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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문혁전)

등가선(鄧稼先) : 중국 양탄(兩彈; 원자폭탄,수소폭탄)의 아버지

by 중은우시 2007. 5. 30.

 

 

등가선은 1924년, 안휘성 회녕현(懷寧縣)의 대대로 글읽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다음해 그는 모친을 따라 북경으로 가고, 청화대학과 북경대학에서 철학교수를 지내던 부친의 곁에서 성장했다. 그는 5살에 학교에 입학하여, 부친의 지도하에 중국과 서양문화에 대한 기초를 착실히 다졌다. 1935년 그는 지성중학(志成中學)에 입학하여, 그보다 두 학년이 높지만, 청화대학내에서 이웃해 살던 양진녕(楊振寧, 노벨물리학상 수상자)과 친구로 지낸다. 등가선은 학교내에서 애국운동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937년 북경이 함락된 후 비밀리에 항일집회에 참가한다. 부친의 계획하에, 그는 큰누나를 따라 후방인 곤명으로 가고, 거기서 1941년에 서남연합대학 물리학과에 입학한다.

 

1945년 2차대전승리후, 등가선은 서남연합대학을 졸업한다. 그리고 곤명에서 공산당의 외곽조직인 '민청(民靑)'에 가입하여, 민주쟁취와 국민당의 매국독재를 반대하는 투쟁을 벌인다. 다음 해, 그는 북경으로 돌아와서 북경대학 물리학과 교수가 된다. 학생운동과정에서 그는 북대교직원연합회의 주석을 맡는다. 더 많은 것을 배워서 국가에 공헌하겠다는 일념으로 그는 1947년 미국대학원생시험에 합격하여, 다음해 가을 미국인디애나주의 퍼듀대학원에 입학한다. 그는 성적이 뛰어났으므로 2년이 되기도 전에 학점을 모두 따고, 박사논문답변도 끝낸다. 이때 그의 나이 겨우 26살이었다. 사람들은 베이비박사라고 불렀다.

 

1950년 8월, 등가선은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9일째 되는 날, 은사와 동창의 만류를 뿌리치고, 귀국길에 오른다. 같은 해 10월, 등가선은 중국과학원 근대물리연구소의 연구원이 된다. 이후 8년간, 그는 중국원자핵물리이론을 연구한다. 1953년, 그는 허록희(許鹿希)와 결혼한다. 그녀는 5.4운동의 지도자이며 나중에 전인대상무부위원장을 지낸 허덕형(許德珩)의 장녀이다. 1954년 등가선은 공산당에 입당한다.

 

1958년 가을, 제2기계부 부부장인 전삼강(錢三强)이 등가선을 찾아온다. 그리고, 국가에서 비밀업무가 있는데 그에게 참가할 것인지를 묻는다. 등가선은 앞뒤를 따지지 않고 동의한다. 집에 돌아와서 처자에게는 그저 자기가 일때문에 옮겨가야 할 것이고, 이후 처자식을 돌보기 힘들 것이며, 통신도 쉽지 않을 거라고 말한다. 이때부터 등가선의 이름은 정기간행물과 대외연락에서 사라지게 된다. 그의 그림자는 엄격하게 보안이 된 연구소와 고비사막에 출현할 뿐이었다.

 

등가선은 제2기계부 제9연구소 이론부 주임을 맡은 후, 먼저 대학생들을 골라서, 러시아어자료와 원자탄모형을 준비하게 한다. 1959년 6월, 소련정부는 원래의 계약을 파기한다. 중공중앙은 자기 손으로 원자폭탄, 수소폭탄과 인공위성을 만들기로 결정한다. 등가선은 원자탄의 이론설계책임자가 된 후, 동료들에게 나누어 연구하도록 시킨 후, 스스로 어려운 이론난관을 깨는데 앞장선다. 소련전문가가 남긴 핵폭발대기압의 데이타를 보고, 등가선은 주광소(周光召)의 도움을 받아 면밀한 추리를 거쳐 원래의 결론을 뒤집는다. 이로써, 중국원자폭탄시험의 성패를 좌우하는 핵심적인 난제를 해결하게 된다. 수학자인 화라경(華羅庚)은 나중에 이것은 세계수학의 난제를 집대성한 문제였다고 하였다.

