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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공통)

중국역사상 수도선택의 원칙

by 중은우시 2007. 4. 5.

통일중화제국은 진시황때부터 시작된다. 진나라 이전의 각왕조의 수도는 일반적으로 모두 자연적인 원인에 따랐다. 예를 들면 한 부족의 자연거주지였다(서주, 동주는 약간 특수함). 그러나, 진나라이후에는 국가판도가 커지고 수도를 어디로 정할 것인가에서 선택의 여지가 많았다. 그리하여, 진나라 이후 각 왕조의 수도선택에는 날로 정치요소와 경제요소가 두드러졌다.

 

수도선택의 정치요소는 왕조의 최대의 위협근원과 너무 멀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로써, 신속하게 정보를 접할 수 있고, 효율적으로 군대를 지휘할 수 있어야 했다. 경제요소는 부유한 지역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야 했다. 이로써 재부와 물자를 획득하기 쉬어야 했다. 전체적으로 보면, 정치요소가 경제요소보다 항상 우위에 있었다.

 

서한때 조정의 최대위협은 북방의 흉노였다. 이 시기는 관중지구의 경제가 관동지구보다 낙후되었지만, 정치우선의 원칙에 따라, 장안을 수도로 한 것은 필연적인 결과였다.

 

동한에 이르러, 흉노세력은 분화되었다. 남흉노는 귀순하고, 북흉노는 도망쳤다. 그래서, 흉노의 정치위협이 감소했다. 그리고 광활한 중원지구는 더욱 큰 경제적인 잠재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동한의 수도는 낙양으로 정했다.

 

한나라 이후에는 동란의 시기를 겪는다. 위나라정권의 주요한 위협은 남방의 오나라와 촉나라였다. 그래서 수도를 선택할 때 남방에 가까운 낙양을 택한다. 사마씨가 설입한 서진정권은 비록 상대적으로 단기간의 평화시기가 있었지만, 북방민족이 다시 궐기했다. 서진정군은 더이상 대항할 힘이 없어서 할 수 없이 낙양에 자리잡았다. 짧은 반세기후에 다시 남경으로 쫓겨가서 동진을 성립했다. 번화한 강남의 땅은 넓었다. 동진이 남경을 선택하고, 더 남쪽으로 내려가지 않은 것은 북방으로부터의 위협에 가까이 있어야 싸우는데 편리했기 때문이다.

 

남북조시기에 북위정권은 외부의 정치위협이 크지 않았다. 거기에 초기에는 유목민족의 특징이 남아 있었다. 그리하여 대동을 수도로 정한 것은 유목경제와 농경경제를 모두 돌보기 위한 선택이었다. 북위정권이 철저히 한화한 후에는 낙양으로 천도함으로써 유목경제를 포기하게 되고, 농업경제를 중시하게 된다.

 

수나라는 야심이 너무 컸고, 너무 서둘렀다. 짧은 38년의 기간동안 큰 뜻을 펼쳐보지도 못했다. 수나라의 수도선택에서는 복잡한 여러가지 고려를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수나라는 처음부터 각방향으로부터의 적의 위협을 받았다. 그중 주요한 것은 북방의 돌궐이었다. 그래서, 수나라는 막 건립했을 때, 수도를 장안으로 정했는데, 돌궐에 대응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수문제는 중국을 통일한 후, 야심이 컸던 수양제가 황위를 계승한다. 북방의 위협에 추가적으로 대응하고, 그 자신의 남방에 대한 편애로 인하여 수양제는 남쪽에 가까운 동도 낙양을 설치한다. 그리고 낙양으로부터 대운하를 건설한다. 목적은 유효하게 남방의 재부와 물자를 운송하여 북방의 전쟁에 대비하는 것이었다. 수양제는 세번에 걸쳐 양주에 간다. 제3차로 양주에 간 후에 양주에 주재한다. 왜냐하면 그가 젊을 때 양주에서 왕에 봉해졌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강남에 미련이 있다고 말하였다. 만일 북방이 정리되지 않은 상황만 아니라면 다시 남쪽으로 천도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대운하는 나중에 북경까지 연결된다. 목적은 고구려를 정복하는데 물자지원을 위한 것이었다. 수양제는 너무 급박하게 공을 세우고자 하였다. 욕속부달. 결국 단명으로 끝난다.

