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원강(李遠江)
1983년, 전국적으로 대규모의 명예회복작업이 완료될 때쯤, 출신문제로 곤혹을 겪었던 만린(滿琳)은 비로소 오랫동안 갈망했던 보통 백성의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때의 그녀는 막 공군지휘학원에 전입되어 이 학교의 첫번째 여교관이 되었고, 남편은 공군총의원의 뼈전문 의사였다. 세 딸은 모두 건강하고 활발하였으며, 일가 식구는 행복하고 평범한 생활을 보냈다.
바로 이때, 사회과학원의 한 역사학자가 그녀를 찾아왔다. 그는 토르구트의 마지막 칸(汗王)의 가족사를 알고 싶어했다. 그가 바로 나중에 변강사학자로 이름이 유명하게 되는 마다정(馬大正)이었다. 1970년대말부터, 토르구트의 역사를 연구하기 위하여, 마다정은 이미 신강의 토르구트인 취락지역을 다 돌아다녔고, 이미 국내에서 토르구트역사의 가장 권위있는 전문가였다.
시간이 오래되었으므로, 마다정은 처음에 만린을 만났던 광경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게 되었다. 다만,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은 바로 이 토르구트부족의 마지막 공주는 마치 자기의 가족이야기를 그다지 하고 싶어하지 않는 듯하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뭔가를 회피하는 듯했다" 마다정은 그리하여 마음 속에 의문을 품게 된다.
마다정이 생각하지 못했던 것은, 바로 이 토르구트의 마지막 공주의 신분이 만린으로 하여금 어려서부터 곤혹을 겪게 하고, 이런 귀족출신이라는 것이 만린 일가에게는 재난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게 되어버렸던 것이다. 그리하여 과거 수십년동안 만린의 유일한 희망은 바로 이 신분을 벗어나는 것이었다.
벗어날 수 없는 신분의 굴레
사실상, 오이라트(Oirats) 몽골(서부몽골)의 유일한 칸왕 공주였지만, 만린에게 즐거웠던 기억은 많지 않다. 1950년, 만린이 아직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 모친은 "역사문제"로 체포되어 수감되었다. 비록 모친이 얼마전까지는 신강의 '평화해방'의 거대한 공헌을 세운 사람이었지만.
부친이 일년내내 병환을 앓고 있어서, 모친의 수감은 일가족의 생활을 아주 곤란하게 만들었다. 이 "공주"는 유례없는 생계문제에 부닥친 것이다. 만일 이전에 왕부에서 요리사로 있던 사람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만린 일가는 아마도 그 힘든 세월을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기아는 만린을 마음껏 괴롭혔다. 더더구나 일찌기 공주신분이든 그녀가 이것을 참아야 한다는 것은 더더욱 굴욕감을 가져다 주었다. 매일 저녁이면 건장한 남자들이 그녀의 집안으로 뛰어들어와서, 큰 소리로 그녀가 몽골칸의 공주이며, 만악의 계급의 적이라고 욕했고, 심지어 그녀에게 그들과 어울릴 것을 요구하여 거절당하면, 다시 욕을 해댔다: "네가 왕야의 공주라고, 신분이 맞는 사람과만 어울리겠다는 거냐?".
공주라는 신분이 드러난 후, 등교길에서 만린은 수시로 각양각색의 위협과 괴롭힘을 당했다. 그녀는 더 이상은 참을 수 없게 되어, 이 곳을 도망치고자 했다.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사람들 속에서 살고 싶어했고, 그녀의 공주라는 신분을 버려버리려고 했다.
그녀는 중공중앙 신강분국서기인 왕언마오(王恩茂)에게 편지를 썼다. 그가 도와주어서, 만린은 북경의 중앙민족대학부속중학교로 전학갈 수 있었다. 여기에서는 학교에서 배급제를 실행하여, 모든 학생은 같이 민족복장을 입었다. 문구도 모두 통일적으로 배급했다. 만린은 처음으로 다른 사람과 같다는 평등감을 느꼈다.