 

등가선은 비밀리에 과학연구를 하느라 심혈을 기울이는 동시에 자주 모랫바람이 날리는 고비사막의 시험장을 가보았다. 1964년 10월, 중국에서 성공적으로 폭발된 첫번째 원자폭탄은 바로 그가 최종 사인해서 확정한 설계안대로 만든 것이었다. 그는 연구원을 이끌고 시험후에 신속히 폭발현장으로 가서 샘플을 모았고, 그 효과를 확인했다. 그는 우민(于敏)과 함께 수수폭탄연구에 돌입한다. "등-우방안"에 따라 수수폭탄의 제조에도 성공한다. 원자폭탄폭발성공후 2년8개월만에 시험에 성공한다. 이것은 프랑스가 8년걸리고, 미국이 7년걸리고, 소련이 4년걸렸던 것에 비하여 기간을 가장 짧게 단축한 것이었다.

 

1972년, 등가선은 핵무기연구원의 부원장을 맡는다. 1979년에는 원장이 된다. 1984년, 그는 사막에서 중국의 제2세대 신식핵무기시험에 성공한다. 다음 해, 그의 암은 확산되어 회복불능이 된다. 그가 국경절에 요청한 것은 천안문을 가보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임종전에 남긴 유언도 여전히 어떻게 하면 첨단무기분야에서 미소에 많이 뒤떨어지지 않게 하겠느냐는 것이었고, 절대 너무 많이 낙후되지 말라는 것이었다.

 

등가선은 오랫동안 핵실험을 담당했고, 원래 일에 대한 책임감이 강하였기 때문에, 가장 중요하고, 위험할 때는 제1선에 서곤 했다. 예를 들어, 핵무기에 뇌관을 꼽는 일, 우라늄가공등 생사에 관련된 위험산 시기에는 그가 항상 조작인원의 곁에 서 있었다. 이는 관리를 강화하는 측면도 있고, 조작인원에게 커다란 힘이 되기도 하였다.

 

한번은 항공투하시험에서 낙하산사고가 발생하여, 원자탄이 땅바닥에 떨어져 갈라진 적이 있다. 등가선은 위험을 인지하고, 혼자서 앞으로 나아가 부서진 원자탄의 파편을 수거해서 자세히 점검했다. 의학교수인 부인은 그가 부서진 원자탄을 만졌다는 것을 알아서, 등가선이 북경으로 돌아왔을 때, 그를 강제로 끌고가서 검사받게 한다. 결과는 그의 소변에서 방사선물질이 발견되고, 간장이 상했으며, 골수에도 방사선이 침입했다는 것이었다. 이후에도 등가선은 여전히 핵실험기지로 돌아가겠다고 고집한다. 걸음을 걷기 힘들 때에도, 그는 자신이 스스로 뇌관을 꽂았는데, 주위 사람들에게 "너희는 아직 젊다. 너희가 가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1985년, 등가선은 최후로 나포박을 떠나 북경으로 돌아온다. 그리고도 여전히 회의에 참가하려 한다. 의사가 그를 강제로 입원시키고, 그가 이미 암을 앓고 있다고 알려준다. 그는 힘없이 병상에 누워있을 때, 그는 처와 국방부장인 장애평의 위문을 받으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 중공중앙에서는 여러가지 노력을 했지만, 그의 생명을 구해내지는 못했다. 등가선이 사망하기 얼마전에, 그에게 전용차를 보내주었고, 그는 가족들의 부축하에 차를 타고 한바퀴 돌아보았다. 그가 서거한 13년후인 1999년, 국가성립50주년경축일에 당중앙, 국무원과 중앙군사위원회는 등가슨에게 금으로 된 "양탄일성공훈장"을 수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