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줄 왼쪽에서 네번째가 모택동, 앞줄 왼쪽에서 두번째가 도사영
최근 CCTV 채널1에서 방영한 모택동, 채화삼(蔡和森)등 초기 혁명가들의 청년시대를 그린 연속극 <<흡동학소년(恰同學少年)>>을 보면, 극중에 모택동과 도사영의 사랑이야기가 사람의 눈길을 끈다.
모택동의 첫사랑인 여인은 이름이 도의(陶毅)이고, 자는 사영(斯詠)이며, 호남 상담(湘潭) 사람이다(당시 집안은 모두 장사로 이사했었다). 그녀는 부유한 상인집안의 아가씨로서 주남여중(周南女中)을 졸업했으며, 당시 "강남이남제일재녀(江南以南第一才女)"라는 칭호를 받고 있었다. 그녀는 1920년대 장사의 학계에 풍운인물이었다. 호남학생연합회와 호남각계연합회에서 그녀는 모두 부회장을 맡았다. 이 당시 모택동은 그저 이사직을 맡았을 뿐이다. 소자승(蕭子昇), 이례용(易禮容)등의 기억에 의하면, 모두 도의를 장사의 유명한 미녀로, 키도 크고, 재주도 뛰어났으며, 성격도 아주 강했었다고 한다.
그녀는 모택동과 여러번 만나고 헤어지기를 거듭하였으나, 두 사람은 모두 개성이 강하여, 결국 합치지 못하고 헤어지고 말았다. 도의는 평생 이 한번의 사랑뿐이었으며 이후 다시 연애를 하지도 않았고, 결혼도 하지 않았다.
1919년에서 1920년 두 사람은 장사에서 함께 "문화서점(文化書店)"을 열었고, 열렬한 사랑에 빠진 적이 있다. 그러나, 한 사람은 혁명을 꿈꾸던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그렇지 않았다. 결국 두 사람은 헤어진다. 도사영은 신민학회의 <<통신집>>에서 볼 수 있다. 거기서 쓴 이름은 도의이다. 그녀는 향경여(向警予), 임배도(任培道)와 함께 "삼자매"로 불리웠으며, 동시에 양창제 선생의 추천으로 신민학회에 가입한다. 그녀는 미녀이며 재녀일 뿐아니라, 담도 컸으며, 얼굴을 드러내고, 일처리도 깔끔하게 하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모택동과 그녀는 사상과 신념이 달라 결국 헤어지게 된다. 모택동의 첫째부인인 양개혜는 모택동이 도사영과 헤어진후 다시 북경으로 가서 만난 것이다.
도사영은 평생 여성교육에 힘쓴다. 그녀는 상해, 장사등지에서 여학교를 세우고, 정령(丁玲)등 적지 않은 제자들을 기른다.
주남여고에서는 향경여, 도의 및 채창(蔡暢)을 "주남삼걸(周南三杰)"이라고 부른다. 졸업후 향경여는 고향인 서포에서 학교를 열었고, 그녀는 주남여고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한다. 그녀가 일이 있어 장사로 올때면 당시 주남여고에서 기숙사 사감을 맡고 있던 도의를 찾아갔다. 1918년 9월, 채창은 향경여에게 장사로 와서 여자프랑스유학준비학교를 세우자고 한다. 향경여는 바로 동의하고 서포를 떠나 장사로 온다. 오래지 않아. 그녀는 도의와 함께 신민학회에 가입하고 이 학회의 첫번째 여회원들이 된다.
모택동과 도의는 같은 상담사람이지만, 집안환경이 너무 차이났다. 도씨집안은 상담일대의 부자집안이었고, 도의는 모택동과 사귀는데 대하여 집안의 반대가 컸다. 결과적으로 여자측 집안의 반대는 두 사람의 관계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게 하였다.
모택동과 도의가 헤어진 후에도 우정은 지속되었다. 1920년 7월, 모택동이 문화서사를 만들 때, 도의는 주요한 투자자의 한 사람이었다(당시 은원10위안을 낸 3명중 한 명이었음). 같은 해 10월, 모택동이 호남혁명정부가 호남인민헌법회의를 소집하여 호남헌법을 만들자고 주장하였을 때, 도의는 찬동한 사람중의 하나였다. 모택동이 도의와 헤어진 후, 호남성학생연합회의 주석인 팽황(彭璜)은 아주 미친 듯이 도사영을 쫓아다녔지만, 도사영은 그를 거절했다. 그녀는 1931년 장사에서 병으로 사망한다. 이 때 그녀의 나이 35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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