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손중산)

손중산의 혁명을 도운 일본인들

by 중은우시 2008. 10. 18.

작자: 미상

 

중국근대사상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은 직접적으로 중국인의 혁명사조를 촉발시켰다. 다만 일부 일본인들은 중국의 근대혁명을 지원했다. 완전하지않은 통계에 따르면, 신해혁명전에 300여명의 일본인이 손중산을 따라 혁명활동에 종사했다. 그들은 자금을 지원했을 뿐아니라, 심지어 생명을 바치기까지 했다.

 

히라야마 슈(平山周): 손중산에게 "나카야마 사노코(中山樵)"라는 이름을 붙여줌.

 

중국민주혁명의 선구자로서 손중산(본명은 孫文, 쑨원)은 혁명에 종사하는 과정에서 많은 가명을 사용한다. 그중 많은 것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오로지 "손중산"은 오히려 본명보다 더 유명해져서 가명이 본명을 대체해버렸다는 것은 많이 알고 있는 사실이다. 더욱 재미있는 일은 이 이름을 지은 것은 손중산 본인이 아니라, 히라야마 슈라는 일본인이었다는 것이다.

 

히라야먀 슈는 1870년 일본 후쿠오카(福岡)에서 출생했다. 19세기말 일본비밀결사에 참가하고, 일본의 유명한 정치가인 이누카이 쓰요시(犬養毅)의 문하에 들어간다. 당시 일본정부는 청나라정부가 계속 버티지 못할까봐 우려하고 있었다. 미연에 준비하는 차원에서 사전에 중국의 혁명역량을 조사하기로 결정한다. 이누카이 쓰요시는 자기문하의 미야사키 도텐(宮崎滔天), 히라야마 슈, 가아장협(可兒長鋏)의 세 사람을 이 일에 종사하게 한다. 히라야마 슈등은 일본 외무성에서 받은 돈으로 처음에는 어떻게 써야할 지를 몰랐다. 할 수 없이 귀국보고를 하러온 영국런던주재무관 우쓰노미야 다로(宇都宮太郞)에게 도움을 구한다. 우쓰노미야는 그들에게 중국혁명을 이해하려면 쑨원을 찾으면 확실히 알 수 있다고 말해준다.

 

런던사건이후 쑨원의 국제적인 명성은 높아진다. 다만 히라야먀 슈등 3명은 쑨원에 대하여 전혀 들어본 ㅈ거이 없었다. 중국으로 가는 선박 위에서, 히라야마 슈는 신문에서 "손일선(孫逸仙, 쑨얏센)"이라는 이름을 본다. 그리고 이 사람이 아마도 쑨원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중국에 도착한 후, 히라야마 슈는 <<런던몽난기>>라는 책을 사서 쑨원의 간단한 이력을 알아낸다.

 

이후, 히라야마 슈는 쑨원의 행적을 찾는다. 그는 먼저 마카오에 가서 야마모토(山本)라는 일본인을 찾고, 야마모토의 소개하에, 히라야마는 홍콩과 화남등지에서 일부 유신당 사람들을 알게 된다. 이때, 미야사키 도텐은 중국의 재일혁명당사람들과 교류를 시작하는데, 그는 귀국한 히라야마에게 요코하마의 진소백(陳少伯)을 찾으면 쑨원의 소식을 들을 수 있다고 말해준다. 그래서 두 사람은 요코하마로 진소백을 만나러 간다. 그러나 찾아갔을 때 낯선 사람이 그들에게 진소백은 이미 대만으로 돌아갔다고 말해준다. 이 사람과 얘기하다가 그들은 혹시 쑨원의 소식을 아는지 물어본다. 생각도 못하게 그 사람은 웃으면서, "내가 바로 쑨원이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세 사람은 모두 웃기 시작한다.

