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가 넓다보니 별의 별 일이 다 있었다. 황태후에서 기녀가 된 것이 비록 나라가 망한 이후의 일이라고는 하나, 스스로 '태후를 하는 것보다 기녀가 낫다'고 말하였다는데서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중국역사상의 황후, 황태후는 매우 많다. 그러나, 남북조시기의 북제(北齊)의 호태후처럼 황음무도하고, 염치가 없으며 기녀가 되는 것을 오히려 좋아했던 황태후는 정말 드문 경우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호태후는 북제의 안정군(安定郡, 현재의 영하성 고원) 사람이다. 그녀의 부친은 호연(胡延)이며 모친은 노(蘆)씨이다. 천보(북제, 문선제 고양의 연호, 기원 550년-559년)초기에 용모가 뛰어났던 호씨는 조정에서 후궁을 뽑을 때 뽑혀서 장광왕비(長廣王妃)가 된다. 기원 561년, 무성황제 고담(高湛)이 북제의 황위를 승계한 후, 장광왕비이던 호씨는 황후(皇后)가 된다.
호씨는 비록 황후이기는 했으나, 황제의 총애는 받지 못하였다. 무성황제가 총애했던 여인은 형수인 이조아(李祖娥)였다. 그리하여 무성황제는 자주 그녀의 소신궁(昭信宮)에 머물렀고, 호황후는 냉대를 받았다. 천성이 음탕했던 호황후는 적막함을 견디지 못하고, 궁중의 내시들을 불러 놀았다. 당시, 무성황제의 가장 심복인 대신은 화사개(和士開)였다. 그리하여 무성황제의 곁을 자주 드나들 던 화사개는 금방 호황후의 눈에 띄게 되었다. 그녀는 화사개에게 추파를 던지기 시작했다. 화사개는 자신의 궁중에서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호황후와 기꺼이 가까이 지냈다. 두 사람은 금방 죽이 맞아서 깊은 관계를 맺기에 이르렀다.
야심이 컸던 화사개는 호황후라는 배경을 가진 후 "심복"의 지위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화사개는 무성황제에게 호태후의 아들이며 태자인 고위(高緯)에게 황제위를 넘겨주고, 자신은 태상황으로 조용히 지내라고 권고한다. 이렇게 하면 아무런 거리낌없이 향락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혼용무능했던 무성황제는 화사개의 건의를 받아들여, 564년 아들인 고위에게 황제위를 물려주고, 스스로 태상황이 된다. 이때부터 궁궐 깊숙이 들어앉아 향락을 즐기다가 3년후에 무성황제 고담은 주색을 과도하게 즐겨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된다.
태자 고위는 황위를 계승한 후, 모친인 호황후를 황태후로 모신다. 호태후와 화사개는 더 이상 장애가 없어지자, 이제는 아무런 거리낌없이 행동하며, 조정내외에서 그들의 관계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많은 정직한 대신들은 이에 대하여 극도의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황제 고위에게 상소를 올려 화사개를 처단하도록 요청한다. 나이도 어리고 멍청했던 고위는 모친인 호태후가 화를 낼 것을 두려워하여, 그저 아뭇 소리 않고 참고만 있었으며,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화사개는 이 틈을 타서 자기 심복들을 중용하고, 자신을 따르지 않는 자들을 쫓아냈다. 일시에 그의 권세는 조야를 장악하게 되고, 지위는 혁혁해진다. 황제 고위는 그를 회양왕(淮陽王)에 봉함에 따라, 그는 북제에서 가장 권세있는 자로 된다.
화사개는 호황후라는 카드만 있으면 천하를 횡행할 수 있고 아무런 장애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그를 모살하려는 그물망이 펼쳐지고 있었다. 원래, 황제 고위의 동생인 낭야왕 고엄은 일찍부터 화사개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고엄은 호태후의 매부인 풍자종(馮子琮)이 화사개와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풍자종과 함께 계책을 꾸몄다. 그리하여 화사개가 조회에 참석하는 길에 심복을 보내어 화사개를 암살해버린다.
화사개가 죽은 후, 적막함을 견디지 못한 호태후는 부처에 예불한다는 명목으로 자주 사원을 드나들었다. 그리고, 금방 사원내의 담헌화상(曇獻和尙)과 눈이 맞았다. 두 사람은 처음에는 사원내의 선방에서 비밀리에 만남을 즐겼으나, 나중에는 호태후가 "강경(講經)"을 명목으로 담헌화상을 무성황제가 생전에 자주 거주하던 내전까지 불러들여, 밤낮으로 담헌과 함께 잤다.
호태후와 담헌의 관계는 모든 사람이 다 아는 일이 되었다. 사원내의 화상들도 뒤로 숨어서 담헌을 태상황이라고 불렀다. 그저 황제 고위만 모르고 있었다. 하루는, 고위가 입궁하여 모친 호태후에게 문안인사를 하러 갔는데, 호태후의 곁에 처음 보는 여승이 두 명이 있는데 용모가 뛰어났고, 고위의 마음에 들었다. 모친의 방에서 나온 후, 그는 즉시 명을 내려 두 여승에게 궁에 들어와 '시침'하라고 하였다. 그날 저녁, 두 명의 여승은 고위의 침궁으로 불려왔다. 고위가 그녀들과 즐기고자 하였는데, 두 여승은 죽어라 반항하였다. 고위가 대노하여, 강제로 두 여승의 옷을 벗겼는데, 그제서야 이 "여승"이 원래는 여장남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원래 이 두 명의 "여승"은 담헌 수하의 어린 중들이었다. 예쁘게 생겨서 호태후의 눈에 들었다. 호태후는 그들을 궁중으로 데려가고 싶었는데, 아들인 고위가 알까 두려워, 다른 사람의 눈을 속이기 위하여 어린 중들로 하여금 여승으로 분장하도록 한 후에 궁중에 데려온 것이었다. 고위는 그 사실을 모르고, 그들을 자기의 침궁으로 데려갔던 것이다. 이로 인하여 모친 호태후의 행적은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었다.
고위는 모후의 음행을 알게 된 훙, 부끄러움이 분노로 바뀌었다. 다음 날, 그는 두 명의 어린 중들의 내력을 조사하게 하여, 담헌에 대하여도 알게 되었다. 사실이 다 밝혀진 후, 고위는 담헌과 두 명의 어린 중은 모두 참수하게 하였고, 모친 호태후는 북궁으로 옮기게 하여 유폐시켜 버렸다. 그리고, "내외의 모든 사람들은 모두 태후와 만나서는 안된다"고 명을 내린다. 이어지는 조사과정에서 고위는 또 원산왕등 지방관리들이 태후와 관계가 있었음을 알고는 모두 주살한다.
577년, 북주는 일거에 부패한 북제를 멸망시킨다. 호태후는 이로 인하여 다시 자유를 얻게 되었다. 당시, 호태후의 나이는 40이 안되었다. 비록 약간 나이는 들었지만, 기품은 여전했다. 황태후의 지위를 잃은 후, 음탕했던 호태후는 그녀의 며느리인 북제의 후주 고위의 황후인 나이 겨우 20여세의 목사리와 함게 북주의 수도 장안에서 기녀가 된다. 이 소식이 전해진 후, 장안의 인사들이 앞다투어 찾아오고 영업은 성황을 이루게 된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호태후는 흥분해서 며느리인 목황후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황후노릇하는 것이 기녀노릇하는 것만큼 재미가 없다"
수문제 개황연간(581-600)에 호태후는 장안에서 병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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