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유(劉裕)는 동진(東晋)으로부터 정권을 빼앗아 송(宋)을 건국한다. 이후 순제가 황제위를 제(齊)에 물려주기까지 모두 8명이 황제위에 오른다. 그런데, 유유가 죽은 다음부터 최고권력을 두고 골육간의 상잔이 벌어지는데 심한 정도가 상궤를 벗어난다.
2대의 유유의 아들은 모두 7명이 있다.
장남 의부(義符)는 태자의 신분으로 직위한다. 바로 소제(少帝)이다. 그러나, 재위 1년만에 황당한 짓을 많이 저질러 고명대신 서선지(徐羨之), 부량(傅亮), 사회(謝晦)등에게 죽임을 당한다.
차남 의진(義眞)은 역시 서선지등에게 살해당한다.
삼남 의륭(義隆)이 황제에 옹립되니 바로 문제(文帝)이다. 문제는 서선지등을 2왕을 살해한 죄명으로 주살하고 처자들까지 죽인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아들 태자 유소(劉劭)에게 죽임을당한다. 원가29년, 유소는 동부이모 형제인 유준과 결탁하여 부친을 빨리 죽도록 사설을 사용한다. 이것이 들통나자 문제는 태자를 폐위하려고 한다. 그러자, 유소는 유탁과 합하여 궁정정변을 일으켜 문제와 총비 반숙비등 수십명을 죽이고, 등극한다.
사남 의강(義康)은 문제의 동생으로 재주가 있었다. 원가13년 문제가 병이 든 후에는 매번 정사를 의강에게 위탁했다. 그러나, 의강은 참언을 들어 전공이 탁월했던 단도제(檀道濟)를 죽여버린다. 그러자, 적국 북위에서는 매우 기뻐했다. 문제가 병이 많자, 의강의 심복 유담등은 의강을 옹립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들통나자 유담은 죽이고 의강은 영남으로 유배보낸다. 원가22년에 공희, 범엽등이 다시 의강을 옹립하려고 하자 그들을 모두 죽이고 의강을 서인으로 만든다. 원가28년, 위나라가 남침해오자 문제는 의강이 다시 난을 일으킬 것을 우려하여 의강을 죽여버린다. 이번 형제간의 상잔은 "팽성지변"(의강이 팽성왕이었음)이라 부른다.
오남 의공(義恭)은 나중에 효무제 유준을 옹립한 공으로 태재의 직을 맡고, 유준의 칼을 벗어난다. 유준의 아들 자업이 황제가 되었을 때에도 역시 죽음을 면한다. 그런데, 대신 유원경, 안사백등이 유자업을 폐위하고 의공을 옹립하려다가 발각되자 자업은 의공을 죽이고, 그의 네 아들도 죽여버린다. 동시에 유원경 및 아들 8명, 동생 6명과 조카들을 죽이고, 안사백과 그 여섯 아들을 다 죽인다.
육남 의선(義宣)은 형주에 오래 머물렀다. 효무제 유준이 음험하고 독랄하여, 의선은 위험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이웃 강주자사가 효무제를 토벌하고 의선을 옹립하여 하고 강북 이주자사 노상, 서유보등과 이를 논의한다. 의선이 반란에 참여한 주요 이유는 유준이 음란하여 의선의 여러 딸을 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란은 실패하고 의선과 아들 16명과 참여한 자사, 태수등이 피살당한다. 일부 의선의 반란에 참가했던 병사들은 북위로 망명한다. 이로써 국력이 크게 손상되었다.
칠남 의계(義季)는 아들중 유일하게 비명에 죽지 않는다. 그는 재주도 없고, 그저 매일 술이나 마시고 정사에 관여하지 않다가 원가 24년에 죽는다. 그는 일찍 죽어서 화를 당하지 않을 수 잇었다.
3대에 내려와서도 나아지지는 않았다. 문제의 19명의 아들의 운명을 보자.
15남, 16남, 17남은 요절했고, 5남, 7남은 병사했다.
9남 유창(劉昶)은 원래 입조하여 황제가 된 조카 자업을 축하할 예정이었으나, 자업은 자기의 위엄을 세우기 위해 유창을 토벌하겠다고 선포하고 군대를 일으켰다. 유창은 어쩔 수 없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패배한다. 이후 북위에 투항한다. 북위는 그를 매우 중시하여 공주를 시집보내고 왕의 작위를 내리고, 정남장군에 봉한다. 이처럼 유창은 적국에 투항함으로써 목숨을 보전했다.
삼남 유준(劉駿)과 십일남 유욱(劉彧)은 전후로 황제에 안정되게 올랐으므로(유준은 효무제, 유욱은 명제), 살신지화를 면할 수 있었다. 오히려 그들은 형제와 조카들을 죽였다.
