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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남북조)

신비의 모용세가(慕容世家)

by 중은우시 2007. 6. 5.

"삼연(三燕)"은 동진십육국시대에 선비모용씨(鮮卑慕容氏)가 건립한 전연(前燕), 후연(後燕), 북연(北燕)의 세개의 지방정권을 말한다. 이들은 모두 용성(龍城, 지금의 요녕성 조양시)을 수도나 부도로 하였으며, 100여년간 지속되어 조양시의 역사상 찬란한 "삼연문화"를 창조하였다. 이로 인하여 조양시는 "용성" 또는 "삼연고도"라는 명칭을 듣고 있고, 이 지역의 문화를 "삼연문화"라고 부른다.

 

1. 건국전의 모용선비

 

모용선비는 동호(東胡)족의 후손이다. 동호족은 고대로부터 동북지방에서 활동하던 민족이다. 전국시대에, 동호는 연(燕)나라의 동북쪽에 거주했으니, 지금의 내몽고 적봉과 요녕의 조양 및 그 주변지역이다. 연소왕때, 대장인 진개(秦開)가 군대를 이끌고 동호를 쳤고, 동호는 대패하여 북으로 천여리 물러나게 된다. 이것이 역사상 유명한 "진개각호(秦開却胡)"이다. 연나라는 동호가 거주하던 지역에 상곡(上谷), 어양(漁陽), 우북평(右北平), 요서(遼西), 요동(遼東)의 5군을 설치했다.

 

동호족은 나중에 오환(烏桓)과 선비(鮮卑)의 두개 부족으로 발전한다. 동한시기에 오환과 선비의 두개 부족은 동북과 북방의 여러 지역에 거주한다. 선비족은 나중에 모용(慕容), 우문(宇文), 단씨(段氏)의 삼부(部)로 나뉜다.

 

207년 조조가 요서 유성의 오환을 평정한 후, 모용선비의 우두머리인 막호발(莫護跋)은 기회를 틈타 무리를 이끌고 요서로 진입한다. 238년 위나라의 사마의는 요동에 할거하던 공손연(公孫淵)을 토벌하는데, 막호발도 무리를 이끌고 요동을 토벌하는 전투에 참전한다. 요동의 공손씨가 멸망한 후, 조조의 위나라는 막호발을 솔의왕(率義王)에 임명하고, 막호발은 대극성(大棘城)의 북쬭에 자리잡는다. 막호발이 죽은 후, 아들인 목연(木延), 손자인 섭귀(涉歸)가 대대로 우두머리가 된다. 나중에 섭귀의 아들인 모용외(慕容廆, 269-333)가 수령이 된다. 섭귀의 또 다른 아들인 토곡혼(吐谷渾)은 무리를 이끌고 현재의 감숙, 청해일대로 가서 토곡혼국을 건립한다.

 

모용외는 능력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우두머리가 된 후 288년 다시 요서로 돌아간다. 294년 대극성을 수도로 삼는다. 요서지구는 전국시대이래로 한문화가 유입된 곳이었고, 동북지방과 화북지방을 연결하는 통로였다. 대릉하, 소릉하유역에는 비옥한 토지와 풍부한 자원이 있어, 농사를 짓거나 유목을 하는데 편리했다. 이는 모용선비가 요서를 근거지로 하여 정권을 건립하고 중원을 노리는데 유리한 위치로 작용했다.

 

모용선비는 요서로 들어간 후, 한문화를 받아들였고, 유목경제를 농업경제로 계속 변모시켰다. 중원의 선진적인 사상문화, 농업생산기술, 화폐, 일상용품, 생산도구, 병기를 대량으로 수입해서 썼다. 중원에서 도망쳐온 지식인들도 흡수함에 땨라, 중원에서 전란을 피해 많은 지식인들이 요서로 들어왔다.

 

2. 전연(前燕)

 

333년, 모용외가 죽은 후, 그의 셋째아들 모용황(慕容皝, 297-348)이 평북장군, 평주자사로 모용선비를 이끌었다. 337년, 모용황은 왕을 칭하고 국호를 연이라 하며, 도성을 극성에 두니, 역사서에서 얘기하는 전연이다.

