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손중산)

손중산의 고민: 일본에서 배울 것인가, 러시아에서 배울 것인가.

by 중은우시 2007. 7. 18.

글: 지효민(智效民)

 

20세기가 시작할 때, 한가지 사건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바로 중국영토내에서 발생한 러일전쟁이다. 두 외국군대가 왜 중국땅에서 싸우게 되었는가? 이것은 그들이 중국영토를 쟁탈하려는 것과 관련이 있다. 중국의 근대사를 살펴보면, 중국영토에 욕심을 냈던 나라는 사실 이 두 나라이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그들은 20세기초에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했다. 그중에는 군사공격도 있고, 문화침략도 있으며, 정치협박, 인심매수도 있고, "경제원조"도 있었고, 사상수출도 있었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동시에, 중국인들은 서방문명과는 거리가 비교적 멀기 때문에, 일본, 러시아가 가까이 있는 상황이므로, 먼저 일본을 배우기로 선택하고, 메이지유신의 길을 걸어가려고 했다. 나중에는 러시아를 배우기로 선택하고 10월혁명의 길을 걸어가려고 했다. 이런 노선의 선택에는 아주 중요한 하나의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나라를 구하고 존속시키겠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더욱 중요한 하나의 문제를 경시하게 되었다: 정치적인 민주화, 경제적인 독립, 사상의 자유가 있어야만, 모든 사람들이 해방될 수 있고, 사회의 현대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바꾸어 말하면, 도대체 주권이 인권보다 위에 있느냐, 아니면 인권이 주권보다 위에 있느냐의 문제가 바로 전통사회와 현대사회를 가르는 분수령인 것이다. 지금 일부 젊은이들이 편협한 민족주의, 편협한 애국주의와 "삼강오륜"을 핵심으로 하는 전통문화에 고혹되어, 문화대혁명을 동경하고 심지어 의화단운동을 동경하며 스스로 전통사회의 신민(臣民)이 되고자 하고 있는데, 이는 바로 이런 이치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외에 우리는 "구국을 계몽보다 중시하는 분위기"하에서 살아왔으므로, 계몽을 하려는 싹이 나타나면 바로 구국이라는 구호로 이를 덮어버리곤 했었다. 20세기에 일어났던 하나 하나의 학생운동을 보면 거의 모두 이렇게 진행되었다.

 

원래의 이슈로 되돌아가자면, 민주혁명의 선구자로 불리우는 손중산은 신해혁명이후에 "일본을 스승으로 삼다가" "러시아를 스승으로 삼는 것"으로 변화해갔다. 이런 선택은 사실 인권과 주권을 내놓는 것을 그 댓가로 하는 것이었다.

 

1912년 손중산은 원세개의 임명을 받아 전국철로총판이 된다. 그리고는 10년내에 20만킬로미터의 철로를 부설하겠다고 호언하였다. "중국전지역을 사통발달하게 만들고" 중국을 "전세계 제일강국"으로 만들겠다고 하였다. 이는 모택동이 1958년에 떠벌인 큰소리와 별로 다를 바가 없다. 다음 해, 그는 산업시찰을 명목으로, 일본을 방문한다. 목적은 자금을 차입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중일이 동맹하여 제정러시아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가 귀국하려고 할 때, 송교인암살사건이 벌어진다. 이 사건은 그로 하여금 원래의 계획을 변경할 수밖에 없도록 하고, 전력을 다하여 "제2차혁명"을 일으키게 된다.

 

제2차혁명이 실패한 후, 손중산은 다시 일본에 망명한다. 그리고 1914년 동경에서 "중화혁명당"을 결성한다. 이 당은 당원을 서로 권리가 다른 세 단계로 나누었을 뿐아니라, 무인을 찍고, 서약을 하게 하는 등 손중산에 대한 절대복종을 요구했다. 손중산은 심지어 "여유이심, 감수극형(如有二心, 甘受極刑, 만일 두 마음을 먹으면 극형을 감수하겠다)"는 말까지 입당서약에 넣었다. 이런 방식은 현대정당조직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리하여, 황흥(黃興)을 포함한 절대다수의 국민당사람들로부터 반대에 부닥친다. 이 문제에 있어서 손중산은 중국식 비밀결사조직의 영향을 받은 외에, 아마도 일본쓰레기문화에서(예를 들어, 집단관념, 등급제도, 무사도정신등등) 많은 영향을 받지 않았나 싶다.

