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민국기녀자)

남조운자(南造雲子) : 장개석을 암살하려한 일본여간첩

중은우시 2007. 3. 2. 11:49

남조운자는 천도방자(川島芳子)와 나란히 이름을 떨친 일본의 유명한 여간첩이다. 그녀는 두번에 걸친 장개석 암살시도, 국민당 고관매수, 오송구요새의 군사정보 취득등은 모두 이 "제국지화(帝國之花)"라는 이 여인의 손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그녀는 행적이 비밀스러웠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그녀의 사진 한장 찾기가 힘들다.

 

남조운자는 1909년 상해에서 태어났다. 집은 홍구 일본조계의 횡빈로였다. 부친인 남조차랑(南造次郞)은 일본간첩출신이었다. 공개된 신분은 일어학교의 교사였다.그는 중국말을 유려하게 하였고, 특히 상해말에도 능통했다. 남조차랑은 일본의 "흑룡회"에 가입하였으며, 군국주의로 물들어 있었다. 남조운자는 어려서분 부친의 일본군국주의사상의 영향을 깊이 받았으며, 중국인을 무시했고, 대화민족이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민족이라고 생각했다. 13세때 일본 고베의 한 특공학교(特工學校)로 보내어지고, 거기서 특무조직의 우두머리인 토비원현이(土肥原賢二)를 스승으로 모신다. 문화와 외국어(한어, 영어등)를 배우는 외에, 사격, 폭파, 화장, 독살등의 전문기술을 익힌다.

 

1926년, 남조운자가 17세가 되면서 다시 중국 대련으로 파견되고, 간첩활동에 전문적으로 종사하게 된다. 1929년에는 대련에서 남경으로 전보되어 이름은 요아권(廖雅權)으로 하여, 청년학생의 신분으로 국민당국방부의 초대소인 탕산진 온천초대소에 직원으로 들어가서 간첩활동을 한다.

 

탕산온천초대소(湯山溫泉招待所)는 국민당의 국제부에서 돈을 내서 만든 것이다. 국민당 군사지도자들은 자주 이 곳에서 비밀군사회의를 개최했다. 그리하여 일본특무기관은 일찌감치 탕산을 주시하고 있었다. 남조운자를 보내어 온천초대소로 잠입하게 한 것은 군사정보를 획득하기 위한 것이었다. 남조운자는 예쁘게 생겨서 사람들이 좋아했고,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추었으며, 사람들과 교제하는 수완이 좋았다. 그녀는 미색을 이용하여 국민당군대의 장교들을 유혹했으며, 힘들이지 않고 여러가지 중요한 군사정보를 취득할 수 있었다. 그중 하나는 오송구요새사령부가 국방부에 보고한 포대군사설비확장의 건이었다. 안에는 포대의 위치, 포병의 분포상황, 비밀지하통로의 배치, 70여개의 초소의 분포위치등 중요한 군사기밀이 담겨 있었다. 남조운자는 또한 그녀의 동료와 함께 화동지구 국민당군대의 벙어배치현황을 대량 수집하고, 대량의 군사정보를 모은다. 군사설비, 군항, 병참, 공항을 몰래 찍은 사진만 천여장에 달하였다. 이런 정보는 계속 상해 홍구의 일본특무기관으로 보내졌고, 일본군의 중국침략전쟁에서 중요한 작용을 하였다.

 

남조운자는 금방 일본간첩중 중요인물로 떠오른다. 일본군부는 중요하거나 특수한 임무가 있으면 그녀를 보내어 해결했다. 1933년을 전후하여 남조운자는 국민당 원로이며 고시원 원장인 대계도(戴季陶)와 관계를 맺는다. 두 사람은 아주 친밀해진다. 1936년 중외를 놀라게한 '서안사변'이 발발하여, 장학령와 양호성이 병간을 실시하고 장개석을 핍박하여 항일하도록 하였다. 여러 국민당원로등 중에서 오직 대계도만이 친일파두목 하응흠의 "반역자 토벌, 서안폭격"을 주장하는데, 대계도가 이런 입장을 취한 것도 아마 남조운자와 관계있을 것이다.