유준이 죽인 문제의 아들들은 장남 유소, 차남 유준, 사남 유락, 육남 유탄, 십사남 휴무가 있고, 유욱이 죽인 아들들은 팔남 유위, 십이남 휴인, 십삼남 휴우, 십구남 휴약이 있다.
유소가 부친을 죽이고 즉위하자 밀령을 내려 강릉의 유준을 죽이라고 명한다. 유준은 어쩔 수 없이 병사를 일으켜 천하에 격문을 붙여 원흉(유소를 가리킴)을 토벌하자고 한다. 결과는 유소가 패해서 피살되고, 사남도 같이 죽는다. 이 때 같이 죽은 자들이 차남 유준과 유준의 세 아들, 소의 비 은씨와 소, 준의 딸, 첩등이 모두 죽는다. 은씨는 죽으면서 옥승에게 "너희 집안이 골육상잔을 벌이는데, 왜 죄업는 자를 함부로 죽이는가?" 은비가 했다는 이 말은 아직도 전해진다. 옥승의 대답은 "황후가 되었는데, 죄가 없다면 무슨 말인가?"라고 했다는 것이다.
유락은 어려서부터 재능이 있었고, 원래 삼남 유준을 그다지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원래 유소가 중용했었으므로 투항을 가장 늦게 하였다. 그래서 유준은 사람을 보내어 독살하고 사후에 사도에 추증했다.
유탄은 459년 광릉에서 공개적으로 반란을 일으킨다. 유준이 참언을 듣고 소인을 등용하며, 무고한 자들을 죽이고 음란한 행위를 한다는 것이다. 유준은 유탄과 가까웠던 모든 자들을 죽이니 죽은자가 천을 헤아렸다. 광릉을 함락시키고, 유탄은 죽이고, 모친, 처는 모두 자살하였다. 유탄의 성을 유(留)씨로 바꾸게 하고 황족에서 제명했다. 여기에 광릉의 사람을 모두 죽이라고 명한다. 다행히 전선총지휘를 맡은 심경지 장군이 간하여 성년남자만 죽이고 미성년남자는 살려두며, 여자들은 모두 전리품으로 삼아 장졸들에게 나눠주었다. 이렇게 해도 3천여명이 죽었다.
유혼은 나이가 어려서 농담으로 스스로를 '초왕'이라고 하였고, 연호를 영광으로 정하고, 백관을 두었다. 이것은 어린아이 장난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고발되어 유혼의 명은 끝나고 만다.
유휴무는 성격이 급했다. 옹주자사때 20세가 되지 않았는데, 조정에서 보내온 감독관원이 마음에 들지 않아 양양에서 반란을 일으킨다. 스스로 차기대장군이 되어 싸웠으나 금방 진압되고 죽는다.
유위는 명제의 형이다. 하동의 유흔위가 모반하면서 노강왕 유위를 옹립하려 한다. 위는 유와 통모하나, 고발되어 유흔위는 주살당하고, 유위는 자사로 강등된다. 유위는 그 후에도 억울하다는 말을 하다가 파면된다. 그리고 자살한다.
명제의 여러 동생들은 휴범이 재주가 모자라 명제가 걱정하지 아니하여 안죽인 것을 빼고는 나머지 휴인, 휴우, 휴악은 모두 주살당한다. 그가 가장 걱정한 것은 자기가 죽은 후 태자의 손에서 동생들이 권력을 빼앗을 것이어서 모두 하나하나 죽여버린다. 휴인은 황제가 보자고 부른 다음에 약을 먹여 죽여버린다. 그리고는 휴인이 모반했다고 선포한다. 그의 두 아들에 대하여는 관대하게 처리하여 죽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가지 않고, 명제의 아들 유욱이 등극하자마자바로 두 사촌을 죽여버린다.
휴우는 성격이 강렬하여, 나중에 어린 아들이 다루기 힘들 것으로 생각하고 명제는 같이 사냥하는 길에 죽여버린다. 그리고는 말에서 낙마했다고 한다.
휴약은 성격이 온후하고 인간관계가 좋았다. 명제는 강주자사로 보낸 후 건강에 도착했을 때 사약을 내려 죽인다.
그리고 신하들 중에서도 인심을 얻고 있던 중신 오희, 황친이며 중신인 왕경문에 사약을 내리고, 예주태수 유암을 죽인다. 유암을 죽인 이유는 정말 황당했다. 명제가 꿈을 꾸는데 누가 유암이 반란을 일으킨다고 고했다는 것이다. 잠이 깨자마자 바로사람을 보내어 죽여버렸다.
휴범은 명제의 손에 죽지는 않았지만, 그 아들이 황제에 오른후 역시 죽임을 당한다.