다만 이런 감각은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많은 동창들은 군관학교나 청화대학, 북경대학과 같은 학교로 무시험입학하였다. 다만, 학업성적과 품행이 우수한 만린은 출신문제로 이들 학교에 신청할 자격이 없다고 통보받았다. 이뿐 아니라, 첫사랑의 남자친구가 소련유학을 허락받은 후에, 교장은 만린을 찾아서 그와의 관계를 끊으라고 말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너의 출신, 사회관계가 그의 앞날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잔혹한 현실 앞에, 만린은 반항할 수 없었다. 그녀는 반항할 힘이 없었다. 그녀는 그저 비통함을 참으면서 연인과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후 매번 운명의 중요한 순간에, 출신문제는 항상 튀어나왔다. 그리하여 만린의 생명에서 털어버릴 수 없는 악몽이 된다.
이때, 그녀는 일종의 무력감을 느꼈다. 누구를 원망해야할지도 몰랐다. 그녀는 심지어 자기가 칸의 왕부에서 태어나지 않고, 보통 가정에서 여자아이로 태어나서 조용히 자랐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알고 있었다. 부모에게 가해지는 압력은 그녀에게 가해지는 압력보다 적지 않다는 것을. 심지어 훨씬 무겁다는 것을.
기구한 운명의 칸왕
만린이 기억하고 있는 시점부터는 부친이 정신질환자였다.
"그는 병상에 누워있었고, 온 얼굴이 퉁퉁 부어 있었다. 수염은 아주 길고, 온 얼굴이 수염이었다. 눈에서는 공포와 서글픔의 눈빛이 나왔다." 이것이 만린이 기억하는 부친의 첫인상이다.
그때, 그는 막 감옥에서 나왔고, 눈물을 흘리는 처자식 앞에서 "조그만치도 반응이 없었다." 육도항의 집으로 돌아가서, 만린은 자주 부친이 모두 잠든 깊은 밤에 창가에 서서 큰 소리로 소리지르는 것을 들었다. "그는 손을 높이 들고, 머리를 이리 저리 꼬았으며, 아주 힘들어 했고, 목소리는 처참했다."
이 미친 남자는 바로 토르구트 역사상 유명한 칸이고 전체 토르구트부족의 운명을 바꿔놓을 뻔했던 우두머리인, 만추크자부(滿楚克擦布)였다.
만추크자부가 탄생한 1915년은 바로 토르구트부족이 가장 곤란한 때였다. 100여년동안, 청왕조는 동쪽으로 되돌아온 토르구트에 대하여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고, "분할하여 통치한다"는 원칙을 견지했다. 그리고 그들이 무장할 수 없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토르구트족이 그이 멸족에 이를 지경의 재앙인 1866년의 "러시딩(熱西丁)종교살인"과 1872년의 "야쿱 벡(Yaqub Beg)의 침입"때 아무런 저항능력이 없이 부족의 절반이 목숨을 잃었다. 이후 30여년간 회복이 되었지만, 신해혁명의 전날, 토르구트칸왕이 통할하던 구 토르쿠트 각부족의 인구는 여전히 1861년의 절반에 미치지 못했다. 개간한 경지는 원래의 5%도 되지 못했고, 인민의 생활은 상당히 빈곤했다.
청나라가 멸망하자, 신강은 홀로 새외에 놓였다. 강한 러시아가 노리고, 영국인도 엿보았다. 중앙정부는 스스로를 돌볼 힘조차 없으니, 신강에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지방에 여러 민족이 있고, 여러 종교가 있어 갈등이 빈번했다. 신강은 졸지에 각 군벌, 민족무장세력과 외국침략자의 각축장이 되었다.
신강중부에 있는 토르구트부족은 이런 혼란하고 복잡한 속에서 생존하려면 반드시 자신의 무장실력을 갖추어야 했다. 무력으로 자신의 고향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신해혁명후, 만추크자부의 부친인 부얀멍쿠(布彦蒙庫)칸왕은 기병단을 조직했다. 몽골기병은 역대이래로 용맹했다. 이 강대한 무장세력은 금방 신강의 첫번째 도독인 양증신(楊增新)이 회유하고 이용하려는 목표가 되었다. 청나라의 유신으로써, 양증신은 이 무장세력이 신강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잘 알았다.
역사의 주변에서 오랫동안 잠겨있던 토르구트칸왕가족은 점차 신강정치투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어갔다. 1917년, 부얀멍쿠칸왕은 복잡한 내부토쟁끝에 비명에 죽는다. 만추크자부가 칸의 자리를 계승한다. 그리고 "만칸왕(滿汗王)"이라고 불리웠다. 만칸왕이 즉위할 때 아직 두 살이 되지 않아서, 그의 숙부인 5세생흠활불이 섭정왕을 했다.
