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민국기녀자)

민국재녀(民國才女) 여벽성(呂碧城)

중은우시 2006. 11. 21. 19:56

 

여벽성(1883-1943)은 안휘 정덕 사람이다. 1884년에 태어났다. 원명은 난청(蘭淸)이다

부친은 여봉기(呂鳳岐)이며, 광서3년에 진사에 급제하였다. 청나라 말의 유명한 시인 번증상과 같은해에 급제하였다. 일찌기 산서학정을 맡은 바 있다.

여봉기에게는 딸이 넷 있었고, 여벽성은 셋째 딸이었다. 여벽성과 그녀의 언니들인 여혜여(呂惠如), 여미손(呂美蓀)은 모두 시로 이름이 있었고, "회남삼여(淮南三呂)"라고 불리웠다.

 

여벽성이 12살이 되던 때, 시사서화에 대한 조예가 이미 상당한 수준에 달하였다. 당시 '재자'로 이름있던 번증상은 여벽성의 시사를 읽은 후, 감탄을 금치 못했다. 다른 사람이 작자가 12살된 여자라고 하자, 그는 놀라고 믿지 않았을 정도였다.

 

1895년 부친 여봉기가 세상을 떠난다, 여벽성의 모친은 북경에서 재산을 처리하는데, 친척들은 그들의 재산을 호시탐탐 노렸다. 여벽성은 북경에서 이 소식을 듣고 부친의 친구, 학생들에게 부탁하여 몇번의 곡절을 거쳐 원만히 해결된다. 이 일은 어린 여벽성에게 남다른 담량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이 일은 여벽성과 혼약이 있던 왕(汪)씨집안 사람들에게 경계심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여자가 자기 집안에 들어와서 집안을 뒤흔들 것을 우려해서 파혼을 요청한다. 여벽성의 모친과 여벽성은 어쩔 수 없이 파혼을 받아들인다. 당시의 여자에게 파혼은 커다란 치욕이었다. 여벽성은 비록 신여성이었지만, 이때의 아픈 기억은 아마도 이후 그녀의 생애와 혼인에 대한 관념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혼약이 파기된 후, 여벽성은 모친을 따라 천진에서 염운사를 하던 외삼촌 엄봉생의 집으로 간다.1903년 봄, 20세의 여벽성은 천진시내에서 여학교를 다니려고 찾아다닌다. 그러나, 외삼촌인 엄봉생은 여벽성을 크게 꾸짖게 되고, 여벽성은 이 때 집을 나선다. 여비나 행장도 수습하지 않은 상태였다. 몸에 돈한푼없던 여벽성은 천진으로 가는 기차속에서 불조루여관의 여주인을 만나서 천진에 간 후 그 집에 잠시 머문다. 여벽성은 <<대공보>>의 방부인에게 서신을 보내고 이 서신을 <<대공보>>의 사장 영렴지가 보게 된다. 영렴은 이 서신을 보고 여벽성의 글재주를 알아본다. 그래서 영렴지는 그녀를 찾아 견습편집인으로 초청한다. 여벽성이 대공보에서 일한지 몇 개월이 지나지 않아. 그녀는 대공보에 그녀의 시사작품을 발표한다. 시사계의 호평을 받는다. 그리고, 그녀는 여성해방과 여성교육에 관한 글들도 많이 써서 많은 호응을 받는다. 여벽성은 이로써 문단에 명성을 날리게 되며, 많은 신여성들이 앙모하고 존경하는 대상이 된다.

 

1908년 자희태후가 죽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불안해하였다. 그러나 여벽성은 <<백자령>>을 써서 자희태후를 통박하는 글을 대공보에 올린다. 이 글은 청나라 정부를 골치아프게 하였다. 여벽성은 1904년에서 1908년까지 대공보에서 일하면서 여권신장, 부녀해방에 관련된 많은 글과 시사를 발표하여, 당시 부녀운동의 대표적인 인물이 된다.

 

1904년에는 여성혁명가 추근(秋瑾)과도 교분을 가진다. 추근은 북경에서 천진으로 가서 여벽성을 바ㅇ문하고, 두 사람은 만난지 4일도 되지 않아 누구보다 가까운 친구가 된다. 추근도 일찌기 벽성이라는 호를 썼었는데, 여벽성을 만난 이후로 벽성이라는 호를 버린다. 1907년봄에 추근이 주편으로 하는<<중국녀보>>를 상해에서 창간하는데, 창간사를 여벽성이 써준다. 1907년 7월 15일 추근이 소흥에서 희생되고, 여벽성은 영문으로 <<혁명여협추근전>>을 써서, 미국 뉴욕, 시카고 등지의 신문에 발표한다.

 

대공보에서 여권신장, 부녀해방운동을 하는 외에 학교를 세우기도 한다. 여벽성은 1904년 9월에 북양여자공학(北洋女子公學)을 건립하고, 여벽성이 총교습이 된다. 이년후 북양여자공학은 북양여자사범학당으로 개칭되며 나이 겨우 23세의 여벽성이 감독(監督, 현재의 총장)이 된다.그녀는 이 학교에서 7, 8년을 일한다. 주은래의 부인인 등영초도 한 때 이 학교에서 여벽성에게 강의를 들었다.

 

1912년 원세개가 북경에서 민국임시대총통에 오를 때, 여벽성을 총통부 비서로 초빙한다. 그녀는 자기의 포부를 펼칠 생각으로 갔었지만, 관료사회에 많이 실망한다. 1915년 원세개가 황제에 오를 때 여벽성은 관직을 사직하고 북경을 떠나 상해로 간다. 그리고, 외국인투자자와 무역회사를 벌여 2,3년간 많은 돈을 번다. 그녀는 학문뿐 아니라 경제적인 두뇌도 있었던 것같다.

 

1918년 여벽성은 미국으로 가서 컬럼비아대학에서 문학과 미술을 공부한다. 그러면서 상해 <<시보>>의 특약기자로도 활약한다. 4년후에 귀국한다. 1926년에는 다시 출국하여 7년가량을 유럽과 미국에 머문다. 이 때 보고 들은 것을 <<구미만유록>>으로 써서 북경의 <<순천시보>>와 상해의 <<반월>>잡지에 기고한다. 그녀의 시사는 아주 평이 좋아 "근300년래의 최후의 여사인"으로 칭송된다.

 

1928년 그녀는 세계동물보호협회에 가입하고, 중국동물보호협회를 창립한다. 그녀는 평생 결혼하지 않았으며, 1930년에 불문에 귀의한다. 1943년에 홍콩 구룡에서 세상을 떠난다.

 

그녀는 아쉽게도 오사운동에 참가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은 그녀의 재주라면 오사운동에 참여하여 백화문으로 창작하였더라면 아마도 신문학사상의 다른 몇몇 여성작가들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었을 것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