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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손중산)

손중산의 수도에 대한 생각

by 중은우시 2008. 6. 13.

글: 사걸붕(史杰鵬)

 

일찌기, <<독서>>라는 글을 읽었고, 청나라말기의 한 유명인사의 말이 인용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거기서는 신해혁명의 해악에 대하여 논하고 있었다. 혁명이전에는 전중국인이 그래도 응집력이 있었고, 청나라정부가 변법만 성공하고, 군주입헌을 이루게 되면, 유럽이나 미국에는 비길 수 없을지 몰라도, 러시아, 일본은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혁명이후에 군벌이 할거하고, 민중들은 뭉치지를 못하고, 쟁반위의 모래처럼 되었다. 그리하여 중국은 더 이상 구할 방법이 없었다.

 

이 주장은 나를 깜짝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아, 원래 신해혁명이라고 하여 모든 사람들이 잘했다고 하는 것은 아니구나. 중학교 역사책에서 배운 것들이 모두다 진리는 아닐 수도 있고, 생각해볼 여지가 있는 것이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중에, 다시 유사한 몇몇 글들을 보았다. 거기에서는 신해혁명이 문제있다고 하는 것만이 아니라, 손중산 본인까지도 난신적자로 욕을 먹고 있었다. 거기서는 손중산이 일본의 지지를 얻기 위하여, 일본과 밀약을 체결해서, 동북삼성을 포기하고자 했고, 그에 대한 증거는 충분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역사를 살펴보는 것은 항상 모순되는 일이다. 예를 들어, 장태염(章太炎)은 처음에 군주입헌에 찬동하고, 이를 위하여 <<객제(客帝)>>라는 글까지 쓴다. 거기서 사람들에게 청나라의 정치를 용인하고, 광서제를 '성명지주(聖明之主)'라고 하였다. 그러나, 몇년이 지나지 않아서, 바로 안면을 바꾼다. 광서를 쌀보리도 구분못하는 멍청이라고 하였다. 원인은 만주족정권이 한족에 대하여 의심하고 방비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만일 먼저 민족혁명을 이루지 못하면, 민중들의 마음이 이반될 것이고, 인청정치는 절대로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신해혁명의 발발은 필연적이었고, 피할 수 없는 길이었다. 그런데, 손중산이 정말 매국했을까? 다시 <<구서(訄書)>>를 뒤적이고, <<상택(相宅)>>을 읽어보았다. 정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독서는 정말 사방팔방으로 읽어야 한다. 이처럼 재미있는 내용을 왜 이전에는 주의하지 않았을까? 원래 손중산 이 자는 신해혁명으로부터 10여년가량 떨어져 있던 시점에, 장태염과 건국이상을 대담하게 논하고 있었다. 그리고 수도를 두는 문제에 대하여도 이미 심사숙고해두었었다.

 

수도의 선택은 중대한 일이고, 중국의 전통이다. 수도를 정할 때는 항상 지세가 편리한지 여부를 보아야 한다. 서한이 장안을 수도로 한 것은 관중(關中)이 천하의 고양(膏壤, 기름진 땅)이고, 지세가 험준해서, 동방의 여러 지방을 제압할 수 있었다. 마치 다른 사람의 등뼈를 누르는 것과 같은 위치여서, 승산이 높고 패배의 가능성은 낮았다. 동한의 낙양은 약간 떨어진다. 그것은 장안이 서한말의 병란으로 불타서 심하게 부서졌기 때문에 정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물며 낙양은 장안보다 못하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산수가 뛰어나고 험준하여 의지할 만했다. 게다가 역대의 수도였다. 동진의 남경은 석두성이라고 하는데, 호거용반(虎踞龍盤, 호랑이가 웅크리고 용이 똬리를 틀고 있는 지형)으로 장강을 사이에 두고 북방의 공격을 막을 수 있었다. 역시 풍수길지이다. 북송의 변량은 좀 못했다. 그리하여 한꺼번에 금나라병사에 무너지게 된다. 명성조는 북경으로 천도했는데, 이것은 몽고를 대항하기 위하여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러나, 손중산과 장태염은 좀 괴이했다. 그들이 먼저 얘기한 것은 무창(武昌)이었다. 이유는 관중, 낙양등지는 자연환경이 이미 고대만 못하고, 무창은 장강을 끼고 있어, 동으로는 강소절강을 통제할 수 있고, 서로는 양양 번성을 바라볼 수 있으며, 황하 낙양지방으로 연결된다. 철로교통에 의지하여, 북으로 장성에 이르고 남으로 광동광서에 이른다. 이는 석두성인 남경이 따르지 못할 장점이었다. 그들은 홍수전이 남경을 수도로 삼은 것은 구석진 곳에서 편안함을 구하는 것으로 먼 곳을 제압할 수 없다고 보았고, 실책이라고 보았다. 이를 태평천국멸망의 한 원인으로 파악했던 것이다.