객관적으로 말하자면, 생흠활불이 나중의 만칸왕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친히 몽골기병을 지휘하여 천산남북에서 싸웠다. 몽골기병의 작전능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그는 경험있는 러시아기병교관인 다시와 샤무로프를 채용해서 기병을 엄격하게 훈련시켰다. 십여년후, 이런 과학적인 훈련으로 걸출한 기병장군인 만칸왕을 탄생시킨다. 이뿐 아니라, 생흠활불은 여러가지 정치, 경제와 교육개혁을 실시한다. 이것도 마찬가지로 점차 성장하던 만추크자부에 영향을 주었고, 그에게 개방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을 갖게 해주었다.
다만, 이 강대한 기병은 결국 생흠활불에게 살신지화를 초래한다. 1928년, 양증신이 수하에게 피살당한다. 진슈런(金樹仁)이 신강의 정권을 장악한다. 1932년, 진슈런은 십여개의 명령을 연속으로 내려서, 생흠활불에게 병사를 이끌고 하미 소보촌의 농민반란을 진압하라고 한다. 그러나 생흠활불은 거절한다. 진슈런은 성격이 의심이 많고 쿠데타로 성공한 사람이었다. 토르구트의 기병이 이처럼 강대하면서도 자기 말을 듣지 않는 것을 보고, 언젠가 토르구트부족이 반란을 일으킬까봐 두려워했다. 그리하여 생흠활불은 4월 13일에 비밀리에 살해한다.
숙부가 살해당한 일은 17살인 만칸왕에게 큰 타격을 준다. 이때, 그는 막 전투를 용감히 하여 몽골기병의 사단장이 되었었다. 그러나 금방 1년후에 진슈런은 쫓겨나고, 신강은 새군벌 성스차이(盛世才)의 수중에 떨어진다. 성스차이는 노려나고 심계가 깊었다. 마음 속으로 토르구트부족의 역량을 가늠하고 있었다. 강대한 몽골기병은 다시 회유의 대상이 된다. 성스차이는 만칸왕을 언기경비구사령관에 임명하고, 중장계급을 부여한다. 이는 신강근대사상 가장 젊은 중장이었다.
강대한 무장의 도움으로 토르구트부락은 다시 군벌정권내에서 입지를 마련한다. 토르구트칸왕으로서, 만추크자부는 자주 병사를 이끌고 전투에 참여했다. 그러면서 자기 부락의 발전을 도모했다. 1934년, 그는 왕부의 재산과 처인 우징빈(吳靜彬)의 혼인예물을 가지고 오이라트몽골역사상 첫번째 현대적 소학교인 칸왕부몽골소학을 개설한다. 만칸왕부부가 자금을 내서 학교를 만든 일은 토르구트사람들에게 학교를 만드는 유행을 일으키게 된다.
만칸왕이 한창 뜻을 펼쳐서, 숙부인 생흠활불이 못한 일을 다 하고자 할 때, 1934년, 성스차이는 만칸왕에게 신강성정부고문 및 신강반제회부위원장을 맡아달라고 한다. 다음 해 20세의 만칸왕은 처를 데리고 성정부소재지인 디화(迪化)로 간다.
그러나, 젊은 만칸왕은 정치의 무서움을 잘 몰랐다. 숙부가 살해당한 것이 그에게 전혀 교훈을 주지 못했던 것같다. 그는 천진하게도 성스차이가 정말로 그의 재주를 뛰어나게 평가하여 기용하려는 것으로 알았다. 그래서 대거 일을 벌여서, 부락내부에서 현대화를 추진했을 뿐아니라,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고, 심지어 성스차이에 반대하는 장페이위안(張培元)등과도 깊이 교류했다. 점점 성스차이가 그를 꺼리게 된다. 만칸왕이 소련인들과 가까워지자, 성스차이는 더더욱 불안을 느꼈다. 토르구트몽골기병의 역량은 원래 강대했는데, 여기에 소련의 지지까지 받게 되면, 그의 공고한 정권에 거대한 위협이 될 수 있었다.
