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문혁전)

대약진시대에 벌어진 황당한 일들

중은우시 2007. 7. 13. 18:33

중공중앙정치국은 1958년 8월, 북대하에서 확대회의를 개최했다. 회의후에 중국은 "전민연강(全民煉鋼, 모든 사람이 강철을 제련함)"과 농촌인민공사화운동을 시작했다. 이번 대약진운동에서 각종 기이한 일들이 발생했는데, 예를 들면 인민공사식당에서 원숭이머리요리, 제비집요리를 먹는가하면, 강철을 제련하는데 한약을 집어넣는 일도 나타났다.

 

인민공사식당에서 원숭이머리, 제비집, 해산물먹기

 

<<염황춘추>> 2006년 제8기에 이개원이 쓴 글을 보면, 대약진기간중에 중국공산당의 많은 관리들은 기층에 가서 선전하고, 공산주의 인민공사의 아름다운 미래를 묘사했다. 당시 국무원의 한 부총리는 하남성 수평현(遂平縣)에서 아주 구체적으로 연설했다. 그는 인민공사의 좋은 점을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첫째, 좋은 먹을 거리는 배만 채우는 것이 아닙니다. 매끼 돼지고기, 닭, 물고기, 계란이 있을 것이며 더욱 멋진 음식 예를 들면 원숭이머리, 제비집, 해산물등도 필요한만큼 공급합니다.

 

둘째, 옷을 입는 것도, 모두 원하는대로 만족시켜 드립니다. 각종 색깔과 모양의 옷이 있고, 하나같이 검은핵이나 푸른색이 아닙니다. 장래, 보통옷은 그냥 업무복으로 사용하고, 퇴근하면, 사람들은 가죽옷, 나일론, 양모옷으로 갈아입을 것입니다. 인민공사는 모두 여우를 키워서 여우가죽옷을 만들어입을 것입니다.

 

셋째, 집은 현대도시의 기준에 맞춥니다. 현대화가 무엇입니까. 인민공사입니다. 집의 북쪽에는 난방설비를 하고, 남쪽에는 냉방설비를 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높은 건물에 사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안에는 전등, 전화, 상수도, 무선전화와 텔레비전이 있을 것입니다.

 

넷째, 달리기선수를 제외하고는 여행객이나 행인들이 모두 교통수단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항공노선도 각방향으로 다 다닐 것이고, 모든 성에는 비행장을 만들고, 모든 지방에 비행기공장이 세워질 날도 머지 않았습니다.

 

다섯재, 모든 사람은 고등교육을 받을 것입니다. 교육은 이미 보급되었습니다"

 

당시 중앙정치국 후보위원이던 강생(康生)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공산주의는 천당. 인민공사는 교량." 먼저 인민공사라는 교량을 설치한 후 다리를 넘어가면 바로 천당이라는 것이었다.

 

하북성 서수현은 인민공사식당을 건설하자는 기치를 내걸고 먼저 "밥먹는 것은 무상"이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전체 현에 6.4만여호, 32만명, 248개 농업합작사가 있었다. 대약진기간중에 전체 현에 모두 1777개 공공식당을 만들어, 28.5만명이 식당에서 밥을 먹어, 전현 식당화를 실현했다. 서로 다른 업무, 임무의 필요에 부응하기 위하여, 이외에 야외전투군인식당 1410개, 유아식당 119개, 노년식당 248개도 설치했다. 가가호호 모두 쌓아두었던 양식을 무상으로 식당에 헌납했다. 나중에 인민공사라는 이 교량은 900평방킬로미터의 중국대지의 곳곳에 솟아올랐다. 공공식당도 전국각지에 생겨났다. 그러나, 좋은 시절을 오래 가지 못했다. 인민들이 다리를 건너가고나서 보게 된 것은 꿈에 그리던 천당과는 완전히 상반된 광경이었다. 원숭이머리, 제비집요리, 해산물은 고사하고, 멀건 죽마저도 먹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교수평가는 생산량이 얼마인지로 한다.

