나, 이세민은 적장자가 아니었다. 전통적인 관례에 따라 황위는 적장자가 계승해야 한다. 그래서 당고조는 즉위후, 이건성을 황태자로 삼는다. 그러나, 이세민은 전투를 잘했고, 지용을 겸비하여 당나라군대의 가장 중요한 지도자로 되었다. 무덕4년, 당고조는 이세민을 "천책상장(天策上將)"에 임명한다. 그 자리는 여러 왕보다 높은 자리였고, 사도, 섬동도대행대, 상서령을 겸직했다. 그리고 진왕부에 관리를 둘 수 있게 하였다. 이세민은 스스로 공이 높은 것을 내세웠고, 진왕부에 문학관을 두었으며 사방의 글하는 자들을 불러모았고, 융숭하게 대접했다. 이 사람들은 모두 이세민의 책사가 되었다. 이외에 이세민이 남북을 다니면서 토벌할 때, 점차 진왕부에는 용맹한 장사들이 모여들었다. 많은 책사와 용장을 보유한 진왕 이세민은 자연히 유력한 정치집단으로 성장했고, 직접적으로 황태자 이건성을 위협했다. 이건성은 자기의 지위를 공고히 하고, 장래의 황위계승을 확실히 하기 위하여 마찬가지로 정치적 야심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세민에 불만이 많았던 이원길과 연합한다. 이건성은 당고조의 후궁들과 연락하여 도움을 받고, 자기의 군사력을 강화하며, 이세민의 부하를 매수하는 등의 책략으로 자신을 강화시키고, 이세민의 세력을 약화시켰다. 심지어 이세민을 불러 술을 마실 때 독약을 넣으려고까지 하게 된다. 무덕9년에 이르러, 이건성, 이원길과 후궁들은 더욱 자주 당고조 이연의 귀에 이세민에 대한 나쁜 말들을 전해준다. 이리하여 당고조는 점차 이세민에 대하여 의심을 갖게 된다. 진왕 이세민과 수하들은 두려웠고, 그리하여 정변을 꾀하게 된다. 6월 4일, 이세민은 장손무기등을 이끌고 현무문을 통하여 황궁에 들어간다. 그리고 임호전 부근에 매복하였다가, 돌연 황궁에 들어온 이건성과 이원길을 습격한다. 그리고 나서, "진왕은 태자와 제왕이 난을 일으켜, 병사를 불러 주살했습니다"라고 하고, 심복을 보내어 당고조를 '숙위(宿衛)'한다. 이리하여 당고조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되고, 3일후 당고조는 이세민을 황태자로 세우고, 군사와 정사를 모두 이세민에게 처결하게 한다. 8월, 당고조는 황태자 이세민에게 황제위를 물려주고 스스로 태상황이 된다. 이세민이 즉위하니 바로 당태종이다. 이것이 역사상 유명한 "현무문지변(玄武門之變)"이다.
제1차 현무문사건은 표면적으로는 4명의 참여자가 있다. 당고조, 태자, 진왕 그리고 제왕이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배후의 모순은 딱 하나이다. 즉, 태자 이건성과 진왕 이세민간의 후계자를 둘러싼 다툼이다. 그리고 황제 겸 부친인 당고조 이연은 현무문사건이후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나, 제왕은 태자의 편에 선다.
모순이 단순했으므로 이세민의 번개처럼 동시에 이건성과 이원길을 사살하자, 모순은 바로 해결되었다. 당나라의 미래 후계자는 이세민으로 정해진 것이다. 당나라를 없애지 않는한, 이세민이 후계자가 되는 것에는 의문이 없게 된 것이다. 원래의 황태자의 부하이던, 이연에게 충성하던 사람이건 더 이상 미래의 황제에게 밉게 보일 이유는 없게 된 것이다.
