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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당)

현장(玄奘)법사의 정수리뼈사리의 행방의 수수께끼

by 중은우시 2007. 5. 22.

남경 현장사 산문

 

역사적으로 남경의 종교는 불교, 도교, 이슬람교 및 기독교등이 모두 존재하고 있어 겸용병포(兼容倂包)의 형상을 보인다. 남경의 옛 지명중에서도 종교의 영향을 받은 곳들이 많다. 남조시기의 서하사(棲霞寺), 당나라때 남종의 제1대조사인 법융이 수행한 조당산(祖堂山), 남당의 후주 이욱이 경전을 읽고 예불드린 창경루(唱經樓)와 서늘한 곳을 찾아서 피서했던 청량산(淸凉山), 명나라때의 계명사(鷄鳴寺)등은 모두 유명한 종교성지이다. 그중 현장사는 불가의 성물인 현장의 사리를 보관한 곳으로 유명하다. 현장의 사리는 이 곳에 최종적으로 안치되었는데, 약간의 곡절이 있었다.

 

당나라 현장은 지금으로부터 1300여년전의 인물이다. 그는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서쪽으로 인도에 가서 불교경전을 가져왔고, 문화를 전파했던 그의 정신은 오늘날까지도 기려지고 있다. 당나라 현장이 당시 걸어갔던 길을 다시 걸어가기 위하여, 2006년 7월, 대만 불광산과 강서 운거산의 두 고승은 황하 호구폭포의 물, 황제릉의 흙, 그리고 대만 일월담의 물, 아리산의 흙을 가지고 물과 흙을 섞어서 현장상을 만들었고, 이후 서안의 대자은사에서 출발하여, 예전에 당나라 현장이 걸었던 모든 곳을 다시 걸어가 보았다.

 

두 고승이 되돌아온 후 그들은 남경에 와서 배알했다. 왜 두 고승은 불원천리하고 남경까지 왔는가? 남경 현장사의 전진법사가 말하는 바에 의하면, 남경현장사의 "지궁(地宮)"에는 당나라 현장의 정수리뼈를 공양하고 있다고 하며, 영곡사(靈谷寺)에도 있다고 한다.

 

구화산에는 현장의 동상이 만들어져있다. 현장의 동상 뒤로는 삼장탑(三藏塔)이 있다. 탑안에는 원형의 석돈(石墩)이 있는데, 관목(棺木)과 비슷하다. 작은 석비에는 "현장대사영골(玄奘大師靈骨)"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곳이 바로 현장법사의 영골사리를 모시는 곳이다. 현장의 정수리뼈사리는 도대체 어떤 모양인가? 시멘트로 완전히 봉해놓아서, 볼 수는 없다. 전진법사에 따르면, "사리에는 발성(髮成), 혈성(血成), 골성(骨成)등의 종류가 있는데, 그 형상은 어떤 것은 채자(菜子)와 같고, 어떤 것은 콩과 같고, 어떤 것은 새알과 같다. 색채는 홍, 백, 흑, 황, 녹, 회, 투명, 잡색으로 나뉜다. 당나라 현종의 정수리뼈사리는 빛과 색이 모두 있다."

 

당나라 현장의 정수리뼈사리는 어떻게 남경으로 옮겨왔는가? 전진법사에 따르면, 현장이 원적한 후, 섬서성의 번천(樊川)의 평원에 있는 흥교사(興敎寺)에 사리를 묻었다.

 

당나라 희종 광명원년(880년)에 황소의 난이 일어난다. 흥교사의 삼장사리탑이 파괴되었다. 한 출가인이 황야에 널부러진 정수리뼈를 보고, 이를 등에 매고 종남산(終南山)의 자각사(紫閣寺)에 탑을 세우고 정수리뼈를 모셨다. 그리고 비문을 세워 그 경위를 설명했다. 북송 태종 단공원년(988년)에 남경의 가정(可政)이라는 스님이 자각사에서 수행하다가 무의식중에 정수리뼈사리, 금발과 일부 의류를 발견한다. 그래서 정수리뼈와 석비를 등에 매고 천리먼길을 걸어 남경으로 돌아온다. 그리고는 이를 천희사(天禧寺)에 모신다. 1408년, 천희사가 큰불에 타서 없어진다. 영락제는 천희사의 원래 자리에 대보은사(大報恩寺)를 짓고 현장의 정수리뼈를 모신다. 태평천국시기에 태평군은 불을 질러 다시 대보은사는 없어진다.

 

1942년 11월초, 남경에 주둔하던 일본군대는 대보은사 삼장전 유적지에 "도화신사(稻禾神社)"를 세운다. 기초를 파다가 석함(石函)을 발견하는데, 석함에는 글자가 새겨져 있고, 현장의 정수리뼈사리가 전전하여 남경으로 옮겨지게 된 경위가 설명되어 있었다. 파낸 것이 당나라 현장의 정수리뼈사리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일본군측은 국립중앙대학으로부터 5명의 교수를 데려와서 그들로 하여금 연구하게 한다. 그들은 3일동안 연구한 끝에 결과물을 내놓는다. 그러나 그들은 일본군에게는 비밀로 하면서 학교에서 기기를 가져와서 측정해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 때 교수의 학생들은 서둘로 자신들의 교수를 찾아갔다. 다른 한편으로, 일본군이 비록 엄밀히 정보를 봉쇄했지만, 각종 소문이 빠르게 번져갔다. 1943년 2월 3일 <<국민일보>>는 앞장서서 이 일을 폭로한다. 23일 일본군은 여론에 밀려, 현장대사의 정수리뼈가 출토된 사실을 공표한다. 그리고 일본군의 고삼(高森) 부대는 왕정위정부에 이를 넘겨준다. 문화재를 넘겨줄 때, 일본측은 몰래 현장의 정수리뼈 일부를 남겨둔다.

 

현장의 정수리뼈사리는 아주 유명했으므로 각지역에서 모두 모시고자 했다. 1943년 12월 28일, 현장의 정수리뼈사리는 각각 나누어 모셔지는데, 3군데로 나누었다. 각각 남경, 북경과 일본에 모신다. 북경에서 받아간 것은 다시 4부분으로 나뉘었고, 일본에서 받아간 것도 재삼 나뉘었다.

 

현재, 현장의 사리는 남경 현장사, 남경 영곡사등 전세계 9개 장소에서 모셔지고 있다. 상대적으로 남경 구화산 현장사의 사리가 1943년에 모셔진후, 계속 삼장탑의 아래에서 움직인 적이 없어, 가장 완전하게 보존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