 

"대약진"은 전방위적으로 진행되었다. 교육도 예외는 아니었다. 1958년 3월 성도회의(成都會議)에서 가경시(柯慶施)는 15년만에 모든 백성을 대학생으로 만드는 계획을 발표했다. 같은 해 9월, 유소기는 하남에서 이렇게 말했다: "새로운 방법으로 공장을 운영하고, 교육을 한다. 새로운 공장은 학교를 둘 수 있다. 중학생을 모집해서 여기서 공부한다. 한 공장이 바로 하나의 대학이다. 하루에 몇시간은 공부하고, 몇시간은 파트타임으로 일한다. 공장이 바로 학교이고, 학교가 바로 공장이다. 나중에 졸업하면 대학을 졸업한 것이면서, 기술엔지니어가 되는 것이다. 이것도 공산주의로 가는 하나의 조건이다"

 

하남의 방성현 성관진에는 모두 1.1만명이 있었는데, 몇개월내에 종합 홍전대학, 위생, 희극, 으막, 무도, 사범등 9개의 전문학교가 설립되었다. 각종 공농대학, 홍전대학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1958년 7월 에서 10월까지 대약진기간동안 강생은 중공중앙문교소소 부조장의 신분으로 북경과 하남성의 일부학교를 시찰하고, "교육혁명"의 진행상황을 파악했다. 북경사범대학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범대학은 두 가지 임무가 있습니다. 하나는 학교를 하는 것이고, 하나는 공장을 하는 것입니다. 모든 반은 공장을 하나씩 운영합니다. 학교는 소학교, 중학교에서 대학교까지 합니다." 1958년에는 적어도 100개의 이런 일하고 공부하는 학교를 만들려고 하였는데, 설립할 상황이 되는지 안되는지에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그는 농업생산에서도 "사람이 얼마나 대담하게 하는지에 따라 땅은 그만큼 생산해준다"고 했었는데, 설마 교육도 "사람이 얼마나 대담하게 하는지에 따라, 학교도 얼마든지 설치할 수 있다"는 것인가.

 

교수를 평가하는데 있어서, 강생은 "대약진"중에 아주 뛰어난 견해를 밝힌 바 있다. 그는 북경농업대학을 시찰할 때, 명확하게 지시했다: "학교는 최소한 5개의 간판을 내걸어야 한다. 학교, 공장, 농장, 연구소, 농업국. 만일 10여개의 간판을 내걸 수 있으면 더 좋다. 교수는 심는 작물의 생산량에 따라 급을 평가한다. 무당 1천근을 생산하면 5급교수이다. 2천근이면 4급교수이고, 3천근이면 3급교수, 4천근이면 2급교수이며, 5천근이면 1급교수이다" 

 

양식이 너무 많아서 하루에 다섯 끼를 먹는다.

 

1958년 8월 4일, 모택동은 하북성 서수현 제8폭하농업사를 시찰했다. 촌의 담장에는 선명하게 벽화를 그렸다. 젊은이가 하늘을 뚫고 올라간 옥수수대를 붙잡고 하늘로 오르는 모습과 나이든 이가 배만큼 큰 땅콩껍질을 타고 바다로 나가서 세계를 돌아보는 모습과 상아가 달에서 내려와 농촌에서 면화를 따는 모습등등이었다. 현위원회 서기는 이렇게 보고했다: "금년 전현의 평균 무당 생산량은 2천근에 달했습니다. 총생산량은 12억근입니다." 이외에 또 허풍을 떨어," 산약은 무당 120만근, 1개의 배추가 520근, 보리는 무당 12만근, 면화는 무당 5천근을 생산합니다"라고 하였다.

 

모택동은 이렇게 물었다: "그렇게 많은 양식을 거두는가? 너희는 전체 현이 31만명인데, 어떻게 그렇게 많은 양식을 다 먹을 수가 있는가? 너희는 양식이 너무 많으면 어떻게 하느냐?" "양식이 많으면 기계로 바꿉니다" 다시 물었다. "기계로 바꿔도 다 안되면 어떻게 하는가. 너희가 양식이 남아돌더라도 다른 사람이 기계와 바꾸지 않으려고 하면 어떻게 하는가?" "그러면 우리는 산약으로 주정(酒精)을 만듭니다" "모든 현마다 주정을 만들면 그렇게 많은 주정을 어디에 쓰려고.." "우리는 그저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양식을 얻을지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먹어치울지는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실 양식이 많으면 좋지 않습니까. 많아서 국가가 필요없다고 하고, 아무도 필요없다고 하면, 인민공사 사원들끼리 많이 먹으면 됩니다. 하루에 다섯 끼도 먹을 수 있습니다"

 

모택동은 다시 말했다: "너희는 그렇게 많은 음식을 다 먹지 못하면 어떡할 것이냐. 양식이 많으면, 앞으로는 조금만 심어라. 하루에 반나절만 일하고, 반나절은 문화활동을 해라. 과학도 배우고, 문화오락도 즐기고, 대학, 중학도 개설해라. 괜찮겠느냐."