 

일본군의 남경진공을 도우기 위하여, 1937년 7월 중순, 남조운자는 중국은행의 직원으로 변장하고, 난민에 섞여 남경에 잠입하였다. 그녀는 각종 관계를 동원하여, 금방 생활이 문란했던 국민당정부 행정원 주임비서 황준(黃浚)은 그녀의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남조운자를 위하여 일하기로 한다. 이리하여 그와 외교부 부과장 황성(黃晟, 황준의 아들)은 일본의 간첩으로 끌어들여졌고, 국군참모본부, 해군부와 군정부에 걸치는 간첩망을 결성하였다.

 

1937년 7월 28일, 장개석은 남경 중산릉에서 최고국방회의를 주재한다. 그리고 "이쾌제쾌(以快制快, 빠르기로 빠르기를 제압한다)", "제승기선(制勝機先, 기선을 제압한다)"는 방침을 결정한다. 일본 관동군과 일본군 기타부대의 행동이 아직 통일되지 않은 것을 기화로 일본군의 대부대가 장강유역으로 대규모진격시, 장강하류의 강물이 가장 좁은 강음(江陰)의 수역에서 강가운에 배를 침몰시키고, 항로를 막고, 다시 해군함정과 양안의 포활르 이용하여 장강의 항로를 절단하려는 것이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한편으로는 일본선박이 장강을 따라 서진하는 것을 막고, 다른 한편으로는 장강중상유의 구강, 무한, 의창, 중경 일대의 70여척의 일본군함과 6000여명의 일본해군육전대대원들을 포위섬멸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회의는 고급기밀에 속했으므로, 시종실의 비서인 진포뢰와 행정원주임비서인 황준이 기록을 담당했다. 황준은 회의상에서 장개석의 이 군사배치를 듣고는, 온 몸에 식은 땀을 흘렸다. 회의후, 그는 즉시 이 극비정보를 남조운자에게 얘기한다. 교활한 남조운자는 상황이 긴급한 것을 알고는 황급히 정보를 일본대사관의 무관인 중촌(中村, 나카무라) 소장에게 알리고, 그로 하여금 직접 비밀전보로 동경에 보고하게 한다.

 

결과적으로 일본의 해군육전대가 한발 앞서서 밤을 세워 동진한다. 장개석의 명령이 막 하달되고, 강음요새의 장강수면봉쇄를 막 시작하기 전에 장강중상류에 있던 모든 일본군함과 상선은 8월6일, 8월7일의 이틀간 전부 전속력으로 항해하여, 강음의 강수면을 빠져나오고 장강입구까지 철수한다. 일본교민도 배를 타고 철수한다. 강음요새를 봉쇄하려던 군사계획인 이렇게 무산되었다.

 

항전초기, 일본정부는 장개석과 국민정부를 제압하기 위하여, 중국에 잠복한 일본간첩으로 하여금 암살의 창끝을 장개석에게 겨누게 하였다.

 

"8.13"항전이 폭발하기 전날, 장개석은 돌연 중안군관학교에 지시하여 "총리기념주간확대"활동을 거행하였고, 참석인원이 줄을 맞추어 장개석이 나와 연설하기를 기다리고 있을때, 당직관리인 혜제(惠濟)는 사람들에게 의심스러운 분자가 군관학교에 들어와서 현재 수사중이라고 공표했다. 원래는 두 명의 일본간첩이 자동차를 타고 군관학교에 잠입했으며, 정보를 수집하고 장개석 또는 기타 군정요원을 암살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발견되자, 즉시 자동차를 타고 도망쳤다. 이후 암살시도자를 찾지 못하여 이 사건은 미결사건으로 남았다.