 

히라야마 슈는 쑨원을 이누가이 쓰요시에게 소개한 후, 쑨원을 데리고 여관을 찾는다. "대학관(對鶴館)"이라는 여관이었다. 히라야마는 쑨원을 대신하여 숙박등기를 한다. 당시 쑨원은 망명중이어서, 신분을 공개하기가 곤란했다. 등기부에 뭐라고 적을 것인가? 히라야마는 돌연 금방 지나온 "나카야마(中山)" 후작의 집을 떠올리고, 등기부에 "중산(中山)"이라고 두 글자를 적는다. 중산은 일본에서는 그저 성에 불과한데...이름은 뭐라고 할 것인가? 히라야마가 주저하고 있자, 쑨원이 등기부를 받아들고는 "중산"의 아래에 "초(樵)"를 덧붙였다. 웃으면서 자신은 '중국에 있는 산의 나뭇군'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하여 쑨원은 "중산초"라는 이름을 일본에서 혁명활동에 종사할 때 쓰게 된다. 일본에서 혁명당인들은 그를 "중산선생"이라고 부른다. 어떤 때에는 앞에 성을 덧붙여서 "손중산"이라고 불렀다. 이리하여 "손중산"은 쑨원의 또 다른 이름이 되어 버린다. "손중산"이라는 이름이 널리 알려질 줄은 아마 히라야마 슈가 전혀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이후, 히라야마 슈는 손중산의 가까운 친구가 되어, 오랫동안 중국의 혁명사업을 지원한다. 1905년, 그는 중국동맹회에 가입하고, 중국혁명에 공헌한다. 1931년, 그는 중국국민정부 해육공군총사령부에 고문으로 초빙된다.

 

야마다 요시마키(山田良政): 중국공화를 위하여 헌신

 

손중산이 이끄는 반청의거에 일본우인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그중 야마다 요시마키는 처음으로 희생된 일본인이다. 손중산은 그를 "외국의사로 중국공화희생자중 제일인"이라고 불렀다.

 

야마다 요시마키는 1868년 일본의 한 사무라이 가정에서 태어나고, 일찌기 군에 들어갔었다. 퇴역후 대만에서 어느 정도 일하다가 나중에 동아동문회에서 문화교류와 정보수집에 종사했다. 이 기간동안 야마다의 사상은 갈수록 급진적으로 된다. 중국은 폭력혁명을 일으켜 청나라황조를 뒤엎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는 미아사키 도텐과 관계가 밀접했고, 미야사키 도텐을 통하여 손중산을 알게 된다.

 

1900년, 손중산은 광동 혜주에서 의거를 일으키기로 결정한다. 정사량(鄭士良)을 주장으로 하고, 일본인 니치난(日南)이 민정총재가 되고, 남만리(南萬里, 즉 히라야마 슈)가 조수가 된다. 당시 미야사키 도텐등은 일본동지의 역량이 너무 적다고 보고, 야마다 요시마키를 포함한 동문서원의 스승과 제자를 참가시킨다. 미야사키는 야마다등이 모두 상쾌한 사내대장부이므로 한번 부르면 그들은 반드시 동행할 것이라고 보았다.

 

10월 8일, 정사량은 600여명을 이끌고 혜주 삼주전에서 의거를 일으킨다. 청나라군대의 포위공격하에 의거군은 금방 탄약부족으로 곤경에 처한다. 정사량은 손중산에 도움을 요청하고, 손중산은 대만총독부에 도움을 요청한다. 그리하여, 의거군은 혜주에서 하문방향으로 포위돌파를 시도한다. 야마다의 직책은 바로 혜주의거부대의 북상에 호응하는 것이었다.

 

바로 야마다가 급히 준비하고 있을 때, 일본정계는 중대한 변화가 일어난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새로 올라온다. 이토가 취임하자, 대만총독부로 하여금 손중산에게 총 한 자루, 총알 하나도 주지 못하게 한다. 10월 20일, 야마다는 혜주의거군의 영지에 도착한다. 22일 군을 따라 포위돌파를 하는 과정에서 길을 잃어 청나라군에 붙잡혀 살해당한다. 나이 겨우 32세였다.

