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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민국기녀자)

양종계(梁從誡) : 나의 어머니 임휘인(林徽因)에 대한 추억

by 중은우시 2006. 6. 27.

모친이 돌아가신지 이미 32년이 되었다. 현재 그녀을 위하여 이러한 자그마한 문집...그녀의 유일한 책...을 낼 수 있다는 것은 나에게 위안이면서, 또한 감상에 빠져들게 한다.

 

오늘 날, 독서계에서 그녀를 기억하는 사람은 이미 많지 않다. 나이든 분들은, 자주 30년대의 다재다능하고 아름다웠던 여시인으로 얘기한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 그녀는 얼굴이 말라 수척했던 병자였고, 자신을 잊고 살던 학자였으며, 어른들의 평등한 우애로써 아이들에 대한 사랑을 대신했던(때로는 조급한 성격이 폭발했지만) 모친이었다.

 

30년대의 그 여시인은 당연히 존재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나는 알지도, 기억하지도 못한다. 그 시대의 모친은 내가 나중에야 약간씩 이해하게 되었다. 그 때의 생활과 일들은, 그녀가 나와 누나 재빙(再氷)이 큰 후에 우리들에게 얘기한 바 있으나, 자주 말해주지는 않았다. 모친의 후반생은 병마에 시달렸지만, 정신적으로나 일에 있어서는 그녀는 항상 새로운 것을 추구했고, 감상적인 정서를 가진 적은 거의 없었다. 지금에 와서 어떤 글들에서 언급하는 반세기이전의 문단의 옛일들에 대하여 나는 평론할 자격이 없다. 다만, 나는 모친이 당시에 나에게 친히 말씀해주었던 일, 그리고 내가 직접 알게 된 일부 상황을 이 때의 문학사에 관심있는 사람들에게 말해주어야 한다는 책임을 느낀다. 아마도 이것들이 그러한 소문이나 억측들보다는 더욱 의미있을 것이다.

 

어려서 나의 외조부 임장민(林長民)의 관료집안에는, 여러 자매가 모두 시문을 지을 줄 알고, 서예에 뛰어났었다. 외조부는 일찌기 일본에 유학하였었고, 영어도 잘했으며, 당시의 신식인물이었다. 다만, 외조부와 외조모의 결혼은 집안에서 정해준 불행한 결합이었다. 외조모는 비록 용모단정하였으나, 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고, 글자를 모르던 구식 여자였다. 돈있던 상인집안 출신이어서, 여자로서 할 일들을 잘하지 못하였고, 그래서 남편으로부터도, 시어머니로부터도 사랑받지 못하였다. 결혼후 8년만에, 첫번째 아이를 낳았다. 아름답고 총명한 여자아이였다. 이 딸은 비록 모든 집안의 사랑을 듬뿍받았지만, 외조모의 처지는 좋아지지 않았다. 외조부는 얼마되지 않아 첩을 두었고, 외조모는 이때부터 더욱 냉대를 받게 된다. 실제로는 남편과 별거하는 외로운 생활을 지낸다. 모친은 어려서부터 이러한 가정의 갈등속에서 자랐으며, 이로 인하여 자주 괴로워하고 슬퍼하였다.

 

어려서의 처지는 모친의 나중의 성격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녀는 부친을 사랑했으나, 부친이 외조모에 대하여 무정한 것을 미워했고, 그녀는 자기의 모친을 사랑했으나, 모친이 못난 점을 미워했다. 그녀는 큰딸의 입장에서 여러 동부이모의 동생들을 사랑했으나, 반봉건가정에서의 왜곡된 인간관계는 정신적으로 그녀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다. 아마도 이러한 모든 것이, 그녀가 나중의 일생에서 삼종사덕식의 온순함을 보여주지 못하고, 계속하여 인격적인 독립과 자유를 추구하는 원인이 되었던 것같다.

 

소녀때, 모친은 몇몇 사촌자매들과 함께, 상해와 북경의 교회여자학교에서 공부한 바 있고, 거기에서 외국선생으로부터 상당히 유창한 영어를 배웠다. 1920년, 외조부가 북양정부에서 배척을 받고, 강제로 "출국고찰"을 하게 되었을 때, 16살이었던 모친을 데리고 가기로 결정한다. 이 유럽여행에 대하여 내가 아는 것은 매우 적다. 단지, 그들이 런던에 머물렀고, 동시에 대륙의 일부 국가를 여행하였다는 것을 안다. 모친은 런던의 여자학교에 입학하여 잠시 공부한 적이 있었다.