송문제의 19아들 중에서 요절하거나 병사한 경우를 빼고 화를 면한 사람은 세 사람뿐이다. 황제 두명과 적국에 투항한 한 명이다. 나머지 11명은 전부 비명에 죽었다.
삼대의 사람들이 다 죽고, 다시 사대의 후손들에게 칼을 들이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순서는 삼대를 먼저 죽이고 사대를 죽인 것은 아니었고, 순서에 관계없이 죽였다. 사대의 주요한 사람들은 효무제 유준의 아들과 명제 유욱의 아들들이다.
효무제는 모두28명의 아들을 주었다. 요절한 10명을 제외하고 18명의 아들은 모두 죽었다. 태자 유자업은 황위를 계승했으니 전폐제(前廢帝)이다. 자업이 등극할 때 겨우 16세였고 성격이 광포했고, 행위가 괴상했다. 보정대신 대법흥은 거슬린다는 이유로 죽이고, 태재 유의공을 죽이고, 동부이모동생인 자란을 죽인다. 자란은 효무제의 팔남이다. 자란을 죽인 이유는 그의 모친 은귀비가 궁정을 장악했고, 효무제의 사랑을 받았었기 때문에 그를 미워했던 것이다. 죽을 때 자란은 10살이었다. 자란이 죽을 때 하였다는 말은 "내세에는 제왕가에 다시 태어나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이었다. 동모동생인 사(이십이자)와 여동생도 살해했다.
유자업은 또 다른 동생 삼남 자훈을 죽이려고 하였는데, 이유는 문제 의륭, 효무제 유준이 모두 셋째이면서 태자를 대신하여 황제가 되었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그를 죽이는 계획을 시행하기 전에 스스로가 먼저 수하에게 피살된다.
자업이 죽고 나서 유욱(명제)가 즉위한다. 유욱은 문제의 십일남이고, 폐제 유자업의 숙부이다. 그가 황제에 오르는 것은 원래 법도에 맞지 않았다. 강주자사 자훈은 10살에 불과했는데, 원래 폐제에게 반기를 들었으나 나중에 주변에서 황제로 옹립하자 명제의 건강정권과 대항하기 시작했다. 자훈의 형제인 자수, 자욱, 자원, 자방이 그쪽에 가담했다. 사실 이들은 모두 어린아이들이었다. 그저 다른 사람들의 손에 놀아나는 것일 뿐이었다. 자훈이 패하고 피살되고 나머지 동생들도 모두 죽었다. 사남 자수, 육남 자방, 칠남 자욱, 구남 자인, 십일남 자진, 십삼남 자원, 십육남 자맹, 십팔남 자산, 이십일남 자여, 이십오남 자기, 이십육남 자기, 이십칠남 자사, 이십팔남 자열이 모두 죽었다. 남은 것은 이남 자상이었는데, 그도 명자의 아들인 후폐제 유욱이 황제가 되면서 죽임을 당한다.
송명제는 철저하게 청소를 하였는데, 특히 효무제의 후손은 개미새끼 한마리 남겨놓지 않았다. 그러나, 형제의 정을 생각해서 자기 아들 중 유찬을 효무제의 양자로 넣어주어 제사는 잇게 해주었다. 이런 코미디는 정말 중국특색의 것이 아닐 수 없다.
명제 유욱은 조카와 형제를 죽였고, 공신을 죽였으며, 국사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유송왕조가 말일을 향하고 있었다. 여기에 그의 11명의 아들들도 역시 서로 죽이기 시작하면서 결국 소씨의 제나라에 정권을 넘겨주게 된다.
명제의 장자인 유욱은 황제가 되나 어린 나이에도 살인본성이 강했고, 부친보다 심했다. 짧은 4년의 기간동안 숙부 휴범과 두 아들을 죽이고, 유경소와 세아들 및 동당 수십인을 죽이고, 숙부 휴인의 두아들 백융과 백유를 죽이고, 공신 고도경을 사약을 내려 죽이고, 대신 두유문, 심발, 손초지를 모반죄로 죽였다. 심발은 죽기 전에 소황제를 욕했다. "너는 걸주보다 심하다. 하루도 사람을 죽이지 않는 날이 없구나"
결국 유욱이 죽자 권신 소도성(蕭道成)이 명제의 셋째 아들 유준을 황제로 앉힌다. 당연히 괴뢰황제였다. 그가 순제(順帝)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도성이 정식으로 송나라를 대체하고 제나라를 설립한다. 소도성은 황제에 오른 후, 유씨들끼리 완수하지 못한 유씨혈족말살작업을 끝마친다. 유씨의 송나라는 4대에 8명의 황제가 오르고, 짧은 59년의 기간동안 골육상잔의 참혹함은 공전절후였다. 개국황제 유유의 일곱아들, 사십여손자, 육칠십증손자가 모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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