 

야마다의 전사는 손중산을 비통에 빠지게 한다. 혁명이 성공한 후, 손중산은 야마다를 공화를 위해 희생된 첫번째 외국의사라고 평가하는 외에 민국8년 특별히 기념비문을 쓴다. 야마다의 "인도적인 희생은 아시아의 선각이고 몸은 비록 죽었지만 그 뜻은 불후할 것이다"라고 한다.

 

미아사키 도텐(宮崎滔天): 손중산과 황흥의 합작을 촉진

 

미야사키 도텐은 1871년에 일본 규슈의 구마모토(熊本)현의 한 하급 사무라이가정에서 태어난다. 1897년 9월, 미야사키는 히라야마 슈와 함께 요코하마의 진소백집에서 손중산을 만난다. 처음에 미야사키는 손중산에 대하여 의심을 품는다. 나중에 <<삼삽삼년의 꿈>>에서 미야사키는 자기의 우려를 말했다: "이 자가 과연 중국 400주군에 입지를 마련하는 책임을 한 몸에 진 자인가? 능히 4억 창생에 군림하고 호령할 기수인가? 보좌해서 나의 평생의 뜻을 이룰 수있을 것인가?"

 

대화를 통해서, 미야사키는 손중산으 기질과 이상에 완전히 설복당한다. 그는 감탄하여 말한다: "그냥 보기에는 외모와 기질이 세상을 잘 모르는 어린청년같았고, 천진무사한 농촌아가씨 같았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아주 깊고 심오하고, 그의 견식은 아주 발군이며, 그의 포부는 아주원대했고, 그의 정감은 아주 진지했다"

 

미야사키는 손중산을 이누가이 쓰요시등 일본 정경계의 요인에게 소개시켜 주었을 뿐아니라, 손중산을 널리 선전하고, 그가 쓴 <<런던몽난기>>를 일본어로 번역하여, 제목을 <<청국혁명영수손일선유수록>>이라고 지어 <<규슈일보>>에 연재한다.

 

1905년 미야사키는 손중산을 데리고 황흥을 찾아간다. 두 사람은 첫만남에 옛친구를 만난 듯했다. 그리고 풍락원찬관에서 같이 식사를 한다. 20여일후에, 손, 황을 핵심으로 하는 중국동맹회가 성립된다. 미야사키는 파격적으로 회원으로 받아들여진다.

 

장기간 중국혁명을 지원하는 생애에서, 미야사키는 손중산, 황흥과 깊은 우의를 맺는다. 황흥이 귀국하여 혁명을 할 때, 일찌기 자기의 아들인 황일구(黃一歐)를 미야사키에게 돌봐달라고 부탁한다. 황흥이 채무위기를 맞아, 고리대로 사방으로 숨어다닐 때, 미야사키는 그를 위하여 적극적으로 자금을 조달해준다. 1911년 무창의거가 발발하고, 황흥이 한양을 잃고 상해로 도망치다가 진강에 도착했을 때, 마침 일본에서 혁명에 참가하기 위하여 오던 미야사키와 만난다. 황흥은 만감이 교차하여 칠율시 한수를 건넨다. 나중에 황흥이 죽자, 미야사키는 일본에서 호남까지 일부러 와서 상을 치른다. 미야사키의 행위는 두 호남성립제일사범학교의 학생을 감동시키고, 그들은 미야사키에게 서신을 보내어, 그의 우의는 일월보가 귀하고, 정신은 귀신을 감동시킬 정도이다라고 말한다. 이 두 학생중 한 명이 바로 모택동이다.

 

미야사키와 손중산의 교분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미야사키는 간단하게 손중산을 숭배한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은 상대방을 친구로 생각했다. 신해혁명때, 미야사키는 결연코 손중산, 황등이 원세개와 합작하는데 반대한다. 강력하게 손중산에게 북벌을 권한다. 나중에 유명한 손황의 상호공격사건에서, 미야사키는 손중산과 황흥이 수십년간 협력하다가 서로 사이가 벌어진 것은 무슨 사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주의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런 친구에게 손중산은 "추심치복(推心置腹)"이라는 네 글자를 써준다. 황흥은 "유협자류(儒俠者流)"라고 써서 미야사키를 칭찬했다. 이 두 폭의 글은 지금도 여전히 미야사키 도텐의 옛집에 걸려 있어, 미야사키와 손, 황 두 사람의 우의를 방증한다.

