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큰 강들은 모두 서쪽에서 동쪽방향으로 횡단하며 흐르고 있다. 그리하여, 현대적인 육로교통수단이 나타나기 전에는 남북을 종단하는 수로운송이 아주 필요했다. 특히, 남북조의 분열시대를 마감하면서, 수나라가 전국통일을 이룬 이후에는 그 필요성이 더욱 커졌다. 당시, 수나라의 정치,군사중심은 북방이었다. 그러나 남방의 강회(강소,안휘)지구의 경제는 아주 큰 발전이 있었다. 북방도시는 물자, 특히 양식이 필요했는데, 많은 부분을 강회일대에 의존했다. 이 양식들을 어떻게 남방에서 북방으로 운송할 것인가하는 문제는 당히 통치자들이 반드시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였다. 대량의 물자를 강회에서 장안으로 운송하고 심지어 북방변방의 군사도시에까지 운송하려면, 어떤 운송방식을 채택해야 할까? 당시 육상운송은 겨우 말이나 당나귀가 끄는 마차나 혹은 사람들이 어깨로 지고 날라야 해서, 속도가 너무 느렸고, 운송량도 적었으며, 비용과 시간도 많이 들었다. 이것만으로는 당시 통치계급의 수요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 수로운송만이 이런 임무를 완성할 수 있었다. 그래서, 당시 운하를 건설하는 것은 시대의 요구였고, 역사의 필연이었다. 이것은 수양제라는 폭군이 한 폭정의 결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운하를 건설하려면 험난한 공사로 인하여 백성들에게는 재난이었따. 수양제는 강제로 수백만의 농민일 징용하여 운하를 파게 하였다. 이로써 생산활동은 큰 지장을 받게 되고, 수천수만의 농민들이 운하공사장에서 죽어갔다. 당나라말기의 시인인 한옥이 쓴 <<개하기(開河記)>>에는 운하를 파는 농민들의 비참한 생활을 잘 그리고 있다. 이 글에서, 수양제는 혹리 마권모를 파견하여 운하공사를 책임지게 하고, 천하의 15세이상의 남자를 모두 끌어모아서 360만명을 모은다. 동시에 5집에서 1사람씩을 뽑은데, 노인이거나 어린아아이거나 여인이었다. 이들은 농민공들의 취사를 담당했다. 수양제는 이외에 5만명의 험악한 남자들을 보내서 형벌을 담당하게 하였고, 공사를 감독하게 하였다. 노동부담이 너무 크고, 감독들이 심하게 다루었으므로 1년도 되지 않아 360만은 250만으로 줄었따.
중국역사상, 경항대운하(京杭大運河, 북경에서 항주까지의 대운하)의 건설은 대체로 3개의 시기를 거치게 된다.
제1시기 : 동주(東周) 춘추시대.
동남의 오나라 국왕인 부차(夫差)는 중원을 얻기 위하여 북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기원전 486년 장강의 물을 과주(瓜洲, 지금의 강소성 한강현-邗江縣- 남부)를 거처 북쪽의 회수(淮水)로 끌어들였다. 이것은 장강과 회수를 연결시키는 운하이며, 과주에서 말구(末口, 지금의 회안부근)까지 연결되었고, 당시 한구(邗溝)라고 불렀다. 이 운하는 경항대운하의 기원이고, 대운하의 최초의 물길이다. 나중에 진, 한, 위, 진과 남북조까지 이 물길은 존속한다.
제2시기 : 수나라.
6세기말에서 7세기초까지 대체로 한구를 기초로 너비를 넓히고, 곧게 만든다. 이리하여 운하의 중간구간이 되며 이름을 산양독(山陽瀆)이라고 부른다. 장강이남에는 강남운하를 완성하는데, 이것은 대운하의 남부구간이 된다. 실제로, 강남운하의 원형은 이미 존재했고, 일찌감치 조운에 활용되었다. "조(漕)"는 수로운송을 이용하여 쌀을 어떤 지점까지 운송한다는 의미이다. "조운"은 중국역사상 아주 중요한 경제제도이다. 지금의 용어로 말하자면, 수로를 이용하여 양식을 운송하는 일종의 전문운송이었다. 중국의 봉건왕조는 농민들에게 지조(地租)와 전부(田賦)를 받았고, 오랫동안, 실물로 징수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이런 왕조는 대부분 수도가 서북이나 북방에 있었으므로, 부근에서 생산되는 곡물만으로는 수도에서의 필요를 충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다른 지역에서 생산된 양식을 수도로 옮겨야 했고, 이거은 아주 중요한 정치적인 조치였으며, 봉건통치자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이 되었다. 이런 상황하에서 조운은 중국역사상 비교적 완비된 제도를 갖추게 되고, 상응하는 관리시스템을 갖추게 된다. 조운에 사용하는 배는 조선(漕船)이라고 한다. 조선에는 곡식, 쌀을 싣는데 이것은 조량(漕糧), 조미(漕米)라고 한다. 조선을 모는 군대나 민공을 조군(漕軍), 조정(漕丁), 조부(漕夫)라고 불렀다. 많은 왕조에 조운을 전담하는 관리가 있었다. 진한시대에도 중국사서에는 이미 조운에 대한 기재가 있다. 수나라때에 이르러 조운은 더욱 발전하게 된다.