 

영국으로 가기 전에, 모친은 이미 당시 막 "청화학당"에 입학했던 부친을 알았다. 영국에서 돌아오자, 그들의 왕래는 더욱 많아졌다. 나의 조부였던 양계초와 외조부를 볼 때, 그들의 결혼은 아주 격에 맞는 것이었다. 당시에 두 젊은이들은 이 때 이미 상당히 많은 서양사조의 영향을 받았다. 부친의 뜻에 따르기만 한 것이 아니라, 확실히 상호간의 감정으로 친밀한 사랑을 만들어갔다. 그들간에는 중국전통문화에 대한 사랑과 조형예술에 대한 취미측면에서 매우 닮은 점이 많았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는 많은 차이도 있었다. 부친은 손으로 하는 것, 회화와 목공에 재주가 있었고, 음악과 체육을 좋아했으며, 성격이 유머스럽고, 일을 할 때도 순서를 정해서 차례대로 질서있게 하는 것을 좋아했다. 모친은 문학가와 같은 열정이 있었고, 영감이 오거나 흥미가 발동하면, 자주 다른 것은 돌보지 않았고, 감정에 따라 행동했다. 나의 조모는 처음부터 이 성격이독립적이고 구속받지 않는 신식 며느리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이미 사랑에 깊이 빠졌던 두 사람은 이미 중병에 걸려 있던 노친네의 심정을 헤아려주거나 살펴줄 줄을 몰랐다. 그래서 양측 관계가 매우 긴장되었고, 이로 인하여 모친은 다시 한번 가정갈등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된다. 이런 국면은 그녀로 하여금 내심에서 잠재한 반항의식을 다시 한번 강화시킨 것같고, 나중의 문학작품에서 어느 정도 반영되어 있다.

 

부친은 청화학당시절에 당당히 출중한 미술의 재능을 보였고, 조소예술을 하려고까지 생각하였다. 나중에 출국하여 건축을 배우기로 결정한다. 모친은 그러나, 영국에 있을 때의 여자친구의 영향을 받아서, 일찌감치 건축이라는 당시의 중국학교에는 아직 없던 학문을 하기로 결정한다. 이 측면에서 모친와 부친은 뜻이 맞았었다. 1923년 5월, 부친이 미국유학을 떠나기 전날, 차량사고로 왼쪽다리가 골절된다. 이로써 출국은 1년이 연기되었고, 그의 척추는 평생동안 손상을 입게 된다. 얼마되지 않아, 모친도 반관비유학에 합격한다.

 

1924년, 그들을 같이 미국 펜실베니아대학으로 간다. 부친은 건축학과에 입학하고, 모친은 당시 건축과에서 여자를 받지 않아 미술학원으로 입학한다. 그러나, 그녀가 선택한 것은 모두 건축관련과정이었다. 나중에는 건축학과의 '청강생'으로 초빙된다.

 

1925년말, 외조부는 군벌전투에서 비명에 사망한다. 이것은 유학중이던 모친에게는 큰 정신상의 타격을 주었다.

 

1927년, 부친은 펜실베니아대학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모친은 미술학원의 학사학위를 취득한다. 그후, 그들은 한 유명한 미국의 건축사사무소에서 잠시 일을한다. 얼마되지 않아. 부친은 하버드대학에서 미술사를 연구하고, 모친은 예일대학의 희극학원에서 베크교수를 따라 무대미술을 배운다. 들은 바로는, 그녀는 중국에서 처음으로 외국에서 무대미술을 배운 학생이라고 한다. 아쉽게도 그녀는 나중에 이 부분은 취미생활로 즐기고, 정식으로 무대미술활동을 한 적은 없다. 모친은 원래부터 희극을 좋아했다. 1924년, 인도의 유명한 시인인 타고르가 조부와 외조부의 초청으로 중국을 방문하였을 때, 모친은 영어로 타고르옹의 명작 '치더라"를 공연한 바 있다. 30년대, 그녀는 일찍기 1막짜리, 다막짜리 화극(話劇)을 썼다.

 

부모의 유학생활에 관하여 내가 아는 것은 매우 적다. 1928년 3월, 그들은 카나다의 오타와에서 결혼식을 거행한다. 당시 나의 큰 고모부가 거기에서 중국총영사를 하고 있었다. 모친은 서양식의 하얀 드레스를 입고 싶어하지 않았고, 또한 중국식의 "예복"은 입을 것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무대복장의 상상력을 발휘하여, 자신이 설계한 '동방식'의 머리장식이 있는 결혼복장을 입는다. 들은 바로는, 당시의 카나다의 매체촬영기자들은 이에 크게 흥미를 느꼈었다고 한다. 이것은 그녀나 나중에 일생동안 집요하게 추구하던 '민족형식'의 첫번째 유치한 창작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결혼후에 그들은 유럽에서 허니문을 보낸다. 실제로는 서양건축사를 배운 후의 첫번째 견습여행이었다. 유럽은 모친이 소녀시절에 여행했던 곳이고, 결혼후에 다시 방문했으니 남다른 감회가 있었을 것이다. 나중에 산문 "그라나다의 밤'을 썼다. 이로써 그녀는 이 스페인의 작은 성에 대한 감상을 표현했다.