 

이후, 손중산은 무력을 숭상하는 단계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권위있는 <<손중산전>>(상명헌 저)에서도 부득이 원세개에 반대하는 투쟁을 벌이는 중에, 그의 "소위 군사행동은 각지의 옛군대를 연락하고, 퇴역군인과 토비를 매수하고, 폭동을 조직하고, 암살을 진행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즉, 금전의 작용을 통하고, 토비를 이용하고 ,군대를 동원하여 원씨를 타도하고자 했다."고 인정했다. 주의할 만한 점은 이런 일을 하는데 돈이 많이 들었다는 점이다. 앞에서 언급한 일본측과의 암중거래가 절대 아니땐 굴뚝에서 나는 연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일본에서, 나이 50이 넘은 손중산은 또 하나의 수확을 얻는다. 그것은 바로 갓 스물이 넘은 송경령을 취한 것이다.

 

원세개의 황제꿈이 실패로 돌아간 후, 손중산은 국내로 귀국하여, 계속하여 무장투쟁과 호법운동을 일으킨다. 오래지 않아, 그는 광동에서 광동성장 진형명(陳炯明)과 연성자치문제로 갈등이 발생하여, 결국 진형명이 손중산을 광동에서 쫓아내게 된다. 이 사건에 관하여, 국공양당은 모두 진형명의 배반행위를 비난한다. 그저 호적을 대표로 하는 자유지식인들이 "진씨는 광동자치를 주장했는데, 이는 모범적인 새로운 광동을 건설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손씨는 광동을 근거지로 하여, 무력으로 중국을 통일하고자 했다."고 보았다. "이 두가지 주장은 모두 성립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손씨는 눈이 멀어졌고, 역행하는 조치를 통해서 그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했다. 그리하여...멀리는 전국의 인심을 잃고, 가까이는 광동의 인심을 잃었다. 손씨는 또한 해군에 의지하여, 대포로 광주성을 포격하겠다는 말까지 하여 광주의 인민들을 겁주었는데, 이렇게 해서는 실패를 면하기 어렵다"

 

손중산이 광동에서 쫓겨나 갈 곳이 없을 때, 이대쇠(李大釗) 는 북경에서 상해로 일부러 손중산을 찾아온다. 이틀 후, 손중산은 이대쇠, 임백거(任伯渠)와 송경령을 데리고, 소련전권대사 아부라모비치의 대표와 회담하며, 중국혁명과 극동의 정세를 논한다. 이때부터 손중산은 러시아를 스승으로 삼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걷게 된다.

 

러시아의 대리인으로서, 이대쇠는 옛날의 동창이자 나중에 오패부(吳佩孚)의 부관이 된 백견무(白堅武)를 통하여 오패부를 끌어들이려고 하나, 성공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다시 목표를 손중산으로 바꾸었던 것이다. 일찌감치 신해혁명때, 레닌은 손중산에 대하여 "그의 독특한 소녀와도 같은 천진함으로 자신의반동적인 국수주의이론을 분쇄했다"고 하고, "아주 반동적인 공상이다"라고 질책했다. 바로 이러했기 때문에, 레닌은 많은 돈을 들여서 제3인터내셔널의 중국지부를 성립시킨 것이다. 1921년 이 지부가 상해에서 성립대회를 할 때, 일찌기 모든 대표들에게 200위안의 여비를 지급했다고 한다. 모택동은 장사지구의 대표로, 이 200위안 을 받았는데, 이것은 그가 소학교교사로 2년간 받을 월급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1923년에 이르러 이 지부가 제3차 전국대표대회를 개최할 때, 진독수(陳獨秀)는 회의상에서 "당의 경비는 거의 전부 코민테른에서 받아온 것이고, 당원이 납부하는 당비는 아주 적다. 금년에 우리는 코민테른에서 받아온 비용이 1만5천인데, 그중 1천6백은 이번 대표대회에 썼다. 이 경비를 각 소조로 나누고, 동시에 중앙위원회의 업무를 위해서도 쓰며, 주간을 발행하고 연락하는데도 쓰겠다" 그는 또한 "작년에 우리는 경 200명당원인데, 올해 입당한 사람이 개략 200명이다. 그중 130명이 노동자이다. 현재 공산당원은 420명이며, 그중 국외에 있는 사람이 44명, 노동자가 164명이며, 부녀가 37명이고, 아직 10명의 동지는 감옥에 들어가 있다"고 했다. 이렇게 볼 때, 이 돈을 쓰던 사람은 많지 않았던 것같고, 1인당 사용할 수 있는 금액은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었던 것같다.