수양제 양광은 605년 남북을 관통하는 대운하의 건설을 지시하게 된다. 이는 주로 통제거(通濟渠)와 영제거(永濟渠)를 건설하는 것이다. 황하남안의 통제거공사는 낙약부근에서 황하의 물을 끌어들여, 동남으로 흐르게 하고, 변수(하남성 개봉근처를 흐르던 강, 지금은 이미 말라서 존재하지 않음)로 들어가게 하였고, 황하와 회하의 두 강을 잇는 물길이 되었다. 광제거는 어하(御河)라고도 부르는데, 황하, 변수와 회하의 3개의 강물을 연결시킨 시작이었다. 수나라의 수도는 장안이었으므로, 당시의 주요 조운노선은 강남운하에서 경구(지금의 鎭江)에 도착하여 장강을 건너고, 다시 산양독을 따라 북상하였다가, 다시 광제거로 들어가고, 황하, 위하(渭河)를 거슬러 올라가서 최종적으로 장안까지 가는 것이다. 황하이북에 개설한 영제거는 심수(沁水), 기수(淇水), 위하(衛河)등의 강물을 수원으로 하여 물을 끌어들여 항해를 할 수 있게 하였다. 천진서북에서는 노구(蘆溝, 지금의 영정하)를 이용하여, 직접 탁군(涿郡, 지금의 북경)에 도달하는 운하이다.
아래에서는 수나라때 대운하를 건설한 몇 가지 중요한 공사에 대하여 언급하기로 한다.
첫째, 황하와 통하는 광통거(廣通渠). 수나라때 만든 중요한 운하는 장안에서 황하로 통하는 광통거이다. 수나라초때는 장안이 수도였다. 장안에서 황하로 이르는 물길은 두 개가 있다. 하나는 자연강물인 위수이고, 또 다른 하나는 한나라때 만든 인공강인 조거(漕渠)였다. 위수는 깊이가 얕고, 모래가 많으며, 강물이 구비져서, 항해하기에 불편했다. 동한때는 낙양으로 옮겼으므로, 조거는 수리를 하지 않아서, 일찌감치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수나라때는 할 수 없이 새로 물길을 파는 수밖에 없었다. 개황원년(581년) 수문제는 대장군 곽연(郭衍)을 조거대감으로 임명하고, 장안-황하간의 수운을 만드는 것을 책임지게 하였다. 그러나, 이때 완성한 부민거(富民渠)는 여전히 동부의 양식을 서부로 운송하는 수요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 3년후에 부득이 다시한번 개조공사를 하게 된다. 이번 개조공사는 물길을 더 깊고, 더 넓게 파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큰 배도 지나다닐 수 있게 하고자 하였다. 개조공사는 걸출한 공사전문가인 우문개(宇文愷)가 주재한다. 노동자들의 노력하에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그 해에 준공한다. 새로운 물길은 위수를 주요 수원으로 하여, 대흥성(서안시)에서 동관(潼關)에 이르는 300여리였고, 광통거라고 이름을 붙였다. 새로운 광통거는 운송량이 옛날 것보다 훨씬 많았고, 관중에 양식을 운송하는 것 외에도 많은 부유함을 가져다 주게 된다.