 

1922년 12월 6일, 51세의 미야사키 도텐은 병으로 사망한다. 이 소식을 들은 후 손중산은 "중국인민은 좋은 친구를 잃었다"고 애통하게 말했다.

 

우메야 쇼키치(梅屋庄吉): 손중산과 손경령의 혼례를 거행

 

손중산의 혁명생애에서 한 생사지교가 있었다. 그는 전력으로 중국혁명을 지원했을 뿐아니라, 손중산과 결의형제를 맺었다. 그가 바로 우메야 쇼키치이다.

 

우메야는 1868년 일본 나카사키(長岐)에서 태어났고, 15세때 부모를 속이고, 혼자서 중국으로 도망친다. 그리고는 큰 일을 하고자 한다. 19세때, 우메야는 미국으로 가서 촬영을 배우고, 나중에 홍콩에 사진관을 연다. 홍콩에서 우메야는 손중산의 스승인 강덕려(康德黎)를 알게 된다. 1895년, 손중산이 호놀루루에서 홍콩으로 되돌아와서 반청의거를 기획한다. 그러나 경비와 무기가 없었다. 이 상황을 들은 후, 강덕려는 한 연회에서 손중산에게 우메야를 소개해준다. 손중산의 우국충정은 우메야를 감동시킨다. 우메야는 손중산에게 말한다: "너는 혁명을 해라. 나는 최대한 자금을 모아서 너를 도와주겠다"

 

1905년, 우메야는 자기의 집을 가지고 자금을 마련해서 중국동맹회를 만든다. 나중에 동맹회의 기관보인 <<민보>>의 창간과 초기운영경비는 모두 우메야가 부담했다. 1911년, 무창의거가 발발하자, 우메야는 자기의 빚이 이미 엄청나다는 것도 생각지 않고, 황급히 가산을 정리해서 28만의 돈을 만들어, 그중 17만을 무창의거군에게 보내고, 나머지 11만을 다른 혁명활동에 보탠다. 이와 동시에, 우메야는 촬영기사로 하여금 신해혁명의 장면을 촬영하게 하여, 의거의 일부 진귀한 역사화면을 남길 수 있었다.

 

1913년, 손중산과 송경령이 서로 사랑한다. 그러나 둘의 나이차이가 컸고, 배분이 달랐다. 손중산의 동료들은 모두 결혼에 찬성하지 않았다. 우메야는 두 사람이 진지하게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손중산의 편이 되어 주었을 뿐아니라, 그들의 혼례를 준비해준다.

 

1915년 10월 24일, 손중산, 송경령의 혼례가 우메야의 집에서 거행된다. 결혼 다음 날, 손중산과 우메야는 결의형제를 맺는다. 송경령과 우메야부인도 결의자매가 된다.

 

나중에 손중산이 귀국하여 정부를 조직할 때도 우메야와의 서신왕래는 멈추지 않았다. 1924년, 손중산이 임종에 가까웠을 때, 우메야를 잊지 못했다. 그는 찾아온 일본친구에게: "연파정(烟波亭, 우메야의 호)의 근황이 어떤가? 전에 고베에서 만나보지 못했는데, 아주 유감이다" 1925년 3월 12일, 손중산이 서거한다. 다음 날, 우메야는 손중산의 아들 손과의 전보를 받는다. 이 소식에 우메야는 아주 비통해 한다.

 

1934년 11월 23일, 우메야는 암으로 병사하니 향년 67세이다. 장례에서, 중국정부는 특별히 청천백일기와 일장기를 보낸다. 이로써 우메야의 중국혁명에 대한 공헌을 기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