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문혁전)

모안영(毛岸英), 모안청(毛岸靑) 형제의 처는 자매간이다.

by 중은우시 2007. 3. 30.

글: 섭영렬(葉永烈)

 

2007년 3월 23일 새벽 4시 18분, 모택동의 둘째 아들인 모안청이 병으로 북경에서 사망했다. 향년 84세이다. 미국 <<로스엔젤레스 타임즈>>의 기자가 전화로 인터뷰를 요청했고, 필자와 모안청에 대한 얘기를 나누기 원했다. 나는 아무런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나는 이전에 모안청의 북경시내의 집에 가본 적이 있었고, 그와 처인 소화(邵華) 그리고 모택동의 큰며느리 즉 모안영의 처인 유송림(劉松林)이 함께 살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자, <<로스엔젤레스 타임즈>>의 기자는 유송림과 소화의 관계에 대하여 물었다. 나는 "그건 매우 재미있는 우연인데: 하자진(賀子珍)과 여동생 하이(賀怡)가 모택동과 남동생 모택담(毛澤覃)에게 시집을 갔듯이, 유송림과 여동생 소화는 모택동의 큰아들 모안영과 동생 모안청에게 시집갔다"고 말해주었다.

 

나의 대답에 그 기자는 아주 흥미를 나타냈다. 유송림과 소화는 한 명은 성이 유씨고 한 명은 성이 소씨인데, 어떻게 된 것인지 물어보았다. 얘기하자면 연유는 길다. 필자는 여러번 유송림을 방문한 적이 있다. 사실 유송림의 원명은 유사제(劉思齊)이다. 그리고 소화는 원래 성이 소씨가 아니다. 원래 성씨는 장(張)이고, 장소화(張少華)라고 부른다.

 

1927년 4월 4일 오후, 모택동은 무한에서 국민당중앙농민운동강습소의 개학행사에 참석한다. 그는 무창 도부제41호의 집으로 돌아오는 중에 처인 양개혜가 막 아들 하나를 낳았다는 말을 듣는다. 바로 모택동의 셋째 아들이다. 모택동은 셋째 아들을 위하여 모안룡(毛岸龍)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이 때 5살된 장남 모안영, 4살된 차남 모안청 그리고 보모 진옥영(陳玉英)은 모두 모택동과 함께 살고 있었다.

 

며칠 후, 한 젊은 남녀가 모택동을 찾아온다. 남자는 젊은 군관이었는데, 이름이 유겸초(劉謙初)였다. 산동사람이고 공산당원이었으며,당시 북벌군제11군정치부 선전과 사회고장을 맡고 있었다. 여자는 장문추(張文秋)였고, 호북사람이었으며, 1924년 중국사회주의청년단에 가입하고, 1926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당시, 마침 장개석의 "4.12"정변 직전이었으므로, 유겸초는 모택동에게 국내외형세와 농민운동문제에 대하여 가르침을 구했는데, 두 사람은 말이 잘 통했다. 양개혜는 땅콩을 내놓고 그들을 대접했다. 장문추는 땅콩을 한 줌 쥐어 모안영과 모안청에게 주었다. 두 아들은 아주 예의바르게 장문추에게 고맙다고 인사했다. 장문추는 아마 전혀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모택동의 두 아들이 모두 자기의 사위가 될 것이라는 것은.

 

당시, 장문추와 유겸초는 이미 열애중이었다. "4.12"정변이 발생하여, 무한의 정세는 혼란에 빠졌다. 원래 정혼한 후에 결혼하려던 두사람은 그냥 1927년 4월 26일 결혼해버린다. 신혼후에 유겸초는 장문추와 헤어져서 전선으로 나간다. 나중에 귿르은 산동에서 다시 만나고 함께 전투에 참가한다.

 

1929년 여름, 장문추와 유겸초는 앞뒤로 제남에서 체포된다. 이 때, 장문추는 이미 임신하고 있었다. 그녀는 옥중에서 정치를 모르는 시골여인인 것처럼 행동하여, 결국 1930년 초에 석방된다. 중공지하조직은 장문추를 상해로 보낸다. 장문추는 상해 해격로(海格路, 지금의 화산로)의 홍십자의원에서 딸을 낳는다. 유겸초는 일찌기 먼저 아이의 이름을 "사제(思齊)"라고 지어두었다. "제"는 산동, 즉 유겸초의 고향을 의미한다. 유사제는 바로 유송림이다.

 

유감스러운 것은 유송림은 부친의 얼굴한번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1931년 4월 5일, 유겸초는 제남에서 산동군벌 한복거의 명령하에 총살당하고 만다. 형을 당할 때, 유겸초는 "중국공산당만세"를 소리높여 외쳤다. 상해의 중국공산당 지하기관에서 일하던 장문추는 4월 8일 홀연 기관내의 당일자 신문이 보이지 않는 것을 발견한다. 그녀는 주은래 사무실의 서고에서 당일의 <<신보>>를 찾아낸다. 그제서야 왜 사람들이 그날자 신문을 수거해버렸는지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신문에는 <<산동에서 홍비(紅匪)를 총살>>이라는 소식이 실려 있었다. 장문추는 보는 순간 혼절해버렸다...