 

1928년 8월, 조부는 국내에서 부친을 위하여 심양동북대학에 건축학과를 개설하도록 하고, 교수 겸 주임을 맡도록 한다. 일때문에 부친에게 바로 들어와서 직위를 맡으라고 하였고, 동시에 조부의 신장병도 날로 위중해지고 있었다. 이때문에 부모님은 유럽여행을 중단하고, 시베리아를 거쳐 국내로 급히 들어왔다. 원래, 조부는 부친을 위하여 청화대학에 일자리를 알아놓았었는데, 나중에는 극력 부친에게 심양으로 가라고 권하였다. 조부는 편지에서 "(동북) 지방의 건축사업은 장래에 크게 발전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온유향인 청화대학보다는 훨씬 낫다. 그러나, 현재는 북경만큼 편안한 곳이 없다...내 생각에는 뜻이 있는 아이라면, 힘든 길을 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부친과 모친은 같이 동북대학 건축학과로 갔고, 매우 순조롭게 일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동북지방의 추운 날씨는 모친의 건강을 해쳤다. 1929년 1월, 조부(양계초)는 북경에서 병으로 돌아가셨다. 같은 해 8월, 나의 누나가 심양에서 출생했다. 그 후 오래지 않아, 모친이 젊을 때 앓은 바 있던 폐병이 다시 도졌다. 그래서 북경으로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고. 향산에서 요양했다.

 

향산의 '쌍청'은 아마도 모친의 시짓는 일이 시작된 곳일 것이다. 그녀가 남긴 최초의 몇 수의 시는 그 때 여기에서 쓴 것이다. 고요한 산속에서 대자연과 가까이 하면서, 그리고 처음으로 어머니가 된 기쁨과, 특히 북경의 친우들의 진지한 우정속에서 모친은 마음속을 기쁨과 따뜻한 정을 느겼고, 이것들은 그녀에게 시에 대한 영감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1931년봄부터 그녀는 자기의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모친이 신시를 쓰기 시작한 것은 처음에는 일정한 정도에서 서지마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그녀와 서지마의 교분은 과거의 문단의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바와 같지만, 많은 일들은 와전되었다. 나와 누나가 큰 후에 모친은 가끔 우리에게 그와의 일을 얘기해주곤 하였다. 모친은 서지마와 1920년 런던에서 알게 되었다. 당시 서지마는 외조부의 젊은 친구였고, 24세의 기혼자였다. 미국에서 경제학을 배운 후에, 캠브리지로 와서 문학을 배우고 있었다. 모친은 당시 아직 구식 대가정을 벗어나지 못했던 16세의 어린 여중생이었다. 당시 서지마와 함께 외조부집을 찾아왔던 장해약 아저씨의 말에 따르면 "너희 엄마는 당시에 두 줄로 머리를 땋아서 기르고 있었다. 하마터면 나와 서지마에게 아저씨라고 부를 뻔 했다" 당시 서지마가 서양식의 열정으로 갑자기 모친에게 마음이 기울어졌을 때, 모친은 정신적으로나 사상적으로나 생황경험상으로 그와 대등한 지위에 있지 않았고, 어떤 감정이 생길 여지가 없었다. 모친은 나중에 말하기를, 그 때, 그녀와 같이 구식 윤리교육을 받은 여자아이가, 어떻게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자기보다 8,9세나 많은 기혼남자와 연애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고 한 바 있다. 모친은 당연히 서지마가 자신을 쫓아다니는 것을 알고 있었고, 또한 이 시인을 좋아하고 존경하였고, 그가 토로한 사랑을 존중하였지만, 나중에 그녀 자신이 분석한 바와 같이, "서지마가 당시에 사랑한 것은 진정한 내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가시인의 낭만적인 감정으로 상상해낸 임휘인이었다. 그러나 나는 사실 그의 마음 속에서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오래지 않아, 모친은 귀국하고, 두 사람은 관계가 끊어졌다. 1922년 서지마가 귀국했을 때는 이미 모친은 부친과 관계가 가까워져 있었고, 나중에 같이 유학을 떠났으며, 서지마와는 직접적인 연락이 없었다.

 

[중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