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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남북조)

풍소련(馮小憐) : 옥체횡진(玉體橫陳)

by 중은우시 2007. 8. 15.

 

풍소련은 남북조시대 북제(北齊)의 후주(后主)인 고위(高緯)의 귀비(貴妃)이다. 풍소련은 원래 목황후(穆皇后) 신변에 있던 시녀였다. 당시 고위는 비파를 잘 연주하던 조소의(曹昭儀)에게 푹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목황후는 조소의를 견제하기 위하여 풍소련을 고위에게 보내기로 한다. 그러나, 의외의 결과가 나타났다. 고위가 조소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데는 성공했지만, 풍소련은 조소의보다 훨씬 심하게 고위를 꼼짝못하게 붙들어 놓았다.

 

풍소련은 어렸을 때부터 남자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잘 알았다. 어떤 연구자에 의하면 풍소련은 3가지 재주가 있었다고 한다. 첫째는, 풍소련이 음악과 무용을 어렸을 때부터 배웠다고 한다. 아마도 목소리도 좋았을 것이고 노래도 잘했을 것이며, 춤도 잘 추었을 것이다. 동시에 일상생활에서 남자를 홀리는 수완도 익혔고, 궁중에 들어온 이후에는 여러 후궁들이 총애를 다투는 모습을 잘 관찰했으며, 그녀만의 독특한 기량으로 승화시켰을 것이다.

 

둘째로 풍소련은 아주 세심하고 새로운 것을 익히기를 좋아하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심지어 인체의 구조와 맥락시스템도 연구했고, 안마도 공부했다. 목황후를 모실 때, 그녀는 일찌기 추, 뢰, 반, 담, 안, 압, 제등의 수법을 사용하여 목황후의 피로를 풀어주었다. 오랫동안 실습과 이론연구를 통하여 그녀만의 안마기법을 익혔다. 나중에 그녀는 부드러운 손으로 고위의 몸을 안마해주었으니, 고위가 그녀를 좋아할만도 하였다.

 

셋째로 그녀는 타고난 몸매가 뛰어났다. 그녀의 몸은 곡선미가 있었고, 들어가고 나올 곳이 분명했다. 겨울의 차가운 계절에도 부드럽기가 면화와 같아서 따뜻했고, 여름에 푹푹찌는 더위에는 옥을 깍은 것처럼 시원했다. 고위가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북제의 후주인 고위는 풍소련에게 아주 잘 대해주었다. 보통의 황제가 애첩에게 하는 것처럼 호화로운 궁전을 지어주고, 춤추고 놀며 밤을 새우며, 사치스럽게 낭비하는 것 이외에, 대신들과 국사를 논의할 때도 고위는 자주 풍소련을 품에 안고 있거나 무릎 위에 올려놓곤 했다. 그리하여 국사를 논의하던 대신들이 제대로 쳐다보지를 못하고, 얼굴이 빨개지며, 주청을 드릴 때 말에 두서가 없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심지어, 고위는 "혼자 즐기는 것은 여럿이 함께 즐기는 것만 못하다(獨樂不如衆樂)"는 이치를 알았는데, 풍소련과 같이 아름다운 여인을 혼자서 즐기는 것은 너무 아깝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천하의 모든 남자들이 그녀가 얼마나 아름다운 몸을 지니고 있는지를 보도록 해주고 싶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풍소련으로 하여금 나체로 조당에 누워있게 하고는 대신들로 하여금 구경하도록 해주었다. "옥체횡진"이라는 고사는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이처럼 아름다운 미인에, 이처럼 황제의 총애를 받았으니, 나라에 화를 끼친 여인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다.

 

풍소련은 전쟁이 사냥처럼 재미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냥하는 걸 구경하는 것이 전쟁하는 걸 구경하는 것만큼 재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고위를 종용하여 평양(平陽)을 되찾는 전투를 벌이도록 하였다. 고위는 그녀의 말이라면 모두 들었으므로 그대로 따랐으며, 풍소련도 군복을 입고 따라나섰다.

 

평양은 원래 북제의 땅이었고, 북제가 출병한 것은 실지를 회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평양성을 완전히 포위하였는데, 병사들은 서로 앞장서고자 했고, 사기가 충천해 있었다. 평양을 지키고 있던 북주(北周)의 대장인 양사언(梁士彦)은 비록 죽기를 각오하고 사수하였지만, 북제군대가 용감하게 쳐들어오는 바람에 바람 앞의 등불처럼 되고 말았다. 거의 승리를 움켜쥐기 직전, 즉 평양성이 다시 북제의 손에 되돌아오려고 할 즈음에, 풍소련은 이니 해가 지려고 해서, 공성전의 성대한 장면을 제대로 구경할 수 없게 된다는 점이 아쉬웠다. 그리하여 다음 날 다시 싸우자고 제안한다. 고위는 그녀의 요구를 바로 들어준다.

