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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분석/중국역사의 분석

황제와 공신의 "죄수딜레마"

by 중은우시 2007. 3. 25.

글: 후양방(侯楊方)

 

송나라의 개국은 희극적(戱劇的)이다. 겨우 이틀만에 이루어졌다.

 

당시 후주(後周)의 금군점검(禁軍點檢, 군총사령관에 해당함)을 맡고 있던 조광윤(趙匡胤)은 대군을 이끌고 북상하여 변경을 침입해들어온 요군(遼軍)과 사우러 가고 있었다. 군대를 이끌고 수도인 개봉을 떠나 멀지 않은 진교역(陳橋驛)에 도착해서 주둔했다.

 

다음날 아침에 군대에는 돌연 변고가 일어났다. 여러 병사들이 조광윤에게 등극해달라고 강력하게 요구했고, 한벌의 황포(黃袍, 노란색 옷 즉, 황제가 입는 옷)을 그의 몸에 걸쳐주었다. 그후에 대군은 호호탕탕하게 개봉성으로 돌아왔고, 칼에 피한방울 묻히지 않고, 정권을 획득했다. 이것이 중국역사상 유명한 진교병변(陳橋兵變), 황포가신(黃袍加身)의 이야기이다.

 

당연히, 이 장면은 정교하게 기획된 희극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황급한 와중에 어디서 황포를 찾아올 수 있단 말인가? 당시 개봉성의 방어를 담당한 장군은 조광윤의 부하와 옛친구인 금군(禁軍)의 제2, 제3호인물인 석수신(石守信)과 왕심기(王審琦)였다. 그들은 일찌감치 조광윤에게 마음이 기울어져있었던 자들이다. 이응외합(裏應外合, 안과 밖이 서로 호응하다)으로 모든 군권을 장악했으니, 천하를 취하는 것도 손바닥을 뒤집는 것처럼 쉬웠다.

 

조광윤의 '황포가신'의 희극은 오리지날은 아니었다. 원창자는 바로 후주(後周)의 개국황제 곽위(郭威)였다. 바로 진교병변이 있기 9년전에, 당시 후한의 추밀사(樞密使, 지금의 국방장관)를 맡고 있던 곽위는 군대를 이끌고 요나라군대와 싸우러가던 도중에 군대를 돌려 도성으로 왔고, 황제에 등극했다. 당나라말기이후로 중국은 대분열의 시대로 접어들었는데, 소위 오대십국(五代十國)의 시대였다. 군벌간의 혼전이 끊이지 않았는데, 후진의 절도사인 안중영이 한 한마디는 바로 그 본질을 꿰뚫고 있었다. "천자에 무슨 씨가 있을 것인가? 군대가 센 놈이 하면 되는 것이다" 오대는 짧은 53년간 중원정통왕조에 8개성 14명의 천자가 주마등처럼 번갈아가며 나타났고, 그외에 병존하던 독립왕국이 10개가 있었고, 이외에도 몇개의 할거정권이 있었다. 동시에 북방에는 전략요충지 연운16주를 장악하고 있으며 언제든지 남하할 준비가 되어 있던 강대한 요(遼)나라가 있었다.

 

조광윤은 등극한 후, 가장 먼저 해결해야할 문제가 바로 막 건립한 송나라를 '제6대'가 되도록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원래 '군약신강(君弱臣强)'의 구도하에서 정권을 획득했으므로, 그래서 다시는 제2의 '조광윤'이 출현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리고, 제2의 '조광윤'은 아마도 자기의 부하들 중에서 나올 것이었다.

 

하루는, 조광윤에 옛부하인 석수신, 왕심기등을 불러 술을 마셨다. 좌우를 물리친 후에 이렇게 말했다. "내가 황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너희들이 추대해주었기 때문이다. 황제가 되니 처지가 아주 힘들다. 오히려 절도사를 하는 것보다 재미없다. 밤에는 잠도 잘 오지 않는다"그러자 석, 왕등이 말했다. "폐하께서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이제 천하는 이미 안정되었는데 누가 감히 다른 마음을 품겠습니까?" 조광윤이 대답하기를 "너희는 당연히 다른 마음을 품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너희들 수하들이 부귀를 탐하여 어느날 황포를 너희들 몸에 걸친다면, 너희는 하고 싶지 않아도 해야되지 않겠는가?" 석.왕의 두 사람은 놀라서 머리를 숙이고 눈물을 흘리면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알려달라고 했다. 조광윤은 "인생은 흰말이 지나가는 것과같다. 돈이나 많이 모아서 즐기고, 자손들이 복을 누리게 하면 된다. 너희는 병권을 버리고 좋은 지방을 정해서 관리를 하면서, 자기와 자손들이 재산을 가지고, 일생을 즐기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나는 너희들 자녀들과 서로 혼인시켜, 서로 의심하는 일이 없도록 하면, 얼마나 좋겠는가?" 석, 왕의 두 사람은 절을 하며 고맙다고 말했다. "폐하께서 신들을 위하여 이렇게 주도면밀하게 생각해주시니 우리는 죽었다 다시 살아난 것같습니다"