 

341년, 모용황은 양유, 당주를 유성의 북쪽, 용산의 서쪽에 보내어 용성을 쌓게 한다. 342년, 모용황은 도성을 극성에서 용성으로 옮긴다. 동진의 성제는 사신을 파견하여 모용황을 정식으로 왕으로 인정한다.

 

여러해의 전투를 거쳐, 모용황은 우문선비와 단씨선비를 소멸시키고, 부여와 고구려도 머리를 숙이게 한다. 이리하여 전연정권의 세력범위는 크게 확대되었고, 동북지방의 패주가 된다.

 

348년, 모용황이 병사하자 아들 모용준(慕容儁, 319-360)이 승계한다. 모용준은 "책을 많이 읽고, 문무에 뛰어났다. 모용준은 염민이 후조를 멸하고 하북이 어지러운 틈을 타서, 군을 이끌고 남하하여 계성(城)을 점령하고 도성을 계성으로 옮긴다. 352년, 염민의 도성인 업성이 모용준에 의하여 함락되고 염위는 멸망한다. 모용준은 계성에서 정식으로 황제를 칭하고, 백관을 둔다. 계성은 현재 북경의 서남쪽이므로, 역사상 북경에서 황제를 칭한 첫번째 인물이 바로 전연의 모용준이 된다.

 

전연정권은 남으로는 동진과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며, 서로는 전진과 이웃하고 있고, 동북의 후방을 배경으로 하는 강대한 정권이 되어 있었다.

 

357년, 모용준은 도성을 계성에서 업성(城)으로 옮긴다. 360년, 모용준이 죽으면서 아들 모용위(慕容)가 즉위한다.

 

370년, 전진(前秦)의 부견과 왕맹은 대군을 이끌고 업성을 포위한다. 모용위는 문무백관을 이끌고 나가서 항복한다. 이로써 전연은 멸망한다. 전진은 전연의 옛땅을 평주로 하고, 석월(石越)을 평주자사에 임명한다.

 

3. 후연(後燕)

 

383년, 전진의 부견이 비수지전에서 실패하면서, 전진에 투항했던 모용선비의 귀족들은 속속 돌아와서 복국을 꿈꾸게 된다. 386년, 모용수(慕容垂, 326-396)가 황제를 칭하고, 백관을 두고, 태자를 두며, 중산(中山)을 수도로 정하며, 유주, 기주, 평주의 삼주를 지배하니, 현재의 하북, 요서일대이다. 396년 군대를 이끌고 북위를 치다가 패하고 병사한다.

 

397년, 후연의 모용보(慕容寶)는 중원에서 탁발씨의 위에 대패하여, 도성을 다시 용성으로 옮긴다.

 

모용희(慕容熙, 385-407)가 연의 황제를 지낼 때 황음무도하고 사치가 극에 달하였다. 407년, 풍발(馮跋, ?-430)과 고운(高雲, ?-409, 고구려족, 모용보의 양자가 되어 모용씨를 받는다)이 부황후를 장사지내는 틈을 타서 모용희를 죽이고, 고운을 천왕으로 모신다. 이리하여 후연도 멸망한다.

 

4. 북연(北燕)

 

409년, 고운은 신하들에게 살해당한다. 이후 풍발이 왕으로 옹립되는데, 국호는 여전히 연이라 하고, 연호를 태평(太平)으로 하고 여전히 용성을 수도로 하였다.

 

풍발이 즉위한 후, 후연이 멸망한 교훈을 받아들여 사회안정과 발전에 필요한 조치를 취하였다. 이로써 북연의 국세는 급속히 회복되고, 정권도 안정된다.

 

풍발이 죽은 후, 동생인 풍홍(馮弘)이 태자 풍익(馮翼)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된다. 436년 4월, 북위는 대장 고필, 아청으로 하여금 군대를 이끌고 북연을 공격한다. 북위의 군대가 백랑을 점령한 후, 용성에 이르렀다. 상서령이던 곽생이 성문을 열고 위나라군을 맞이한다. 이때, 고구려의 구원병이 용성에 도착했고, 풍홍과 용성의 백성들은 고구려군을 따라 동으로 옮긴다. 고구려군대는 용성의 재물을 빼앗아 성을 비우고, 용성의 궁전은 불질러버린다. 이로써 북연이 멸망한다. 풍홍은 요동으로 간 후, 평곽에 안치되는데, 2년후 고구려군에 의하여 살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