진슈런도 좋고, 성스차이도 좋다. 모두 토르구트부족의 역량을 자기를 위하여 쓰고자 한 사람들이다. 그러다보니 정권의 균형추가 묘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일반 이것이 다른 쪽으로 기울어지면, 바로 아무런 망설임없이 소멸시켜버리는 것이다. 토르구트의 지도자로서, 만칸왕은 그의 숙부인 생흠활불과 같은 비극적인 운명을 벗어날 수 없었다.
1937년 10월 12일, 딸 만린이 태어난지 3,4개월도 되지 않아, 만칸왕은 성스차이에 의하여 '트로츠키파 음모반란자'로 감옥에 갇히게 된다. 22세의 만칸왕에게 참혹한 형벌을 가하고, 마지막에 신경을 파괴시키는 독약을 주사하여, 정신이상에 되게 한다. 이것이 바로 7년후에 만린이 본 그 미친 부친이었다.
과감한 왕비
만린의 부친이 수감된 후, 모친인 우징빈은 역사의 무대로 나아갔다.
우징빈은 동부몽골 카라친자사크 화석친왕 공상노르부의 딸이었다. 17세에 토르구트칸왕부로 시집왔다. 처음에 만칸왕부에 도착한 우징빈은 남편을 돌보고 자식을 키우는 보통부녀였다. 비록 공왕부출신이지만, 생모가 시녀였으므로, 우징빈은 계통적인 교육을 받지 못했었다. 우연한 기회에 그녀는 공산당원인 왕바오첸(王寶乾) 부부를 알게 된다. 그들의 영향하에, 우징빈은 협곡을 나와 디화여자중학에서 공부를 한다.
남편이 체포되자, 우징빈은 토르구트사람들의 유일한 희망이 된다.
그러나, 우징빈의 앞에 노인 것은 아무런 생기가 없는 막다른 골목었다. 몽골기방사단은 성스차이에 의하여 무장해제당했고, 토르구트인은 천산을 휘저을 힘을 잃었다. 2년후, 성스차이는 구토르구트남로 우나은수주크투맹장공서를 철폐하고, 만칸왕의 토르구트에서의 행정권을 완전히 빼앗아버렸다.
자신의 무장역량을 잃자, 토르구트의 생존이 문제로 떠올랐다. 성스차이의 압력으로 다시 몽골기병을 재건하는 것은 가능성이 없었다. 행정권을 잃은 칸왕부는 계속 개혁을 추진할 수가 없었다. 심사숙고끝에 우징빈은 성스차이를 건드리지 않으면서, 토르구트를 발전시킬 수 있는 길을 찾아낸다. 그것은 자기가 돈을 내서 신식학교를 만드는 것이었다.
사실상, 이것은 유약한 토르구트왕비가 자기의 부족을 위하여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1941년부터, 우징빈은 10여개의 몽골족학교를 설립하고, 토르구트를 위하여 현대적인 우수인재를 배양한다.
1944년, 성스차이는 여러방면의 압력으로 수십년간 경영하던 신강을 떠난다. 신강의 정치국면은 아주 복잡했다. 신강남부의 문호인 언기의 안정을 확보하고, 남북신강의 통일을 보증하기 위하여, 신강을 소홀히 하던 국민당은 다시 신강의 유일한 몽골칸왕 만칸왕을 주목한다.
이때, 우징빈은 다시 촛점이 된다. 이 유연한 왕비는 다시 부족의 지위를 끌어올릴 기회를 맞았다. 그녀는 장개석에게 편지를 써서, 맹장공서를 회복시키고, 중앙에서 돈을 대주어 몽골족경제를 발전시키고, 문화교육경비를 내주어 학교를 만들어, 몽골족문화를 제고시키고자 하였다.
다만, 이런 생각은 항일전쟁중의 혼란한 국면하에서 그저 탁상공론에 불과했다. 비록 장개석이 친필로 "장치중에게 지방의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 처리하라"고 지시하였지만, 그녀가 제출한 요구사항은 대부분 각급관리들에 의하여 무산되고 만다. 그다지 의미도 없는 맹장공서제는 2년후에 회복된다. 1947년, 국민당정부는 만추크자부를 구토르구트남로오나은수주커투맹의 맹장에 임명하고, 우징빈을 부맹장으로 하여 행정사무를 주재하게 한다.
