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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공통)

중국역사상의 흑인용병

by 중은우시 2007. 2. 15.

용병은 국가나 민족의 이익을 위하여 싸우는 것이 아니라, 보수를 얻기 위하여 싸우며, 어느 국가나 민족에든 고용될 수 있는 직업군인을 말한다. 이는 많은 나라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중국에서도 명, 청이래로 중대한 전쟁에서 외국용병의 그림자를 볼 수 있다. 이 용병들 중에서 흑인용병에 대하여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마카오 포르투갈군의 주력에서 명나라군대의 선봉대로

 

무적함대를 보유했던 포르투갈을 16세기에 세계해양강국으로 성장했다. 마카오를 조차하기 전에, 포르투갈인들은 이미 아프리카와 인도에 광대한 식민지를 확보하고 있었고, 많은 흑인들은 포르투갈인들의 노예가 되었을 뿐아니라, 징용되어 군대에 들어가서, 포르투갈군대의 구성원이 되기도 하였다. 포르투갈인들이 마카오를 조차하면서, 상당히 많은 흑인들이 이 신흥 동방의 항구도시에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명나라 사람들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마카오의 포르투갈 백인들은 기본적으로 모두 4명 내지 20명의 흑인노예를 거느리고 있었고, 백인이 증가함에 따라, 마카오의 흑인수도 따라서 증가하였다. 그리고 포르투갈이 마카오에 군대를 주둔시킴에 따라, 포르투갈군대내의 흑인들도 마카오로 오게 되었다.

 

정성공의 흑인용병

 

이런 피부가 새카맣고, 머리가 짧으며, 입술은 두터운 외국인을 대하면서 중국인들은 아주 큰 흥미를 느꼈다. 이 흑인들의 모습에 놀라는 동시에 중국인들은 이 흑인들이 아주 용감하고 직무에 충실하며, 싸울때에는 왕왕 소리치면서 자기몸을 돌보지 않고, 그저 앞으로만 나가는 것을 보았다. 중국의 역사서에는 이렇게 과장되게 적어놓았다. "이 흑인들은 물에 들어가도 가라앉지 않으며, 바닷물위를 평지처럼 걷는다"

 

얼마되지 않아. 포르투갈과 네덜란드는 마카오의 패권을 두고 전쟁에 들어갔다. 중국인들은 이때 진정으로 흑인들의 전투력을 느낄 수 있었다. 당시 포르투갈이 마카오에 주둔시킨 군대는 약 300여명이었는데, 그중 사병은 모두 흑인이었다. 이 흑인군대는 마카오 포르투갈군대의 주력이었다. 그들은 일년내내 훈련을 하고, 아주 강한 전투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후기지수인 식민국가로 '해상의 마차꾼'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네덜란드는 마카오를 탐냈다. 일찌기 포르투갈인의 수중에서 이 '동방명주'를 빼앗아오고 싶어했다.

 

네덜란드인들은 1622년 마카오에 공격을 시작했다. 마카오의 흑인군대는 힘을 다하여 방어했다. 그들은 한편으로 대포를 이용하여 네덜란드인의 군함을 공격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적극적으로 출동하여 백병전을 벌여 네덜란드군대의 진형을 흐트렸다. 그중 한 여성흑인노예는 남장을 하고, 전투에 참가하여 2명의 네덜란드인을 그녀의 손으로 직접 죽이기도 하였다. 흑인군의 영웅적인 선전으로 포르투갈인들은 네덜란드인들을 궤멸시킬 수 있었고, 자신들의 식민지를 유지할 수 있었다.

 

흑인들이 마카오방어전투에서 큰 공을 세우기는 하였지만, 그들의 노예로서의 지위는 변함이 없었다. 자기의 처지에 대한 불만으로, 마카오의 일부 흑인은 자주 기회를 틈타 호구를 탈출하여 명나라군대에 투항하였다. 그들은 아주 용감하고 잘 싸웠으므로, 이렇게 도망쳐온 흑인들은 명나라 장수들의 환영을 받았고, 이 장수들은 그들을 받아들여 잘 보호해 주었다.

 

부대의 전투력을 제고하기 위하여, 명나라의 일부 지방관리는 사적으로 높은 갚을 주고 마카오의 흑인을 사들였고, 그들로 하여금 마카오를 탈출하여 명나라 군대에 들어오도록 유인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비적을 소탕할 때는 그들을 선봉에 서게 하였다. 이 흑인들이 안심하고 작전을 하도록 하기 위하여, 관리와 장수들은 그들에게 중국계 처와 결혼하도록 해주고 중국에서 집안을 이루고 자식을 낳도록 해주었다.

 

정성공의 친위대가 되어 대만수복에 공을 세우다.

