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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공통)

명청(明淸)의 황위계승원칙

by 중은우시 2007. 3. 20.

글: 장효파(張曉波)

 

명나라의 황제는 영락제와 남명의 나중 두 황제를 제외하고는 대통을 승계하는데 기본적으로 문제는 없었다. 황제도 순리에 따라 당당하게 되었고, 적장제(嫡長制)가 비교적 제대로 시행되었다. 하늘이 대명황조를 도와서, 중간에 진혜제와 같은 바보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비록 진혜제와 같은 인물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만일 초기나 중기라면 여전히 나라는 잘 운영되었을 것이다. 말기라 하더라도 만력제는 아주 편안하게 세월을 보내지 않았는가? 황인우가 쓴 <<만력15년>>은 전체적으로는 헛소리지만, 명나라정부의 운영메커니즘에 대한 내용은 취할 점도 없지 않다.

 

이는 실제로 두가지 측면에서 잘 어울려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나는 후계자가 일단 정해지면, 다른 황자들은 황위를 찬탈하겠다는 마음을 먹지 못했다는 것이다. 혹시 그렇다 하더라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손안에 병사도 없고 땅도 없었다. 성을 나가려면 내무부의 허가를 받아야 했으니, 중앙에 대항하는 것은 실로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다. 그래서 영왕은 십수년간 계획을 세웠지만, 몇달만에 평정되고 말았다. 다른 하나는 정부메커니즘이 잘 돌아갔다는 것이다. 선황제가 일단 사망하면, 수보(首輔)와 보신(輔臣)이 유조(遺詔)를 작성하기 시작하고, 비록 가정제때와 같은 과도기가 나타나더라도 위기로까지 발전되지는 않았는데 이 모든 것이 이런 양호한 운영에 따른 결과였다. 기껏해야 조그만 골치거리가 있었을 뿐이다. 예를 들면, 서계와 그의 제자인 장거정이 몰래 유조를 작성하고 고공에게 보여주지 않는바람에, 고공이 화가나서 죽어버린 것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골치거리정도는 신하들간의 의견차이로 인한 소동에 불과했다.

 

당연히 영락제는 특수한 경우이다. 이는 황위계승을 문란시킨 사례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영락제 자신도 황위계승을 어지럽힌 것을 인정했고, 그래서 당태종을 여러측면에서 모방했다. 다만 자신의 입으로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남명은 특수한 경우이다. 홍광제이후의 나머지들은 너무 멀리 있었고, 제대로 기세를 형성하지 못했다. 남명은 운이 매우 나빴다. 숭정이 죽을 때까지 체면을 중시하였기 때문에, 자식들을 남으로 내려보냈다면, 남쪽에서 자리잡고 행세하는데는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그것도 아니면, 유조라도 남겨서 후계자를 지정하기만 했더라도 아무런 문제도 없었을 것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태자가 죽지 않았다는 것만 확인되었더라도, 남명의 방계황족들은 그저 감국(監國)으로 활동하지, 절대 황제위를 노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좌량옥과 사진등등이 아무리 간이 크더라도 중앙에 대항하는 일은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황제의 승계가 일단 끊어지자, 혼란이 왔다. 노감국과 당왕이 싸우고, 계왕과 광주의 한 종실이 싸웠다. 싸우고 싸우다가, 땅을 다 잃고 운남귀주로 갔다. 거기서도 십여년을 완강히 버텼다. 그런데, 청나라의 운세는 너무 좋았다. 누르하치부터, 강희때까지 한번도 끊이지 않고 계속 특등상을 받은 것과 같았다.

 

이것은 아주 쉽지 않은 일이다. 누르하치와 그 당시의 건주여진은 아주 낙후한 곳이었고, 적장제조차도 제대로 시행할 줄 몰랐다. 누르하치는 아들이 않아서 내전으로 발전할 가능성도 많았는데, 결과적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청태종이 칸의 지위를 이었다. 나중에 청태종이 죽자, 후계자는 또 다시 미궁에 빠졌다. 복림(福臨, 순치제)은 여러 세력이 타협한 결과였다. 이때도 아무런 문제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은 운이 너무 좋다고 밖에 다른 말을 할 수가 없다.

 

강희제가 죽자 다시 문제가 나타났다. 강희제는 천고의 황제이다. 그래서, 황제를 누가 할 것인지까지 대신들이 결정한다면, 황제는 뭐 할 것이 있느냐고 생각했다. 이제 국본을 다투던 신하들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게 되었다. 그래도, 문제는 있었다. 옹정제가 정상적으로 황제위를 계승했느냐에 대하여는 다툼이 있고, 아직 누구도 그 진실은 모른다. 이처럼 명확한 게임규칙을 정하지 않았음에도 100년간이나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저 만주족들이 운이 너무 좋다는 것이외에는 더 할 말이 없다.

 

옹정제는 대신들이 항상 천고의 이치를 들어서 국본을 다투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아예 비밀건저(秘密建儲, 비밀리에 후계자를 정하는 것)의 방식을 채택했다. 옹정이 건륭에게 물려주었는데, 그것이 비밀인지 아닌지는 누구나 다 알고 있듯이 거의 공개된 사실이었다. 건륭이 가경에게 물려주었는데, 사실은 건륭이 살아있을 때 선양한 것이므로 비밀건저는 그저 형식뿐이었다. 가경이 도광에게 물려준 것이 처음으로 비밀건저가 정식으로 운용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바로 문제가 발생했다. 작은 금합을 보관하고 있던 내시는 그것이 뭐하는 것인지를 전혀 몰랐다는 것이다. 결국 마지막에 내각의 한 신하가 발견하여 열쇠를 부수고 여는 바람에 그 내용이 알려지게 되었다. 만일 그 내시가 다른 황자와 결탁하여, 작은 금합을 바꿔치기했더라면, 결국 황위계승은 그 내시의 손에 달리게 되지 않을까? 다시 말해서 정대광명 편액위에 올려놓는다고 하더라도, 어쨌던 사다리로 올라가서 바꾸면 되지 않은가?

 

당연히 못난 황제들이 뒤를 이을 때, 함풍제는 아들 하나를 얻는데, 그러나, 결과적으로 풍류를 즐기다가 매독으로 죽고 만다. 결과적으로 황제의 계통이 단절되게 되었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누구나 다 알고 있듯이 한 늙은 여인이 한번은 어린아이 하나를 올렸다가, 다시 그를 누르고, 다시 하나를 세웠다. 청나라는 당연히 끝장난 것이다.

 

적장제(嫡長制, 적자와 서자가 있으면 적자가 우선이고, 적자가 여럿이면 장자가 우선이다)의 원칙은 누가 언제부터 시행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진혜제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그냥 괜찮은 것같고, 혼란을 방지하는 작용은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