얘기하자면 우스운 일이지만, 현무문사건에서 가장 많이 죽은 것은 진왕부도 아니고, 동궁도 아니고, 제왕부도 아니다. 오히려 현무문을 지키던 군인들이었다. 태자와 제왕이 습격을 받은 후, 풍립(馮立)과 사숙방(謝叔方)은 각각 동궁과 제왕부의 병사를 이끌고 현무문으로 태자와 제왕을 구하러 달려왔다. 그러나, 현무문을 지키던 운휘장군(雲麾將軍) 경군홍(敬君弘)과 중랑장(中郞將) 여세형(呂世衡)은 병력이 아직 집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황급히 출전하여, 일패도지한다. 본부병력이 몰려왔을 때는 이미 경군홍과 여세형이 죽은 뒤였다. 아주 이상한 것은 후인들도 경군홍과 여세형이 전투에 참전한 이유를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일찌감치 진왕 이세민에게 매수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사전에 소식을 들었다면, 어찌 황급히 출전하여 죽음을 당했겠는가? 경군홍과 여세형의 죽으면서 형세가 위급해지자, 위지공은 태자와 제왕의 수급을 베어 보여주자, 동궁과 제왕부의 병사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진왕부를 공격하려던 설만철의 부대원들도 이연의 성지를 받은 후 궤멸된다. 이세민은 기회를 틈타 이건성과 이원길의 각각 다섯 아들을 모두 죽여버리고, 철저하게 경쟁상대방을 소멸시킨다.
이에 이르러 이세민은 비록 후계자로서의 지위는 공고히 했다. 다음 날부터 원래 태자의 곁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귀순했다. 무장중에서 현무문사건때 동궁과 제왕부의 병사를 이끌고 싸웠던 풍립, 사숙방과 설만철등의 사람들도 도망쳤다가 스스로 자수한다. 이세민은 하나하나 사면한다. 그리고 높은 관직과 녹을 받을 수 있게 해준다. 설만철이 말년에 반란을 일으켜 당고종에 의하여 살해당한 것을 빼고는 나머지 두 사람은 나중에 모두 충의의 모범으로 칭송받는다. 문관들 중에서 태자의 측근이던 위징이 투항하여, 중국역사상 유명한 강직한 신하가 된다. 위징은 일찌기 와강채의 부대에 몸담았다가, 패배한 후 당나라로 왔고, 나중에 두건덕에게 포로로 잡혀서 다시 두건덕에 항복한다. 두건덕이 패한후 다시 당나라로 돌아와서 이건성의 측근이 된다. 이건성이 죽은 후에는 다시 이세민에게 귀순한다. 그는 이미 다섯 번이나 주인을 바꾼 것이다. 당시 위징처럼 시류에 맞추어 사는 사람들이 많았다. 전체적으로 태자의 그림자는 금방 소멸해 버렸다. 따로 이세민이 청소할 필요도 없었다.
참전한 사람수에 대한 논의는 의미가 크지 않다. 왜먀하면 어떻게 계산하더라도, 진왕부의 군사력은 절대적인 열세였기 때문이다. 이세민은 분명히 현무문의 수비장수를 매수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를 매수했는지에 대하여는 아직도 정설이 없다. 그리고 매수이유에 대하여도 그의 부대원들을 몰래 매복할 수 있게 도와주도록 하기 위한 것이지, 나중에 현무문의 수비장수를 이용하여 태자와 제왕부의 사람들과 싸우게 하려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사실을 보면 수비병들은 아주 약했다고 알 수 있다. 이를 보면 경군홍과 여세형은 사전에 아무런 준비가 없었고, 병마도 미리 모아놓으지 못한 상태에서 황급히 출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최종적으로 태자 이건성과 제왕 이원길의 세력을 와해시킨 것은 그들의 수급과 이어진 당고조 이연의 성지였다.