 

다음날, 이들은 모두 병을 핑계로 사직한다. 조광윤은 이들에게 풍부한 재물과 높은 정치적인 지위를 내렸다. 그러나, 군권을 장악하도록 하지는 않았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배주석병권(杯酒釋兵權, 술잔을 주고 병권을 내놓게 한 것)"이라고 한다. 이후 조광윤은 영향력이 있던 절도사의 권한을 점진적으로 해제하였다.

 

중국의 역대왕조에서 공신을 죽인 것은 자주 있었다. 가장 전형적인 것은 한(漢)나라와 명(明)나라이다. 이 두개의 왕조는 개국황제인 유방과 주원장이 아주 비슷한 배경과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모두 사회하층출신이며, 전황조말년의 전란중에 여러 군웅을 물리쳤으며, 모두 일군의 생사를 같이하며 천하를 얻었던 공신들이 있었다. 이들은 왕조를 이들 공신과 함께 일으켰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건국후에, 둘 다 공신들에게 크게 상을 내리고 작위에 봉하였으며, 유방은 "공신들과 부(符)를 자르면서 맹서했고, 단서철계(丹書鐵契), 금궤석실(金櫃石室)을 종묘에 보관했다" 공신들은 황제와 함께 부귀영화를 누릴 것을 약속했다. 주원장도 마찬가지였다. 공신들에 크게 상을 내리고, 작위에 봉했으며, 면사철권(免死鐵卷)을 내렸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그들은 공신들을 죽이기 시작했다. 유방은 장차, 한신, 팽월, 영포등의 이성제후왕들을 죽였으며, 심지어 제1공신인 소하를 감금하기도 했다; 주원장은 더 심해서, 개국공신을 거의 모두 죽여버렸다.

 

만일 한 왕조를 회사에 비유한다면, 개국황제와 공신은 바로 이 회사의 창립자들이다. 회장 겸 CEO인 황제는 공신들에게 상을 내림으로써 공신들이 주주로서 영원히 회사의 설립주주로서의 지위를 가지고, 이익을 향유하며 영원히 박탈되지 않도록 해줄 것을 약속한다. 통상적으로 세습작위와 단서철권의 형식으로 보증해준다. 그러나, 유방과 주원장은 회사성립후 바로 공신들과의 계약을 찢어버렸고, 공신을 살륙하고 그들의 주주로서의 권리를 박탈했다.

 

그러나, 조광윤의 방식은 유방, 주원장과는 전혀 달랐다. 그는 그저 공신들의 군권만 박탈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에게 풍푸한 물질적인 보상과 숭고한 정치적인 지위를 부여했고, 서로 자손들을 혼인시켜 인척이 되는 방식으로 그들간의 개인적관계를 강화하고 공고히 하였다. 석수신, 왕심기, 고회덕등의 개국공신은 송황실과 대대로 인척관계였고, 자손들중에는 유명한 장군이 많이 나왔다.

 

황제와 공신은 일종의 "죄수의 딜레마"에 처해 있는 꼴이다; 황제는 공신들이 권력을 가지면 황권이 위험할까 걱정하고, 공신들은 토사구팽될까 두려워 자기의 권력을 쉽게 내놓지 못한다. 이런 상호간의 거리낌은 쉽게 황제는 공신을 죽이기 위하여 손을 쓰고, 공신은 위험을 무릎쓰고 반란을 일으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조광윤의 "배주석병군"은 사실 일종의 거래이다. 자손만대에 풍부한 물질적보상을 누리는 것과 공신의 황제를 위협할 권력과 맞바꾸는 것이다. 이로써 쌍방이 모두 곤경에서 벗어나고 일종의 상호신뢰를 구축하는 것이다. 만일, "배주석병권"식의 방식이 성공을 이루려면, 강한 측인 황제가 넓은 흉금과 인자한 마음을 지니고, 인성을 통찰하고, 자신을 생각하고 남의 입장도 고려해주며, 언행일치의 신용이 있어야 할 뿐아니라, 고도의 지혜와 자신이 있어야 비로소 이런 곤경을 타파할 수 있고, 승락을 하고 공신으로 하여금 자신의 권력을 내놓게 할 수 있다. 조광윤은 바로 이런 품성을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중국역사상 "배주석병권"이라는 일막의 희극이 대단원을 내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유방, 주원장은 자신의 승락과 신용을 분토보다도 못하게 여겼다. 죄명을 만들어 잔혹하게 옛날의 전우들을 죽였다. 이것은 바로 반면의 전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