 

손중산과 비교하자면 장태염은 선비였다. 그래서 비교적 보수적이었다. 그러나, 손중산은 이같은 참새무리가 아니었다. 그는 무창이 비록 이처럼 편리하기는 하나, 그의 생각으로는 무창을 수도로 삼으면 중원을 다스리는데는 충분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신강, 몽고를 통제하려고 마음먹는다면 부족했다. 그래서 그는 수도를 고르려면 먼저 관중(關中, 지금의 섬서성. 서안이 중심도시임)을 살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장태염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때의 관중은 부유한 정도가 비록 진나라 한나라에 비교할 바가 못되고, 겨우 남방의 여러 성들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지리형세에 있어서는 남방보다 뛰어나다고 보았다. 하물며 철도교통이 발전하면, 수송은 그다지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다만, 이곳에서 그는 다시 한번 사고의 전환을 한다. 만일 관중을 수도로 삼는다면, 몽고, 신강을 통제하는데는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아시아의 맹주가 되고자 한다면, 그래도 지역이 좁다. 만일 전체 아시아를 통제하려고 한다면, 이리(伊犁, 신강 위구르자치구의 도시)로 천도하는 수밖에 없다. 그는 예를 들어 이렇게 설명했다. 서한이래로 역대왕조는 여러번 서역을 정복했지만, 수도가 여전히 멀리 관중에 있는 바람에, 오랫동안 장악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서역은 얻었다가 잃기를 반복했다. 이는 거울로 삼아야 한다.

 

이 말을 들은 장태염은 놀란 눈을 하고는 말을 잊었다. 이전까지는 손중산에게 감탄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번은 달랐다. 그는 비로소 자신과 손중산과의 정치적인 차이를 느꼈다. 스스로는 어쩔 수 없는 문인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박수를 치며 좋다고 외치고, 마음 속으로 손중산을 '신성'으로 받들었다.

 

우리가 지금 본다면 손중산의 이 말은 그저 농담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다만, 한가지는 분명하다. 만일 중국이 정말 부강한 국력을 가지게 된다면, 독패천하를 실시할 생각을 회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일본보다 별로 낫지도 않을 것이다. 중국의 문화전통에 따르면, 아마도 방법상에서 일본처럼 잔혹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군림천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살륙이외의 수단은 여러가지가 있다. 밥먹는 것과 사랑하는 것과 같은 기본적인 욕구이외에 명예감도 모든 사람 모든 민족이 가진 것이다. 누구든지 다른 사람이 자기의 문명을 받아들이기 바란다. 서방도 예외는 아니다. 멀리는 십자군동정에서, 가까이는 맥도날드와 헐리우드영화에서 이를 볼 수 있다. 그들은 세계가 그들을 맹주로 떠받들어주기를 바란다. 손중산의 이상은 비록 가소롭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가 사리사욕을 위해서 매국행위를 했다고 한다면 아무래도 편면적으로 파악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그에게는 더욱 깊고 넓은 원인이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