둘째, 강회와 통하는 어하의 개보수. 수양제가 즉위한 후, 정치중심은 장안에서 낙양으로 옮겨진다. 그리하여 황하, 회하, 장강간의 수상교통을 개선할 필요가 있었다. 이리하여 남부의 양식을 북으로 운송하고 동남지역을 통제하기 쉽도록 하고자 하였다. 대업원년(605년), 우문개로 하여금 동경낙양의 건설을 책임지게 한다. 매원 200만명이 투입된다. 동시에 상서우승 황보의에게 명하여, "하남회북 여러군의 남녀 100여만을 동웒여, 통제거를 파도록" 지시한다. 이외에, 회남의 농민 10만을 동원하여, 산양독을 확장공사하도록 한다. 공사규모의 크기와 범위가 넓음은 모두 유래가 없는 것이었다. 통제거는 동서 두 구간으로 나뉠 수 있는데, 서쪽구간은 동한때의 양구(陽溝)를 기초로 하여 팠다. 서로는 낙양서쪽에서 낙수(洛水) 및 그 지류인 곡수(谷水)를 수원으로 하여 낙양성남쪽을 통과하여 언사의 동남쪽에 이르고 다시 낙수를 따라 황하로 들어간다. 동쪽구간은 서로는 형양(熒陽) 서북의 항하변상의 판저(板渚)에서 시작하여, 황하를 수원으로 하여, 지금의 개봉시 밍 기현, 수현(睢縣), 영릉, 상구, 하읍, 영성등의 현을 지나, 다시 동남으로 지금의 안휘 숙현, 영벽, 사현을 지나고 다시 강소의 사홍현을 지나 우이(盱眙)현에 도달하여 회수로 들어간다. 두 구간의 길이는 거의 2000리에 이른다. 산양독은 북쪽은 회수남안의 산양(지금의 강소성 회안시)에서 시작하여, 곧바로 남쪽으로 향하여 강도(양주시)의 서쪽에서 장강과 만난다. 두 거(渠)는 모두 통일된 표준에 따라 건설하고, 양쪽에 버드나무를 심고, 어도(御道)를 건설한다. 연도에 이궁(離宮)을 40여채나 건설한다. 용주선(龍舟船)은 크기가 엄청났으므로, 어하는 반드시 깊게 파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운행할 수가 없었다. 통제거와 산양독의 건설과 정비는 함께 시작하여 동시에 진행되었다. 시공때 비록 기존의 구거와 자연하도를 최대한 이용하였지만, 통일된 너비와 깊이를 요했으므로 주로 인공으로 파내는데 의존했으므로, 공사량이 매우 많았다. 그러나, 시간은 아주 짧게 걸렸다. 3월에 착공하여, 8월에 완공한다. 수양제는 즉시 낙양에서 용주선을 타고 후비, 왕공, 백관을 데리고 강도로 남순한다. 이것은 고대 공사역사상 기적이다. 당연히 대가는 컸다. 공사과정에서 죽은 자가 많았던 것이다.
셋째, 북쪽의 탁군에 이르는 영제거이다. 통제거, 산양독을 완공한 이후, 수양제는 황하이북에 다시 대운하를 파기로 결정한다. 즉 영제거이다. 대업4년(608년) "하북여러 군의 남녀 백여만을 소집해서 영제거를 파도록 했다. 심수를 끌어들어 남으로 황하에 이르게 하고 북으로 탁군에 이르게 하였다" 영제거는 두 구간으로 나뉜다. 남쪽구간은 심하입구에서 북으로 가서 지금의 신향, 급현, 활현, 내황(이상 하남성), 위현, 대명, 관도, 임서, 청하(이상 하북성), 무성, 덕주(이상 산동), 오교, 동광, 남피, 창현, 청현(이상 하북성)을 거쳐 지금의 천진시에 이르는 길이다. 북쪽구간은 천진에서 서북으로 방향을 바꾸어, 천진의 무청, 하북의 안차를 거쳐 탁군에 도착하는 길이다. 남북양구간은 그해에 완성된다. 영제거는 통제거와 마찬가지로 넓고 깊은 운하였고, 기록에 의하면 길이가 1900리이다. 깊이가 얼마였는지 기록이 남아있지는 않지만, 대체로 보면 통제거와 비슷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역시 용주가 다닐 수 있는 물길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대업7년(611년), 수양제는 강도에서 용주를 타고 운하를 따라 북상한다. 인마와 배를 데리고 수륙의 두 길을 모두 가서 탁군에 도달한다. 도합 4000리에 이르는 여정이었다. 그럼에도 50여일을 썼으니 통항능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만하다.
넷째, 태호평원을 종단하는 강남하를 준설한다. 태호평원에는 운하를 만든 역사가 깊다. 춘추시대 오나라는 도성인 오(소주시)를 중심으로 여러개의 운하를 팠다. 그 중의 하나가 북으로 장강에 이어지는 것이고, 하나가 남으로 전당강에 이어지는 것이다. 이 두 개의 남북방향의 인공수로는 최초의 강남하이다. 이 강남하는 진한, 삼국, 양진, 남북조때 여러차례 정비를 거치고, 수양제때 다시 한번 준설하게 된다.