 

7년후 유송림은 두번째 부친을 갖게 된다. 그 때 장문추는 유송림을 데리고, 상해, 홍콩, 남창, 북평(북경)등지에서 지하공작을 하였고, 마침내 1937년 홍도(紅都) 연안으로 오게 된다. 그 때 연안으로 가려면 거의 모두 서안 칠현장 팔로군판사처를 통하여 연락해야 했다. 그 곳에서 장문추는 왼발을 못쓰게 된 홍군을 보게 된다. 그의 이름은 진진아(陳振亞)였다. 진진아는 호남 사람이고, 장문추와는 같은 해인 1926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진진아는 강서의 전투에서 왼쪽다리를 잃었다. 임백거의 소개로, 장문추와 진진아는 서로 알게 된다. 그들은 같은 트럭을 타고 연안으로 간다. 진진아는 상이군인이었고, 모두 그에게 운전석의 자리를 양보했다. 그는 7살된 유송림을 매우 좋아했고, 가는 길 내내 유송림을 자기의 무릎에 앉혔다.

 

1938년, 장문추와 진진아는 연안에서 결혼한다. 이렇게 진진아는 유송림의 계부가 된다. 중국인은 자주 인연을 따진다. 유송림과 모택동 일가는 정말 인연이 깊다. 연안에서, 한 우연한 기회에 8살된 유송림은 모택동을 만난다. 모택동은 유송림을 매우 좋아하고, 바로 그녀를 "양녀"로 삼는다. 이때부터, 유송림은 모택동 일가와 인연을 맺는다..

 

그날은 1938년 초봄의 한 밤이었다. 연안의 중공중앙당교 대강당에는 사람이 가득 모였다. 모택동, 주덕, 임필시도 왔다. 모두 와서 연극을 보았다. 그날 상연한 것은 화극인 <<기아(棄兒)>>였다. <<기아>>가 쓴 것은 한 쌍의 중공지하공작자들이 백구에서 힘들게 투쟁하다가 불행히 체포되는 것을 그린 것이다. 그들의 딸은 찬바람속에서 달려가며 소리친다. "엄마. 엄마." 이것을 연기한 어린 아이는 바로 유송림이었다. 유송림은 당시 연안의 탁아소안에서 매우 활발하고 노래와 춤을 좋아하는 아이였다. 그래서 뽑힌 것이다. 게가다 유송림은 극중의 여자아이와 비슷한 경력이 있으므로, 그녀는 아주 연기를 잘했고,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모택동은 아주 감동을 받았다. 이것은 그도 비슷한 경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세 아들은 상해에서 "기아"가 된 적이 있었다. 극이 끝난 후, 모택동은 여전히 <<기아>>에 깊은 감동을 받아 마지막 1막을 다시 한번 연기해달라고 요청한다. 그래서, 유송림은 남루한 옷을 입고 다시 한번 무대를 뛰어다니며 소리쳤다: "엄마. 엄마." 모택동은 이 어린 연기자를 매우 좋아했다. 연극이 끝난 후, 모택동은 유송림을 불러 곁에 앉힌 후,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이름을 물었고, 엄마아빠가 누구인지 물었다. 유송림은 뒷줄에 앉아 있는 진진아와 장문추를 가리키며 저기가 아빠, 엄마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모택동은 그들에게 손짓을 했고, 진진아와 장문추는 급히 앞으로 다가갔다. 진진아는 모택동에게 설명했다. "그녀는 유겸초 열사와 장문추 동지의 딸입니다. 나는 그녀의 계부입니다" 모택동은 1927년 4월 무한으로 왔던 그 젊은 남녀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유송림에게 말했다. "내가 네 아버지가 되어주마. 너는 내 양딸이다. 괜찮겠어?" 유송림은 바로 대답했다. "좋아요" 모택동은 다시 말했다. "너는 이제 내 양딸이니, 나를 따라 우리 집에 가서 놀자." 그래서, 연극이 끝난 후, 모택동은 유송림의 작은 손을 잡고 그녀와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도 모택동은 또 유송림을 데려 갔다. 이때부터 유송림은 모택동 집의 어린 손님이 되었고, 자주 가서 놀았다. 그 때는 모안영이 아직 소련에 있었다.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모택동이 이 8살난 양딸이 나중에 모택동의 큰며느리가 될 줄은.

 

바로 이해 가을에 장문추는 연안에서 딸 하나를 더 낳는다. 이렇게 유송림은 이부동모(異父同母)의 여동생을 가지게 되었다. 진진아는 딸에게 '소화'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이치대로라면 '진소화'가 되어야 겠지만, 그들은 '전통'에 반해서 어머니의 성을 쓰게하여, '장소화'라고 부르게 된다. 나중에 장소화는 북경대학을 졸업하는데, '소화'라는 이름과 동일한 발음인 "소화(邵華)"를 필명으로 쓰게 된다.

 

지금까지도 그녀는 "소화"라는 이름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