두번째 쿠데타는 당중종 신룡원년(705년) 1월에 발생한다. 그때 무측천이 황제를 칭한지 이미 14년이 지난 때였고, 나이가 들어 병이 깊이 들어있을 때였다. 그녀에 대하여 불만이 있고, 대당사직을 회복시키려는 관리들이 봉각난태평장사(재상)인 장간지, 최현위의 통솔하에 봉기했다. 장간지, 최현위는 우림위장군 경휘등과 좌우우림병 500여명을 데리고 현무문을 점령했다. 그리고 태자 이현을 동궁에서 모셔온다. 그 후에 함께 황궁에 침입한다. 무측천이 잠자던 영선궁까지 몰려가서, 무측천이 총애하던 인태감 장역지, 춘관시랑 장종창을 죽이고, 무측천이 퇴위하도록 하여, 태자 이현을 다시 황제에 옹립하고 당나라의 국호를 회복한다.
세번째 쿠데타는 당중종 경룡원년(707년) 태자 이중준(李重俊)이 일으킨 정변이다. 중종 이현은 복위후에 무능했다. 그리고 황후인 위씨(韋氏)가 무삼사(武三思)와 결탁하여 조정의 권력을 독점했다. 위후는 태자 이중준이 자기의 친아들이 아니어서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무삼사도 이중준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무삼사의 아들인 부마좌위장군 무숭훈(武崇訓)과 며느리인 안락공주는 자주 이중준을 능멸했다. 심지어 이중준을 노(奴, 종)라고 부르기까지 하였다. 무숭훈은 안락공주로 하여금 중종에게 태자를 쫓아내도록 종용하고, 안락공주를 황태녀(皇太女)로 삼아달라고 요청하게 하였다. 이중준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경룡원년 7월 좌우림대장군 이다조(李多祚)등과 연합하여 조서를 받는다고 거짓말하고 좌우림과 천기병 300여명을 이끌고 무삼사와 무숭훈의 사저에 침입하여 무삼사와 무숭훈을 죽여버린다. 그리고 병사를 몰아 황궁을 포위하고, 위후와 안락공주를 내놓으라고 한다. 위후는 변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중종을 데리고 현무문에 올라, 병사를 모아 진압하려 한다. 이중준은 병사를 이끌고 현무문앞까지 온다. 중종은 병사들에게 이중준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말하자, 병사들이 창을 거꾸로 돌여 이다조등을 죽이고, 이중준의 일당은 궤멸된다. 이리하여 정변을 바로 와해된다. 이중준은 종남산으로 도망쳤다가 추적을 받아 살해당한다.
네번째 쿠데타는 당중종 경룡4년(710년)에 발생한 이융기(당현종)의 정변이다. 그해 6월, 위후와 안락공주등은 중종 이현을 독살하고자 계획하고, 온왕 이중무를 황제로 올리려 한다. 위후는 무측천을 본받아, 수도근처의 요충지에 위씨자제를 박아두고 사람을 끌어모은다. 그리고 중무를 몰아내고 스스로 황제가 되고자 한다. 그러나, 상왕이며 태위인 이단이 반대할 것을 겁내서 그를 죽여버리고자 한다. 상왕의 아들이며 임치왕인 이융기는 이 소식을 듣고, 즉시 태평공주등과 연합하여 먼저 공격한다. 우림위군을 뚫고 들어가 위후가 파견한 통령위군 위선, 위반을 죽이고, 현무문을 점령한다. 이어서 병사를 이끌고 황궁에 들어가 위후와 안락공주를 죽인다. 상왕 이단과 이융기부자는 정권을 장악한다. 나중에 소제 이중무의 양위를 받아 상왕이 등극하니 바로 당예종이다.
이 네번의 쿠데타에는 공통점이 있다. 즉, 정변의 성패를 가름하는 중요한 관건은 바로 현무문점령이었다. 정변에서 현무문을 장악한 측이 승리자였고, 현무문을 장악하지 못한 측은 실패했다. 이로써 볼 때 현무문이 쿠데타에서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지를 알 수 있다.
