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황제는 아마도 가장 편안한 직업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삼궁육원에 수천의 궁녀를 거느릴 수 있었다. 절대권력을 가진 자만이 절대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중국남북조시대의 송(宋)나라에는 산음공주 유초옥(劉楚玉)이라는 여인이 있었는데, 이런 특권에 도전장을 내밀었고, 자신이 원하는대로 자신의 삼궁육원을 만들어냈다.
산음공주의 모친은 문목황후(文穆皇后) 왕헌원(王憲嫄)이다. 그녀는 효무제와의 사이에 2남4녀를 낳았는데 각각 다음과 같다: 폐제(廢帝) 유자업(劉子業), 예장왕(豫章王) 유자상(劉子尙), 산음공주 유초옥, 임회강애공주(臨淮康哀공주) 유초패(劉楚佩), 황녀 유초수(劉楚琇), 강락공주(康樂公主) 유수명(劉修明). 문목황후는 다산이었고, 미인이었다. 그녀가 낳은 딸들도 모두 미녀들이었다. 이 네명의 딸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바로 산음공주이다.
대명8년(464년) 5월, 산음공주의 16살된 남동생 유자업이 황위를 계승했으니, 역사서에서 전폐제(前廢帝)로 불리는 인물이다. 유자업은 황음하고 호색했다. 아마도 중국역사상 가장 호색한 황제일 것이다. 그는 민간에서 미녀를 많이 뽑아들였을 뿐아니라, 부친의 후궁, 심지어 자신의 친고모, 친누나까지 품었다. 그에게 강점당한 고모는 역사상 신채공주(新蔡公主)라고 불리우는 여인이다.일찌기 장군 하매(河邁)에게 시집갔었는데, 유자업은 그녀를 궁중으로 불러들이면서, 독살한 궁녀의 시신을 하매의 집으로 보내면서, 신채공주는 이미 죽었다고 말한다. 하매는 이 치욕을 견디지 못하고, 반란을 일으킨다. 그러나, 사전에 누설되는 바람에 유자업에게 살해되고 만다. 신채공주는 이때부터 성을 사(謝)씨로 바꾸고 궁중에 남게 된다. 유자업은 심지어 신채공주를 황후로 세우려고 까지 하였으나, 신채공주가 스스로 거절한다.
산음공주는 고모와는 달랐다. 그녀는 남동생과 서로 마음이 잘 맞았다. 역사서의 기재에 의하면, 산음공주는 자주 궁중에 들어와서 유자업과 함께 먹고 함께 기거했으니, 부부와 같았다고 한다. 유자업은 이 누나가 하는 말이면 뭐든지 들어주었다. 한번은 산음공주가 유자업에게 말했다: "저와 폐하는 모두 선황의 자손인데, 폐하는 삼궁육원을 거느리는데, 첩은 부마 1명뿐이니 이것은 너무 불공평합니다. 어찌 이럴 수 있습니까?" 이것은 기원5세기경에 한 중국공주가 내뱉은 말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말이다. 그러나, 잘 들어보면 나름대로 이치는 있다. 공주와 황제는 모두 한 부친에게서 났는데, 왜 황제는 후궁을 만명이나 거느리고, 공주는 겨우 부마 1명만 둘 수 있는지? 유자업은 누나의 이 말을 듣고는 즉시 산음공주의 뜻을 받아들인다.
유자업은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이 일은 신속히 처리한다. 즉시 30명의 잘생긴 미소년들을 뽑아서 산음공주집으로 보내준다. 산음공주는 이들을 모두 남총(男寵)으로 받아들인다. 즉, 면수(面首)이다. 면수의 "면(面)"은 면모가 잘 생겼다는 의미이고, "수(首)"는 머리카락이 검다는 뜻이다. 머리카락은 신장과 관계가 있고, 신장이 괜찮으면 머리카락이 많이 난다고 본다.
산음공주의 남편이었던 부마 하집(河戢)이 갑자기 이렇게 30명이나 남첩이 생긴데 대하여 어떠한 반응을 보였는지는 역사서에 기재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기분이 좋지 않았을 것임은 분명하다. 하집은 원래 명문가 출신이고, 아주 잘생겼을 뿐아니라, 일거일동이 모두 풍채가 당당했으며 당시에 유명한 미남자이다. 그러나, 산음공주라는 처를 취하는 바람에 어찌할 도리가 없게 된 것이다.
젊은 남자들은 충분히 가졌으므로, 산음공주는 다시 성숙한 남자에게 눈을 돌렸다. 당시 송나라의 조정에는 두 명의 미남자가 있었다. 한 명은 바로 산음공주에 장가든 하집이고, 다른 한명은 남군공주(南郡公主)에 장가든 저연(褚淵)이다. 저녕의 자은 언회(彦回)이고, 배분으로 따지자면, 저연은 산음공주의 고모부에 해당하였다. 이 사람도 풍채가 뛰어나고 아주 준미하였다. 그리하여, 산음공주는 이 저연을 마음에 두기 시작했다.
그녀는 다시 유자업에게 저연으로 하여금 자신과 며칠을 놀아주도록 요청한다. 유자업은 저연의 품행이 방정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그에게 아무 이유없이 산음공주와 며칠을 놀아달라고 얘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저 그에게 공주집으로 가라고 조서를 내렸다. 그가 공주집에 도착한 후에 어떻게 하는지는 산음공주의 능력에 달렸다고 생각했다.
산음공주는 신경을 써서 매일 화장을 하고 온 정성을 다해서 저연을 유혹하였다. 그러나, 10일이 지나도록 저연은 나무조각같았고, 교태를 부리는 산음공주에 대하여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공주는 마음이 급해졌으나,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산음공주는 "그대는 구렛나룻이 철극과 같이 강한데, 어찌 조금도 사나이답지 못한가"라고 하였다. 그러자 저연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언회는 비록 똑똑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하여 정리에 어긋나는 짓은 하지 않습니다" 산음공주는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강온의 온갖방법을 동원했다. 그러나, 저연은 전혀 동하지 않고 이렇게 응수했다. "너는 공주이고, 국가제도가 있으니, 너를 어떻게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네가 이렇게 계속 나를 핍박한다면, 나는 자살로서 끝낼 수밖에 없다" 이 지경이 되자 산음공주도 더 이상은 어찌하지 못했고, 저연을 곱게 집으로 돌려보내 주었다.
저연은 역사상 겉과 속이 모두 아름다운 드물게 보는 인물이다. 개인적인 수양도 이정도였지만, 정치적인 업적도 뛰어났다. 남송이 멸망한 후, 그는 남제(南齊)에서도 관직을 지내고, 재상급(사도)에 이른다. 청렴으로 유명했고, 사람들의 존경을 많이 받았다.
산음공주의 좋은 시절은 결국 끝이 날 수밖에 없었다. 오래지 않아. 유자업의 학대를 견디지 못한 궁녀와 내시들이 반항을 했고 유자업의 목은 달아났다. 다음 날 다른 황제가 등극했으며, 구정치를 일소하기 위하여 유자상과 산음공주를 죽이게 된다. 산음공주 유초옥이 죽었을 때 나이가 22살 내지 23살이었다. 진정으로 불행한 것은 그 30여명의 면수들이었다. 산음공주가 피살될 때, 그들도 공주와 함께 순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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