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서태후)

서태후가 전세계를 상대로 선전포고를 하게 된 경위

by 중은우시 2006. 12. 29.

어떤 사람은 서태후(西太后, 慈禧太后)를 평가할 때, 그녀는 감히 전세계를 상대로 선전포고를 하였다는 점을 좋게 보는 경우도 있다.

 

사실 이런 주장은 그다지 과학적이지 못하다. 먼저, 경자(庚子)년간에 중국이 팔국연합군과 전쟁할 때 상대한 것은 8개 나라 또는 11개 나라이지 전세계는 아니었다. 다음으로, 서태후의 "선전조서(宣戰詔書)"는 대내용이지 대외용이 아니었다. 즉, 단지 국내에 공포하고 침략에 대항하라는 전쟁동원령이었지, 다른 나라에 건네면서 상대방과 전쟁상태에 돌입하겠다는 '선전포고'는 아니었던 것이다. 실제로 이 전쟁중에도 열강들은 중국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고, 청나라 정부도 열강에 선전포고를 한 적이 없다. 쌍방은 심지어 외교관계를 단절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국제관례로는, 쌍방이 선전포고없이 한 전쟁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서태후는 왜 선전조서를 공포하였는가? 이에 대하여는 몇 가지 해석이 있다.

 

첫번째 해석: 서태후가 잘못된 보고서를 받았는데, 그 중의 한조가 그녀에게 권력을 내놓고 물러나라는 것이 있었다는 것이다(歸政). 서태후는 노한 끝에 대외선전을 결심하였다고 한다. 이 설은 범문란(范文瀾)이 대표적으로 주장한다. 그는 <<중국근대사>>에서 "6월 16일 깊은 밤에, 강소양도의 나도걸(羅道傑)은 영록(榮祿)에게 비밀리에 네 가지를 보고했다. 그중의 하나가 바로 외국인들이 황태후를 압박해서 권력을 내놓게 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다음 날 여명에, 영록은 서태후에게 이 사실을 급히 보고한다. 서태후와 영록은 외국군대의 타격을 여러번 받았으므로 모두 놀라서 어찌할 줄을 몰랐다. '귀정'이라는 이 한 조문에 그들은 머리가 돌아버렸다. 서태후는 매우 비분강개했고, 사실여부를 더 이상 확인하지도 않고, 건곤일척을 벌이기로 결심한다...21일, 정식으로 선전포고하고 전쟁을 개시한다" 그는 서태후가 놀라서 머리가 혼란된 상태에서 선전을 결심하였다고 본다. 6월 25일이 되어 그녀는 점점 정신을 차리고, 대사관을 포위공격하는 것을 중지하라고 지시하고, 열록을 각 대사관공사관에 보내어 평화롭게 해결하는 방안을 강구하도록 명한다.

 

두번째 해석: 청나라정부가 의화단으로부터 강력한 압박을 받아 할 수없이 대외선전을 하였다는 것. 이 설은 호승(胡繩)이 대표적인 주장자이다. 그는 <<제국주의와 중국정치>>라는 책에서 청정부가 대외선전을 하게 된 이유는 그저 의화단의 위세가 두려웠기 때문이고, 대외전쟁이라는 명분으로 인민으로부터의 공격을 피하고자 해서이다라고 본다. 나중에 그는 <<아편전쟁에서 5.4운동까지>>라는 책에서 다시 한번, "서태후가 5월 25일 선전조서를 공포한 이유는 근본적으로 의화단의 칼끝이 그녀의 머리, 그녀를 대표로 하는 통치권력의 머리위에 떨어지는 것을 피하기 위한 것이고, 의화단군중을 제국주의침략작전의 제1선으로 몰아내어, 제국주의열강의 역량을 이용하여 의화단을 소멸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은 철두철미 허위의 선전서이다."라고 하였다.

 

세번째 해석: 서태후가 유록의 천진대고구전투의 가짜 승리보고를 받고 고무되었기 때문이라는 설. 이 설은 공상길(孔祥吉. 미국하버드대학 페어뱅크센터 연구원)이 대표적인 주장자이다. 그는 <<의화단운동의 약간중요사실 변석>>이라는 글에서 서태후가 대외선전을 한 것은 여러 측면의 원인이 있는데, 그녀로 하여금 최후로 선전의 결정을 하게 한 것은 유록이 6월 20일날 보낸 허위승전보였다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서태후는 서양인들이 대고구의 포대를 공격한다는 소식을 들은 후에도 즉시 선전을 공포하지 않았고, 그저 전방의 정세를 눈을 씻고 바라보고 있었는데, 6월 21일, 서태후는 유록의 <<접장획승절(전투를 벌여 승리하였다는 보고서)>>를 받았는데, 유록의 이 보고서는 과장되고 허위적인 면이 많았다. 이 것은 서태후를 고무시켰고, 그녀의 요행심리를 더욱 강화시켰다. 그래서 서태후는 허위승전보에 정신차리지 못한 상태에서 그 날자로 선전조서를 발표한다.

 

이외에 민간에서는 야사에 근거하여 서태후가 의화단의 도창불입(칼과 총이 몸을 상하게 하지 못한다는 주장)이라는 엉터리없는 말을 믿어서 선전조서를 발표했다는 주장도 있다. 심지어 공상길 교수 또한 서태후가 의화단의 용맹함을 믿었으며, 이것이 선전조서를 발표한 원인중의 하나라고 말한다.

 

위의 몇가지 주장은 "머리가 제정신이 아니었다는 설"(위의 첫번째, 세번째 해석)과 "허위선전포고설"(두번째 해석)로 나뉠수 있는데, 모두 일면만을 본 것이다. 몇가지 주장이 근거로 하고 있는 사료는 위작(경선일기)이거나, 내력이 불명이거나(경자서수총담), 혹은 단장취의한 것이거나(유지, 주절) 혹은 사료 자체가 사실이 아니다(숭릉전신록). 그러므로, 역사의 고증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모두 성립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실제로 가장 먼저 그녀로 하여금 대외선전을 결심하게 한 것은 세이무어의 북경침범이었고, 최후로 서태후가 결심하게 한 것은 열강의 요구와 천진대고구에 대한 공격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