현무문이 왜 당나라 초기의 몇차례 정변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했는지를 알려면, 당나라때의 황궁제도를 이해해야 한다. 당나라때 도성의 황가궁전은 제왕이 거주하고 정사를 돌보는 주요한 장소였다. 즉, 정치권력의 중추였다. 그리하여, 태극, 대명의 두 궁과 낙양궁성의 궁전건축은 양식이 모두 일치했다. 모두 납북의 중축선에 대칭으로 배열되었다. 가장 관건적인 것은 외조는 황궁의 남부에 위치하고, 내정은 황궁의 북부에 위치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황궁성벽의 북쪽의 문들은 내정의 안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중에서 북쪽성벽의 정문인 현무문은 더욱 중요했던 것이다. 당나라 황궁의 성벽에는 궁정위사들이 근무했고, 현무문의 바깥에는 두개의 회랑이 있었는데, 궁정위군사령부가 바로 이 곳에 주둔했다. "북아(北衙)"라고 백성들이 불렀다. 이곳은 견고하게 공사했고, 병력이 상당히 많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정변이 발생하면 먼저 현무문을 장악하는 것이 의미가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무문을 장악하면 내정을 장악할 수 있고, 다시 황제를 장악할 수 있다. 이로써 중앙정부를 장악하고, 다시 전체 국가를 장악하는 것이다.
무덕9년 현무문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현무문의 수비장수인 상하(常何)는 일찌기 이건성의 부하였다. 그래서 이건성은 현무문을 자신의 세력범위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이세민의 비정상적인 거동에 대하여 알고 있고, 일촉즉발의 상황임에도, 아무런 방비도 하지 않고, 이원길과 함게 현무문을 통하여 입궁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상하가 이미 이세민에게 매수되었을 줄은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세민은 현무문을 장악할 수 있었고, 정변소식이 전해진 후, 동궁과 제왕부의 정병 2천명이 이건성의 부하인 풍립과 설만철에 의하여 현무문으로 진공하고, 현무문의 수비병사들은 응전한 것이다. 현무문을 지키던 운휘장군 경군홍과 중랑장 여세형이 모두 전사한 후에도 태자와 제왕부의 인원은 현무문을 뚫지 못했던 것을 보면, 현무문의 전투력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위지경덕이 이건성과 이원길의 수급을 보여준 후에, 동궁과 제왕부의 병사들은 뿔뿔이 흩어진다. 이후 이세민은 위지경덕을 현무문에서 내려오게 하고 입궁시킨다. 그후 내정의 해지에서 배를 띄워 놀고 있던 당고조 이연을 연금하게 되고, 그로 하여금 모든 병사들은 진왕의 명령을 들으라는 문서에 서명한다. 그리하여 이세민이 최종적으로 승리하게 된 것이다. 만일 이세민이 현무문을 장악하지 못했더라면, 그는 부하를 이끌고 현무문내의 임호전에서 이건성을 습격할 수 없었을 것이다. 습격성공후에도 이건성의 부하들의 맹렬한 공격을 막아내지 못했을 것이고, 황궁을 통제하지 못했을 것이고, 당고조를 겁주지 못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이세민의 말로는 모반자로서 주살당하는 것이었으리라. 나중에 일어난 세번의 정변에서의 승리자도 모두 현무문을 장악했다.
후세에 무덕9년의 정변만을 "현무문의 변"이라고 부르고 있으나, 사실, 현무문에서 발생한 이 네번의 정변이 차지하는 비중을 볼 때 모두 "현무문의 변"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네번의 정변은 모두 당나라의 최전성기에 발생하였고, 당나라의 정치에 아주 나쁜 영향을 미쳤다. 즉, 태자의 지위는 무력으로 빼앗을 수 있는 것이 되었고, 궁정내에서 황위를 둘러싼 명쟁암투와 골육상잔이 지속되었다. 태자로 임명되었다고 황위를 반드시 안정적으로 승계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당나라때의 태자지위의 불안정성은 황위계승권을 둘러싼 격렬한 싸움을 불러왔고, 조정의 신하들도 파를 나누어 서로 다투었다. 당현종이후의 당나라정국에서도 분쟁이 끊이지 않았고, 중앙정부는 점차 쇠약해졌다. 그래서, 현무문지변이 남긴 후유증은 당나라황실자손들에게 영향을 깊이 미쳤다. '정관성세'는 지속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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