 

몇번 괴이한 일들이 발생하였으나 모두 정부당국의 주의를 많이 끌지는 못했다. 오래지 않아, "8.13"송호항전이 발발한다. 상해와 남경은 아주 가까워 장개석은 여러번 상해의 전선을 시찰하고 작전을 지휘하고자 준비했다. 그러나, 남경-상해간의 철로와 도로가 일본군비행기의 봉쇄와 폭격을 받아 안전하지 못하여 계속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8월 25일, 장개석이 소집한 최고군사회의에서 부참모총장인 백숭희는 장개석에게 이렇게 건의한다. 다음 날, 영국주중국대사가 남경에서 상해로 가서 일본주중국대사 천월무(川越茂)를 만날 예정이며, 그의 차량을 타고 같이 가면 어떻겠느냐고 한다. 당시 영국은 중립국이었으므로 일본군의 비행기공습은 피할 수 있었다. 장개석은 이에 대하여 동의하였다. 그러나, 황준이 마침 이 회의에 있었다. 이후 황준은 즉시 남조운자에 이 정보를 알린다.

 

다음 날, 장개석은 급한 일로 인하여, 상해로 가는 계획을 잠시 보류했다. 결과적으로, 영국대사의 자동차는 가정지구 상해-남경도로상에서 두 대의 일본군 비행기의 추격습격을 받아, 자동차가 전복되고, 영국대사는 골절상을 입고, 간에 총알이 박혔으며, 생명이 위급하게 되었다. 수행인원들이 급히 영국대사의 상처를 싸매고 지혈시켜, 차에 태워 호서굉은의원 응급실로 보냈다.

 

사건발생후, 세상은 깜짝 놀랐다. 이것은 남조운자가 활동할 이래 최대의 실패작이었다.

 

연속 몇번이나 최고군사회의의 기밀이 새어나가자, 장개석은 일본간첩이 중추부서에 잠입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그는 비밀명령을 내려 헌병사령관 곡정륜(谷正倫)으로 하여금 내부조사를 시켰고, 기한을 주고 사건을 해결하라고 하였다.

 

사건수사팀의 분석에 따르면, 위의 몇 차례의 기밀누설은 최고군사회의의 내용이고, 회의에 참가한 몇 몇 고급군정요원을 제외하고는 진포뢰와 황준이 기록을 담당하였다. 황준은 평소에 생활이 방탕하였고, 일본인과 내왕이 있어서 혐의를 짙게 받았다. 오래지 앟아, 헌병은 또 "중앙군관학교 장개석암살사건"을 조사하였는데, 두 명의 일본특무가 타고 들어온 차량이 바로 황준의 차량이었다. 사건의 진상이 드러난 것이다. 전과를 확대하기 위하여, 곡정륜은 황준의 집안에서 일하는 여자인 연화를 시켜 황준의 행동을 감시하도록 했다.

 

하루는, 연화가 비밀리에 보고하였는데, 황준의 운전사가 외부에서 돌아온 후 직접 황준을 찾았다고 하며, 그리고 모자 하나를 그에게 주었다고 한다. 곡정륜은 즉시 특공들을 시켜 운전기사를 감시하게 하였다. 다음 날, 특공은 운전기사를 쫓아 "국제커피관"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운전기사가 모자를 벽쪽의 모자걸이에 걸어놓는 것을 보았고, 그 다음에 탁자 하나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는 것을 보았다. 특공은 이미 모자걸이에 운전기사가 걸어둔 모자와 모양과 색깔이 완전히 동일한 모자가 하나 걸려있는 것에 주의했다.

 

얼마되지 않아, 커피를 마시던 일본인이 자기자리를 떠나, 벽쪽의 모자걸이 앞으로 갔고, 손을 뻣어 황준의 운전기사가 걸어둔 모자를 가지고는 문을 나섰다. 이 사람은 일본대사관의 관리인 소하(小河)였다. 이 모든 것은 특공의 눈을 벗어나지 못했다.

 

하루가 지나고, 소하는 모자를 쓰고 자전거를 타고 다시 커피관으로 갔다. 도중에 돌연 다른 자전거를 탄 사람이 그를 부딛쳐 땅에 쓰러지게 하였다. 소하는 머리가 깨져서 피가 흘렀고, 모자도 한쪽에 떨어져 있었다. 주변의 몇몇 마음씨 좋은 지나가는 사람들이 발견한 후 어떤 사람은 기사를 경찰서로 보내고, 어떤 사람은 자동차를 잡아서 소하를 차속에 밀어넣고 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사실, 이 자전거사고를 일으킨 자와 지나가던 사람은 모두 군통소속의 특공들이었다.