 

손중산은 러시아대표와 회담이 상당히 순조롭게 되자, 최종적으로 연아연공(聯俄聯共, 러시아와 연합하고, 공산당과 연합한다), 러시아를 스승으로 삼는다는 길을 가게 되는 것이다. 손중산이 러시아로부터 얼마나 원조를 받았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러시아는 이때문에 많은 고문을 광동으로 파견했고, 손중산이 국민당을 개조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북벌의 성공으로 국민당이 정권을 장악한 이후에, 중국은 1당독재와 끊을 수 없는 인연을 맺게 되는 것이다.

 

국가가 직면한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 서지마와 장해약(張奚若)등 자유주의지식인들은 1925년 "러시아를 친구로 삼을 것인가, 러시아를 원수로 삼을 것인가"의 토론회를 개최한다. 시인 서지마는 그가 이 토론을 열게 된 것은 중국이 러시아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 지금까지 여전히 손대지 않고 건드리지 않은 큰 혹을 가지고 있는데, 안에 있는 고름이 더 이상 그냥 놔둘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동시에 각지에서 숨어있거나 드러난 어지러운 현상은 우리가 더이상 경시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만일 이 때에, 독립적인 견해를 가진 소수인들이 다시 이성을 가지고 칼을 들어 문제의 핵심을 직접 째지 않는다면, 우리는 밥 한그릇 더먹고, 담배 한 개비 더 피우면서 시간을 넘기게 되고 후회막급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와 비교하자면, "대포"라는 별명을 지닌 정치학자 장해약은 직접적으로 말했다: 그가 소련을 미워하는 것은 바로 "제국주의국가는 우리의 자원과 재물을 빨아먹는 존재이고, 우리의 수족을 묶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우리의 양심을 매수하고, 우리의 영혼을 부식시킨다. 제국주의는 그저 우리의 관료와 군인을 가지고 놀고 있다. 소련은 우리의 청년과 학자를 가지고 놀고 있다. 유럽전쟁이후 제국주의국가는 우리의 주권을 구두선처럼 말은 하지만, 소련은 여전히 우리의 외몽고를 아무런 이유없이 점거하고 있다(그들의 중국친구들은 러시아를 위하여 오히려 변명해주고 있다). 제국주의국가는 암중으로 우리의 오패부, 장작림을 도와줄 뿐아니라, 러시아는 드러내놓고 광동에서 우리의 고급장교와 외교관의 직을 맡고 있다. 사리사욕의 본심을 가지고 포악하고 악랄한 수단을 사용하여, 아무런 자체방어능력이 없는 국가에서 거리낌없이 횡행하는 것이다. 마치 무인지경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 같다. 그런데도 이들이 우리의 원수가 아니란 말인가. 나는 오히려 묻고 싶다. 그렇다면 원수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이후 그는 또 다른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러시아의 최대의 죄악은 "그가 금전과 선전의 수단을 가지고 한편으로는 우리의 사회에 원래 희망적인 인사들이 구국의 길을 착실하게 밟는 것을 포기하고 깃발이나 들고 구호나 외치게 만들고 있으며, 실질은 없고 허망한 사업에 의존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또 한 측면으로는 우리 사회의 극악하고 출세지향적인 인사들이 공정하고 좋은 인사들을 몰아내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적게는 우리의 진정한 해방을 저해하고, 우리의 속박기간을 연장하며, 크게는 세계전쟁을 일으키기에 충분하고, 우리의 부담을 무한히 증가시킨다는 것이다." 이렇게 판단한 주요한 원인은, "러시아가 현재의 수단을 계속 취하면, 내가 확신하는데, 며칠내에 중국사회는 완전히 깡패들이 교란시키는 국면으로 가게 될 것이다(북경은 지금 거의 이렇게 되었다): 일반적인 청년들은 공산주의를 제외하고는 학문을 모르게 되고, 루블을 제외하고는 염치를 모르게 되고, 자기를 망가뜨리는 것이외에는 할 줄 아는 것이 없게 되고, 간첩이 되고 다른 사람의 손발이 되는 것, 한마디로 도구가 되는 것이외에 나는 무슨 쓸모가 있게 될지 모르겠다"