광통거, 통제거, 산양독(수양제는 후 양자를 합쳐서 어하라고 한다), 영제거와 강남하는 비록 서로 다른 시기에 건설되었고, 각자 독립한 운수수로였다. 그러나, 이 물길은 모두 정치중심 장안, 낙양을 핵심으로 하여, 동남, 동북으로 퍼져나가서, 완전한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동시에 규격이 기본적으로 일치하여, 용주와 방주가 운행할 수 있게 되었고, 서로 연결이 되었다. 그래서 또 하나의 대운하를 이루는 것이다. 장안, 낙양에서 동남으로 항주까지, 동북으로 북경까지 이르는 대운하는 역사상 가장 긴 운하이다. 이것은 전당강, 장강, 회하, 황하, 해하의 5대수역을 통과하여 국가의 통일에 기여하고 남북의 경제문화교류에도 공헌한다.
제3시기: 원명시기
원나라는 대도(북경)에 수도를 정한 후, 강소절강일대의 곡식을 대도까지 운송하게 된다. 그러나, 수나라때의 대운하는 해하와 회하의 중간구간이 낙양을 중심으로 동북과 동남으로 펼처져 있었다. 낙양을 돌아오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직선화공사를 하게 된다. 원나라는 그리하여, 제주, 회통, 통혜등의 수로를 만든다. 명,청양대에는 다시 대운하의 많은 구간을 개조한다. 아래에서는 원나라때 개설한 운하여 몇가지 중요한 공사를 설명하기로 한다.
첫째, 제주하(濟州河)와 회통하(會通河)의 건설
원나라의 수도 대도(북경시)에서 동남의 곡창지대까지 연결된다. 대부분의 지방은 수로로 통하고, 그저 대도와 통주의 사이, 임청과 제주의 사이에 편리한 수로가 없거나 기존 수로가 막혀 있었다. 그래서 남북수로관통의 관건은 이 두 곳에 인공수로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임창과 제주사이의 운하는 원나라때 두 단계로 나누어 진행된다. 먼저 제주하를 파고, 다시 회통하를 팠다. 제주하는 남으로 제주(제녕) 남쪽의 노교진에서 북으로 수성(지금의 동평현)의 안산까지 150리이다. 사람들은 유리한 자연조건을 잘 활용하였다. 문수와 사수를 수원으로 하고, 갑문을 만들고 물길을 팠다. 회통하는 남으로 수성의 안산에서 제주하와 이어지고 북으로 파나간다. 요성을 거쳐 임청에서 위하와 만난다. 길이는 250리이다. 이것은 제주하와 마찬가지로 강위에 많은 갑문을 만들었다. 이 두 구간을 판 후에 남쪽의 양식배는 위하, 백하를 거처 통주에 이를 수 있게 된다.
둘째, 패하와 통혜하(通惠河)의 건설
옛날의 하도는 통항늘역이 적어서, 원나라때 대도와 통주간에 운송능력이 큰 물길을 팔 필요가 있었다. 이리하여 통주에 집중된 양식을 북경까지 옮겨야 했다. 그래서 패하와 통혜하를 이어서 파게 된다. 먼저 만든 것은 패하이다. 서로는 대도 광희문에서 동으로 통주성북쪽까지가서 온유하에 이러진다. 이 수로는 20여킬로미터이다. 지세는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다. 차이는 20미터 정도이다. 하도의 높낮이가 컸다. 강물을 보준하기 위하여 하도에 7개의 갑문을 만들었다. 그래서 이 운하를 패하라고 불렀다. 나중에 패하는 수원이 부족하여 원나라때 다시 통혜하를 판다. 이번 공사의 책임자는 곽수경(郭守敬)이었다. 먼저 수원을 개발하여 적수담에 모으고, 다시 적수담에서 동으로 물길을 건설한다. 황성동쪽에서 남으로 흐르고 동남으로 문명문에 이르며 동으로는 통주에서 조백하에 이어진다. 이 새로운 인공수로는 쿠빌라이에 의하여 통혜하라고 이름지어진다. 통혜하가 건설된 후 적수담은 번화한 항구가 된다.
원나라때 몇 개의 중대한 공사가 완공된 후, 오늘날의 경항대운하는 그 모습을 갖추게 된다. 전체 길이 1700여리이다. 경항대운하는 수나라때의 남북대운하의 적지 않은 구간을 활용하였다. 만일 북경세서 항주까지 운하로 운송한다면, 전자는 후자에 비하여 900여리를 단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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