 

특공은 모자를 주워서 조사했는데, 그 안에는 일본대사인 수마미길랑(須磨彌吉郞)이 황준에게 보내는 지령이 있었는데, 미리 준비했던 가짜 편지와 교환하였는데, 내용은 이러했다: "수마가 황준에게 지시한다. 내일 밤 11시, 간첩집단인원을 황준의 집에 모아라, 수마가 친히 장려금을 지급할 것이다"

 

특공은 자전거를 타고 커피관으로 갔다. 이미 동일한 생깔과 모양의 모자가 모자걸이에 걸려있는 것을 보았다. 손을 뻣어 모자를 바꾼 후 문을 나섰다. 돌아와서 보니, 모자안에는 황준이 수마에게 제공하는 정보가 들어 있었다.

 

곡정륜은 이 보고를 받은 후 즉시 장개석에게 보고했고, 장개석은 즉시 다음날의 야간조치를 지시했으며, 비밀리에 황준등 간첩일당을 체로하도록 하였다.

 

다음 날 밤, 특공인원은 미리 정한 방안대로 각종 신분의 인물로 위장하고, 예정된 위치를 찾아갔다. 밤 11시, 황준의 집의 이층에는 손전등이 3번 깜박였다. 이것은 연화가 보낸 신호였다. 황준 일당이 모두 안에 모여 있다는 것이다.

 

잠시후, 우체부로 변장한 특공이 특급우편이 도착했다는 핑계로 문을 두드렸다. 문이 열리자 여러 특공들이 물밀듯이 밀고 들어가서 객실을 장악했다. "움직이지 마라. 움직이면 죽는다"

 

심문과정에서 황준은 자신의 죄행을 모두 사실대로 자백했다. 군사법정의 재판을 거쳐, 매국죄로 황준부자는 사형을 받고 공개처형된다. 남조운자에게는 무기징역을 내리고, 다른 구성원들에게는 유기징역을 내린다.

 

원래, 국제관례에 따르면, 전시에 적국의 간첩을 잡으면 삼일내에 처결하는 것이다. 국민정부당국은 이마도 일본측을 견제하기 위하여 남조운자에게 사형을 내리지 않았다. 황준 부자가 처결된 후, 남조운자는 남경의 노호교중앙감옥에 갇힌다. 몇 개월후, 일본군이 남경으로 진공하고, 남조운자는 과거의 수완을 동원하여, 간수를 설복하여, 감옥에서 탈출한다. 신분이 이미 폭로되었으르모, 국민당통치지역에는 감히 다시 들어가지 못하고, 상해에서 계속 간첩활동을 진행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후, 남조운자는 상해의 일본군특무기관에서 특1과과장을 맡아 자주 영국, 프랑스 조계지역을 드나들었다. 그리고 많은 항일지사를 체포했으며, 군통이 남긴 십여개의 연락소를 적발했고, 수십명의 군통 특공인원을 체포했다. 정묵촌(丁默村), 이사군(李士群)을 두목으로 한 왕정위의 특공총부도 그녀에 의하여 건립되었다. 국민정부 정보부서는 그녀에 대한 한이 뼈에 사무쳤다. 여러번 암살행동을 취했으나, 그녀는 너무 교활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942년 4월의 하루 저녁, 남조운자는 단독으로 차를 몰아 외부로 나갔고, 군통의 특공에 발견되어, 신속히 비밀리에 추적을 개시했다. 마침내 프랑스조계의 하비로(霞飛路, 지금의 상해 회해중로)의 백락문커피점부근으로 갔다. 중국식 치파오를 입은 남조운자는 차에서 내려 가게문으로 들어갈 때, 3명의 군통 특공의 권총이 동시에 발사되었다. 남조운자는 세 발을 몸에 맞았고, 즉시 계단에 쓰러졌다. 일본헌병에 의하여 의원으로 후송되던 중에 사망한다. 향년 33세이다. 이 "제국의 꽃"은 이렇게 죽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