 

장해약은 이렇게도 지적했다: "외교측면에서 음모를 펼치는 이외에, 러시아는 두 가지 측면에서 우리의 내정을 교란시키고 있다. 첫째, 그는 순중산에게 "중국문제는 외환문제이고, 내정문제가 아니다. 제국주의를 쫓아내기만 하면, 만사 오케이이다"라고 하고 있다. 손중산은 평생을 똑똑하게 살았는데, 이번은 멍청했다. (혹은 멍청한 척 하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그럴듯하지만 사실이 아닌 얘기(최대한 잘 봐주어도 절반의 진실과 절반의 거짓) 를 원래 중국사회에서 아주 능력이 있는 국민당으로 하여금 "제국주의타도"나 "불평등조약철폐"등의 구호나 외치게 하고 있다. 마치 조약만 폐지되면 모든 일이 다 해결될 것처럼 말이다. 이처럼 근본을 따지지 않고 곁가지나 훑고 있고, 자신을 버리고 남에게서 원인을 찾는 것은...소련이 우리의 내정개혁을 해친 첫번째 죄악이다. 둘째는, 위에서 말한 청년과 학자는 비록 판단력이 없다고 보거나, 상식이 없다고 보더라도 너무나 가련하다. 그러나, 비교적 좋은 사람들이다. 만일 소련이 가진 중국내의 친구가 단지 이들이라면, 그래도 국면을 크게 교란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소련의 친구는 절대로 그들만이 아니다. 그들외에 더욱 무식하고 더욱 후안무치하고 더욱 안분자족할 줄 모르고, 더욱 교란시킬 자들이 있는 것이다. 소련이 중국의 내정을 지배하는 원칙은 어지럽히는 것이지, 해결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들이 흥미를 가지는 것이나 하는 짓은 모두 더욱 교란시키는 것일 뿐이다. 더 어지러울수록 더 좋고, 더 엉망으로 될수록 더 좋다...이런 일은 우연히 한번만 일어나도 아주 악영향을 미치게 마련인데, 계속 이러하다면, 어찌되겠는가? 이것이 소련이 우리의 내정개혁을 해친 두번째 죄악이다."

 

장해약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스스로 강해지고, 우리가 사람처럼 되어, 국가를 국가처럼 운영하여야, 그 제국주의식의 적들이 우리를 무너뜨리지 못할 것이다. 일본이 선례이고, 터키가 최근의 사례이다. 반대로 만일 현재대로 계속 진행한다면, 스스로 자립할 수도 없는데, 어디서 적을 타도한다는 꿈이라도 꾸겠는가. 소련은 바로 우리를 일어서지 못하게 하는 마귀이다. 그래서 나는 소련이 우리의 적인 정도가 아니라, 우리의 가장 무서운 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번 토론에 참여한 사람은 양계초, 정문강, 도맹화, 장위자등 저명한 학자들이 있었다. 아쉽게도 폭도들이 신문사를 방화하는 바람이 이 토론회는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장해약은 일찌기 동맹회에 참여했고, 손중산의 비서를 지냈다 .그의 말은 손중산이 말년에 선택을 잘못했음을 지적할 뿐아니라, 중국의 20세기 역사를 증명하고 있다. 아쉬운 것은 이러한 역사의 진상이 왜곡되는 것이 아니라, 잊혀지고 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