 

명나라 군대의 흑인사병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정지룡(鄭芝龍), 정성공(鄭成功) 부자가 장악한 흑인부대이다. 그들은 정씨의 친위대가 되었을 뿐아니라 이후 대만수복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다.

 

정성공의 부친 정지룡은 원래 명나라 말기 동남연해의 대해적이었다. 나중에 명나라군대에 편입되었고, 남명정권의 군사적인 중요인물이 되었다. 정지룡의 원명은 일관(一官)이었다. 어려서는 외삼촌과 함께 해상무역에 종사하였다. 무역과정에서 그는 포르투갈어를 배웠다. 정지룡은 여러차례 마카오를 들렀으며, 흑인의 전투력도 잘 알고 있었다.

 

명나라의 다른 장수와 마찬가지로, 정지룡은 유인과 편입을 통하여 300여명의 흑인친위대를 만들었다. 루이스 마투스라는 흑인으로 하여금 지휘하게 하였다. 정지룡의 군대에서의 백인이나 일본인과 비교하여, 이 흑인부대는 군량이 적게 들었을 뿐아니라, 충성심도 믿을만하였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들이 무기의 주조와 운용에 매우 밝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흑인용병은 정씨군대에서 한 무리의 특수병이 되어, 정지룡이 아주 중시하게 되었다. 현지의 전도사의 기록에 의하면, 한번은 예수수난일을 기념하는데, 이 흑인들이 아침일찍 한편으로 나팔을 불면서 한편으로 하늘을 향해 공포탄을 쏘았다. 놀라깨어난 정지룡은 화를 내지 않았을 뿐아니라, 일부러 그들 흑인사병에게 술과 음식을 내렸고, 백은을 하사하여 그들이 낮에 축하행사를 할 수 있도록 해주었따. 바로 이렇게 정지룡이 잘 대우해주어서 이 사병들은 그에게 목숨을 다하여 보답하였고, 더 많은 마카오의 흑인노예들이 소문을 듣고 그들에게 투항해왔다.

 

나중에 병마를 모아서, 정지룡의 실력이 크게 늘어났으며 명나라의 남부지방에서는 거족경중(擧足輕重)의 중요인물이 되었다. 1645년, 정지룡은 복건에서 당왕(唐王)을 옹립하였고, 남명정권의 실권자가 되었다. 다음 해, 청나라 병사가 복건에 진입하면서, 정지룡은 청나라군대가 강대한 것을 보고 급히 몸을 빼어 청나라에 홀로 투항했다. 그러나, 그 아들 정성공은 부대를 이끌고 계속 반청활동을 하였다. 이 흑인정예부대는 정성공에게 충성을 다하였다. 정성공은 그 중의 정예부대로 자신의 신변을 지키는 친위부대로 만들었다.

 

안정적인 반청기지를 확보하기 위하여, 1661년 3월 23일, 정성공은 네덜란드식민자들로부터 대만을 수복하기로 결정한다. 수백척의 전함은 2만5천의 대군을 이끌고 금문도를 떠난다. 먼저 팽호도를 함락시키고, 이어서 타이난(臺南)에 상륙한다. 짧은 몇개월내에 대만의 대부분을 수복한다. 이 때 흑인친위대는 정성공을 따르는 중군으로 주군을 보위하였을 뿐아니라 전투가 위급할 때면, 정성공의 명에 따라 전선에 투입되어 국면을 전환시키는 특수군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포위당한 네덜란드군에 대하여, 정성공은 공격은 하지 않고 그냥 포위상태만 유지하기로 결정한다. 네덜란드군대에 있는 대량의 "오번병(烏番兵, 흑인병)"에 대하여, 정성공은 자신의 흑인부대를 시켜 그들에게 투항을 권요하도록 한다. 흑인친위대는 서신과 고함을 통하여 금방 네덜란드군의 흑인사병과 연락을 취하였다. 잠시간의 심리전을 통하여 네덜란드군대의 흑인사병들은 하나둘 도망해서 정성공에 투항하기 시작하였다.

 

이처럼 군대가 궤멸되자, 대만 적감성내의 네덜란드군은 투항을 선택한다. 몇달후, 대만성내에 고립된 네덜란드 패잔병들은 무기를 버리고 모두 투항한다. 1662년 2월 1일, 네덜란드의 총사령관 쿠이는 항복문서에 서명한다. 네덜란드에 의하여 38년간 점령당했던 대만이 다시 중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서양군대와 태평천국에 고용되어 중국내전에 참가함

 

명말청초에 비록 일부 흑인병사들은 청나라의 지방관리에게 고용되었지만, 평화시기의 그들은 치안을 유지하는 이외에 기본적으로 할 일이 없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들을 잊어갈 때쯤 태평천국의 난이 발발하였고, 흑인들은 다시 고용되었고, 중국의 전쟁터에 그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태평천국이 1860년에 강남, 강북을 격파하였다. 당시 청나라의 상해방어군은 약했었고, 태평군의 공세가 시작되자 상해의 관료와 지방사람들은 공황상태에 빠졌다. 그들은 영국프랑스연합군에 병사를 보내어 비적을 토벌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했다. 청나라의 지방관리는 어쩔 수 없이 스스로 돈을 내서 군대를 조직했다. 그래서 Wald의 서양군부대가 탄생하였다.