비록 이것은 유명무실한 부맹장이긴 하지만, 우징빈은 여전히 토르구트의 미래를 위하여 계획을 세웠다. 그녀는 심지어 저명한 건축엔지니어인 쉬홍례(徐洪烈)을 초청하여, 토르구트의 관할구에 대한 장기계획을 세웠고, 일련의 경제, 교육, 공업발전계획을 설계했다.
1949년 9월, 서북해방군이 신강으로 밀려오자, 국민당신강경비사령관 도치악(陶峙岳)은 의거를 선언하여, 신강은 평화적으로 해방된다. 좌우토르구트부족의 운명을 가진 왕비, 우징빈은 수중의 권력을 신정권에 내놓는다.
조상의 족적을 찾아서
수백년의 창상을 겪은 토르구트부족은 마침내 진정으로 편안히 쉴 수 있는 시대를 맞이했다. 다만 만칸왕 일가는 시대의 풍조하에 평정을 잃었다. 먼저 만린의 모친이 수감된다. 그 후에 쉬지않고 조사를 하다. 이미 미쳐버린 만칸왕은 결국 조반파의 괴롭힘을 견디지 못하고 굶어죽는다.
자기의 남편과 딸을 보호하기 위하여, 만린은 그 시대에 조심스럽게 모친과의 거리를 유지했다. 매번 모친이 그녀에게 먼 조상의 이야기를 하면, 그녀는 항상 듣지 않으려고 하였다. 모친이 이들 기억을 모두 무덤으로 가져가주기를 바랐다.
여러해 이후, 역사학자인 마다정이 만린을 찾고, 그녀에게 자기가족의 근 백년의 운명을 회고해달라고 하자, 이 칸왕 우바시의 혈맥을 이은 마지막 공주는 전류에 감전된 것같았다. 일순, 1백년동안 응집된 이 가족의 고난과 영예가 그녀의 마음 속에서 점차 분명하게 떠올랐다.
마다정이 떠난 후, 그녀는 미친 듯이 토르구트의 모든 역사서적을 찾아보았다. 매번 자기의 고향을 방문할 때마다 토르구트역사를 알고 있는 학자, 노인을 찾아다니고, 매일 제1역사자료관에 파묻혀서, 한자 한자 청나라궁중의 자료에서 토르구트에 관한 자료를 찾았다.
1992년, 아직 퇴직연령이 되지 않은 만린은 퇴직을 신청한다. 그녀는 토르구트에 대한 사서를 완성하고 싶었던 것이다. 선조의 경력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하여, 그녀는 심지어 러시아의 카르메크공화국까지 갔다. 1997년 6월 11일, 모스크바에서 비행기로 카르메크공화국의 수도인 아이리스타로 가는 항공편이 볼가강유역을 지날 때, 만린은 비행기창문으로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끝이 없이 펼쳐전 벽록색의 광활한 대평원은 무한한 생기에 충만했다. 아주 부유한 토지였다. 이것이 바로 조상들이 150여년을 생활했던 곳이다.
그러나, 비행기는 착륙하지 않았다. 볼가강하류지역을 가로지르자 벽록색은 점차 소실되고 마지막에는 황회색중에 점점이 녹색이 보였다. 곁에 앉은 여객은 만린에게 말해주었다. 이곳이 바로 카르메크공화국이라고. 전방이 바로 아이리스타였다. 아이리스타! 만린은 돌연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몽골어에서 사막이라는 뜻이 아닌가? 원래 볼가강서안에 있었던 이들 몽골동포들은 왜 이렇게 풀도 자라지 않는 땅으로 쫓겨났을까? 이백여년이래, 그들은 어떤 고난과 고통을 겪었던가? 일련의 의문이 만린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비행기가 아이리스타공항에 내리고, 처음으로 이 낯선 땅을 밟은 만린은 금방 고향의 느낌을 찾았다. 날씬한 몽골족 소녀, 오래되고 전아한 민족복장, 손에는 생화를 들고 몰려왔다. 그녀들은 순백색의 하다를 바쳤고, 향기나는 우유차와 노란 기름에 튀긴 면을 올렸다. 환영하는 사람들은 느릿하고 편안한 몽골노래를 불렀다..
그 광경은 만린으로 하여금 자기의 고향을 생각나게 했다. 바인부루크초원. 역시 그녀가 어렸을 때, 고향의 목민들은 자주 아오바오앞에서 노래하고 춤추면서, 멀리서 오는 손님을 맞이했다. 일순간에 역사는 무수한 창상을 건너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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