 

다음 날은 하늘이 어둡고, 북풍이 불며, 눈이 흩날렸다. 대지는 점차 은백색으로 바뀌어 갔다. 풍소련은 이 날도 날씨가 좋지 않아서, 제대로 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공성을 잠시 중단해달라고 부탁한다. 어두운 밤이나 날씨가 좋지 않은 때가 공성을 벌이기에는 가장 좋은 때라는 것을 누가 모르겠는가. 그녀로 인하여 가장 좋은 두 번의 기회를 잃어버렸다. 눈이 그치고 날이 맑아진 후에 북주의 황제 고위는 친히 대군을 이끌고 평양으로 갔다. 두 군대는 연일 혈전을 벌였는데, 결국 북제군대는 패하고 진양으로 물러나게 된다.

 

평양전투가 끝난 후 북주의 무제(武帝)는 원래 병사들이 추운 겨울에 전투를 하느라고 힘들었으니, 군대를 장안으로 되돌려 휴식을 취하고자 한다. 그러나, 북주의 대장인 양사정은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이런 기회가 오지 않는다고 건의하며, 바로 북제의 중요도시인 진양을 치도록 건의한다. 북주의 무제는 양사언의 의견을 받아들이고, 스스로 대군을 이끌고 북제군을 추격한며, 진양성을 공격한다. 진양은 북제가 오랫동안 경영해온 북방의 중요도시이다. 성벽도 높고 아주 견고한 성이었다. 성안에는 양식과 무기도 충분히 있었으며, 1년도 끄덕없이 버틸 정도였다. 북주의 병사들은 먼 곳에서 달려왔고, 추운 겨울이었으므로 며칠을 버티지 못하고 물러날 상황이었다. 고위는 북주의 군대가 스스로 물러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위는 성에 높이 천교(天橋)를 건설하게 하여, 자주 풍소련과 함께 천교에 올라 적군의 동향을 살피곤 하였다. 이것은 적정을 분석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냥 관광하는 것이었다. 천교에서 내려오면 풍소련은 춤으로 고위를 위로했고, 고위는 후안무치하게 "네가 춤추는 것을 보니 머리가 맑아지고, 기운이 난다"라고 말하고는 했다.

 

하루는 나무로 만든 천교가 돌연 무너져 내렸다. 풍소련은 이를 불길한 징조라고 생각해서, 고위에게 진양을 버리고 업성(城)으로 되돌아가자고 졸랐다. 고위는 정말 풍소련의 말을 듣고, 업성으로 되돌아갔다. 그리하여 북주는 손쉽게 진양성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북주의 군대는 싸우면 싸울수록 강해졌으며, 바로 업성으로 쳐들어왔따. 고위가 업성으로 물러난 후에도 여전히 10만정예병사를 가지고 있어서 적극 저항한다면 권토중래하고 대승을 거둘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 미인만 알고 국사는 모르는 황제는 "병이 중하면 아무 의사에게나 찾아간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편으로 보살에게 도움을 빌면서, 또 한편으로는 황위를 태자인 고항(高恒)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풍소련을 데리고 청주(靑州)로 도망쳐 버린다. 그리하여 북주의 군대는 업성도 손쉽게 손에 넣는다. 후주 고위, 태자 고항, 풍소련등은 모두 포로로 붙잡히니, 북제는 멸망하고 황하유역은 다시 북주의 손에 통일되었다.

 

고위는 포로가 된 후에 주무제에게 딱 한 가지를 요청하는데 "풍소련을 돌려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위는 풍소련을 돌려받지 못했을 뿐아니라, 자신의 목숨마저도 잃어버리게 된다.

 

풍소련은 포로로 잡힌 후, 주무제에 의하여 그의 동생인 대왕(代王) 우문달(宇文達)에게 하사된다. 우문달은 원래 여색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풍소련을 얻고 난 후에는 그녀에게 완전히 빠져버렸고, 아주 아꼈다. 오래지 않아 우문달은 다시 양견(楊堅)에게 피살되고, 양견은 다시 그녀를 우문달의 정비(正妃)인 이씨의 오빠인 이순(李詢)에게 하사한다.

 

대왕 우문달은 풍소련을 얻은 후 정실부인인 이씨를 냉대했었다. 이제 이순의 모친은 딸을 위하여 복수할 기회를 잡은 것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풍소련으로 하여금 베옷을 입고, 매일 쌀을 찧고, 나무를 베며, 밥을 하고, 빨래를 하도록 시켰다. 그리고 수시로 그녀에게 욕을 해대고 질책하고 채찍질을 했다. 풍소련이 어찌 이런 고통을 견딜 수 있겠는가. 그녀는 더 이상 생에 미련이 없자 목을 매어 자살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