 

생산사(生産社)를 어떻게 이름을 바꿀 것인지를 물었을 때, 사장(社長)은 "농장(農莊)"으로 하려고 한다고 했다. 소련이 이미 집체농장을 하고 있었고, 이 이름을 쓰고 있었다. 그래서 모택동은 "그냥 인민공사라고 부르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이후 "인민공사"는 전국에서 꽃을 피웠다.

 

강철제련에 한약을 가미하다.

 

"전인민이 강철을 제련하라"는 것은 대약진의 핵심이었다. 1958년 1월 하순, 북경에서 개최된 최고국무회의에서 이렇게 제안했다: "15년후에 4천만톤의 강철, 5억톤의 석탄, 4천만킬로와트의 전기를 만들겠다"

 

이때부터 보수사상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6월 21일에는 야금부가 대약진의 사상지도하에 중앙에 보고했다. 1959년의 강철생산량은 3천만톤을 초과할 수 있고, 1962년에는 8,9천만톤에 이를 수 있다고. 이 보고서는 전국에 돌렸다. 8월 17일에서 30일까지, 중공중앙은 북대하에서 거행된 정치국확대회의에서 <<중공중앙정치국확대회의의 전당전민이 1070만톤강철 생산을 위하여 분투할 것을 호소함>>이라는 문건을 채택했다. 전인민의 강철제련은 불꽃처럼 전국으로 번져갔다. 심지어 중남해의 안에도 작은 고로를 설치했다. 농촌, 도시할 것없이 모든 곳에서 작은 고로를 설치했다.

 

국가기관의 마당, 공장, 학교, 거리에는 모두 강철제련의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북경, 상해등 11개도시의 18개 대학은 매년 69.2만톤의 강철을 제련할 수 있었는데, 이는 1949년 전국강철생산량의 4.38배였다. 제남시의 중학은 1주일내에 77개의 소형고로를 만들었다. 하얼빈시의 19중학은 10명의 대원이 5일만에 강철제련기술을 익혔고, 하루만에 작은 공장을 짓고, 다시 하룻반나절만에 강철제련설비를 설치했으며, 전교의 지원하에, 3일만에 3000여근의 폐철을 만들어냈다, 이리하여 "소년위성연철공장"이 생긴 것이다. 7월중순, 첫번째 쇳물이 녹아져 나왔다. 이 작은 공장의 연간생산품은 1800대의 트랙터 부품으로 사용되었다. 어린아이들이 10여일만에 야금엔지니어가 되다니, 어찌 기적이 아닌가.

 

누구도 강철을 제련할 수 있었다. 어느 시의 중산로에는 10여명의 가정주부가 맨손으로 일어나서 기술도 모르고, 재료도 없는데 그날로 소형고로를 만들었고, 그날로 강철을 만들어냈다. 의과대학 총의원의 의사, 간호사는 환자는 돌보지 않고, 병원내에서 고로를 만들고 있었고, 철강을 만들어냈다. 제2피혜공장(가죽신공장)은 구식 제련법을 더욱 단순화해서, 감와토평로를 만들었다. 바로 땅에 웅덩이를 파서, 보통벽돌과 내화별돌로 쌓아서 만든 것이다. 1번에 8개 감와를 넣을 수 있고, 고로안에 코커스를 연료로 쓰지 않아도 되었다. 사용하는 것은 보통 장작과 보통의 석탄이었다. 아래에서는 송풍기를 이용해서 2시간반만에 1백여근의 강철을 만들어냈다.

 

더욱 기묘한 것은, 한 수공업회사의 판사처가 대담하게 한약을 사용하여 강철을 제련한 것이다. 소형 흙고로안에 중약인 괴각(槐角), 계위(鷄胃) 및 귀갑(龜甲)등을 넣었는데, 이 한약들이 탈황작용을 하고 탄소를 조절하는 작용을 한다는 것이었다. 한약으로 철강을 만드는 실험은 성공했다고 한다. 보기에 중약에서 치질을 치료하는 괴각과 소화불량을 치료하는 계위가 강철을 제련하는 기능까지 있었다니, 아마도 노벨상을 탈만한 발견이 아닐 수 없다.

 

이런 각종 황당한 일들이 대약진 시기에 일어났다. 이성적으로 보면, 이것들은 모두 말도 안되는 일이었지만, 당시에는 이런 거짓말이 횡행했다. 아마도 거짓말도 백번을 중복하면 진리로 바뀌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