 

당나라가 천하통일한 후, 유일한 위협은 북방의 돌궐이었다. 수도를 장안으로 정한 것은 순리에 따른 것이었다. 이외에 당나라는 비단길이 다시 열렸고, 비단무역은 당나라의 주요수입원이었다. 그리고, 장안은 비단길의 시작지점이었으니 경제상의 중요성도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조광윤은 북송을 건립한다. 수도를 개봉으로 정한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은 아주 간단하다. 조광윤은 자기가 합리적으로 천하를 얻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고, 정변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고자 했다. 그리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후주의 공제가 자기에게 선양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소국인 후주의 도성이 바로 개봉이었다. 이런 분식된 선양을 진짜인 것처럼 할 필요가 있었으므로, 조광윤이 천도하는 것은 적절한 조치가 아니었다. 북송건립후, 어떤 사람은 여러차례 수도를 낙양이나 장안으로 옮기자고 건의했다. 그러나 모두 조광윤에 의하여 거부당한다. "선양"이라는 외관외에 또 하나는 외부의 위협이었다. 북송초기의 주요한 위협은 요나라였다. 개봉은 지리적으로 낙양에 비하여 요나라에 가깝다. 나중에는 금나라가 요나라를 대체하는데, 북경을 수도로 삼는다. 서쪽으로는 서하가 들어선다. 그러나, 금나라의 위협은 서하보다 항상 컸다. 그래서, 수도를 정하는 정치원칙에 따라 개봉이 우선시되었다.

 

만일 가능하다면, 남송은 남경에 수도를 정했을 것이다. 그러나, 금나라가 계속 진격해오므로, 남경은 너무 위험했다. 남송은 부득이 상대적으로 안전한 항주를 택한다. 사실, 남송시기에 더 남쪽인 복건의 천주등도 경제가 매우 발달하였고 더 안전했다. 그러나, 복건은 주요위협원으로부터 너무 멀었다. 비록 남송이 그리 북방과 대항하고 싶어하지는 않았고, 심지어 악비를 죽여버리기까지 했으나, 그러나 평화협상을 위하여는 너무 먼 것은 곤란했다. 항주는 지리위치상으로 전쟁이나 평화 모두 비교적 편리했다.

 

원나라의 수도인 북경은 유목민족이라는 것과 일정한 관계가 있다. 그들은 고향에서 너무 멀리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북경에는 수양제가 만든 대운하가 있고, 남방의 물자운송이 이전보다 편리해졌다. 그렇지 않았다면, 원나라의 수도는 다른 곳으로 정했을 것이다.

 

주원장은 문화수준이 높지 않았다. 남경을 수도로 정한 것은 어느 정도 금의환향의 허영이 포함되어 있다. 아마도 경제가 발달한 지역에 가까이 있으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중국역사상 역대왕조의 개국황제의 묘호는 "조(祖)"로 끝난다. 예를 들어, 한고조 유방, 당고조 이연, 송태조 조광윤, 명태조 주원장, 청태조 누르하치가 그들이다. 후사를 이은 황제의 묘호는 일반적으로 모두 "종(宗)"이다. 개국황제가 아니면서 "조"를 쓰는 경우는 몇 되지 않는다. 명성조 영락제 주체는 바로 그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청세조 순치, 청성조 강희가 있다. 그 이외에는 대부분 단명한 소왕조에서 "조"의 범람이 나타난다. 수백년의 대왕조에서 후사황제의 묘호가 "조"인 경우는 모두 특출한 공로를 세운 황제들이다...명성조는 북경으로 천도하였는데, 그 원인은 북방으로부터의 위협이 컸기 때문이다. 도망간 북원황제가 계속 명나라의 변경을 엿보고 있었다. 수도를 정하는 정치원칙이 경제원칙을 우선한 경우였다.

 

청나라가 북경을 수도로 정한 것도 역사의 필연이다. 중국의 역대왕조의 정권은 만일 북방민족이 건립한 것이 아니라면 대부분 북방민족의 거대한 위협을 받았다. 요, 금, 원이 연이어 흥성했다 쇠약하였는데, 이것은 모두 전국적인 정권에 거대한 영향을 미쳤다. 청나라의 조상은 기본적으로 요, 금, 원과 마찬가지였다. 동일한 상황이 다시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청나라는 남북을 모두 고려하는 북경을 수도로 삼았고, 원래의 수도인 심양에도 북경과 유사하게 오부아문을 두었으며, 동북을 통치하는 최고권력기관으로 삼았다. 북방민족의 중원에 대한 위협을 해결한 것은 청나라때 가장 완벽하게 이룬다.

 

상술한 수도를 정하는 원칙은 기본적으로 중국에서 유효하다. 중국이외의 다른 나라는 지리적인 원인이나 국토의 크기등의 이유로 이런 문제가 존재하지 않는다. 현대사회로 들어오면서, 이상의 정도원칙은 중국에서 점차 약화되었다. 고대의 수도를 정하는 원칙중 위협의 근원에 가까이 있어야 한다는 정치원칙은 현재는 이미 그다지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고대에는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고, 정보교류가 불편하여 수도가 위협의 근원에서 너무 멀면, 쉽게 감시하고 의사결정할 수 없었지만, 현재는 그렇지 않다. 마찬가지로 과거에는 경제발달지구에서 너무 멀면, 중앙정권이 필요로 하는 물자를 공급받기 어려웠었는데, 지금은 그렇지도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