 

동방모험가의 낙원으로서 상해는 이때 많은 모험가, 유랑객과 각국군대에서 근무하던 퇴역군인들이 몰려들었었다. 상해가 곤란에 처하자 상해지방수령인 오후는 제일 먼저 서양인들을 떠올렸다. 그는 상선에서 일하던 미국인 왈드를 불러 서양인들로 양창대(洋槍隊)를 조직해줄 것을 요청한다.

 

왈드는 일찌기 미군과 프랑스의 외인부대에서 근무했었고, 여러번 전쟁에 참여해서, 전쟁경험이 풍부했다. 군대를 퇴역한 후, 왈드는 상해로 와서 돈벌 기회를 찾고 있었는데, 기회가 오질 않았었다. 오후의 건의를 듣자 그는 아주 흥분했고, 즉시 상해의 각 술집에서 수백명의 서양인들을 모았고, 서양총을 들고 태평군을 방어하러 떠났다. 결과적으로 이 오합지중은 태평군에 의하여 가볍게 격퇴당했고, 왈드는 낭패한 모습으로 상해로 되돌아왔다.

 

아픈 경험을 한 왈드는 다시 필리핀과 인도의 흑인으로 용병을 구성했고, 동시에 3천명의 중국인들도 모집해서 3개단으로 만들었다. 서양의 군사훈련을 시켰다. 훈련이 끝난 후, 양창대의 전투력은 급증하였으며 여러번 태평군을 무찔렀다. 양창대는 청나라 정부에 의하여 "상승군(常勝軍)"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양창대의 사람수는 많지 않지만, 이 사람들은 모두 망명객이고, 그중에서 흑인용병의 작전능력은 가장 뛰어났다. 그리하여 흑인용병은 상승군의 주력이 되었다. 나중에 태평군말기에 주장수인 충왕 이수성은 자기의 실패원인을 분석한 후 그 원인이 '서양군대가 중간에 막아서 방해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청나라지방관리로부터 돈을 받고 태평군과 대적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서양병사들은 돈만 보면 목숨을 걸고 싸운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양창대에서도 흑인병사를 모집했지만, 태평군에서도 이들을 모집했다. 태평천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으므로, 처음에는 그들이 서양인들을 배척하지 않았었다. 심지어 영국에 특사를 보내어 형제간에 우의를 유지하자고도 하였었다.

 

비록 서방각국정부의 명확한 지지를 끌어내지는 못했지만, 태평천국에는 많은 외국인이 참가했다. 원래 전쟁기간동안 각국의 주중국군대사병은 자주 월급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나중에 태평군은 양창대의 용맹함을 보고는 일부 장령이 이들 외국인을 태평군에 고용할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이 사람들은 비록 단독의 부대를 이루지는 못했지만, 수량은 제법 많았고, 그중에 흑인들이 상당수를 차지했다.

 

군중의 사병들이 도망치자, 영국정부는 아주 골치가 아팠다. 그래서 한번은 태평군과 교섭을 했다. 한번은 영국군의 3명의 흑인이 도망쳐서 태평군에 들어갔다. 영국군은 태평군에 이들 3명의 영국도망병을 반환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태평군은 완곡하게 거절했다. 나중에 이 일을 흐지부지 되었다. 용병문제로 인하여 1861년 영국황실해군은 예닝함의 함장을 중국에 보내어 협상하기도 하였다. 태평군이 이 일을 부인하기는 하였지만, 그는 소주의 태평군내에서 140여명의 외국용병을 찾아냈고, 그중에 26명의 영국인이 포함되어 있으며 대부분이 흑인이라는 것도 알아냈다.

 

비록 흑인이 태평군과 청나라군대에서 많은 역할을 하였지만, 태평군의 실패와 더불어 흑인용병도 점차 역할을 잃어갔다. 일찌기 청나라군대는 양창대의 힘을 빌어 소주, 항주를 회복하였는데, 청나라조정은 태평군이 이미 소멸되자, 이 기회를 틈타 양창대를 해산하였다. 1864년, 이홍장은 양창대내의 일부 정예만을 남기고, 나머지 대부분은 해산시켰다. 같은 해에 태평천국은 실패하고, 태평천국내의 흑인사병도 어떤 사람은 죽고, 어떤 사람은 도망쳤다. 이에 이르러 명청이래로 존재하던 흑인용병은 중국에서 사라지게 된다. 흑인용병이라는 말 자체가 역사에 남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