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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분석/중국역사의 분석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는 청나라의 퇴보를 입증하는가?

by 중은우시 2007. 6. 28.

 

 

마테오.리치의 곤여만국지도를 둘러싸고, 청나라가 명나라에 비하여 세계지리수준이 퇴보했다고 주장하는 글과 그에 대하여 반박하는 글이 있어, 소개한다(작자는 둘 다 미상임)

 

<<곤여만국전도>>는 청나라의 비참한 퇴보를 입증한다.

 

명나라때의 마테오 리치(利瑪竇)는 중국에서 그린 <<곤여만국전도>>의 모본(摹本, 베낀 것)이 발견되었다. 이로써 명나라때 이미 전세계지도를 알았다는 것이 충분히 증명된다.

 

마테오 리치(1552-1610)는 이탈리아사람으로, 1581년 천주교 예수회의 전도사 신분으로 중국에 왔다. 그가 살아있을 때는 명나라가 아직 멸망하지 않았고, 그가 사망할 때도 청나라가 아직 북경에 입성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명나라때 세계지도인 <<곤여만국전도>>를 만든 것이다. 그리고, 이 지도의 주해(注解)를 통하여 중국은 명나라때 또는 그 이전에 이미 남아메리카를 포함한 많은 곳에 대하여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테오 리치가 그린 <<곤여만국전도>>의 남아메리카에 대한 주석을 보면 이렇다: "남아메리카(南亞墨利加)는 5개 나라로 나뉘어 있다. 첫째는 패로(露, 아마도 페루를 말하는 듯)인데, 패로하(露河)에서 이름을 따왔다. 둘째는 금가서랍(金加西蠟)인데, 금과 은이 많이 나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셋째는 성파아나(城巴牙那)인데 큰 지방을 이름으로 했다. 넷째는 지리(智里, 칠레인 듯)인데 옛이름이다. 다섯째는 백서아(伯西兒, 브라질인 듯)인데 바로 중국에서 말하는 소위 소목(蘇木)이다." 또 다른 주석에서는 "백서아는 고소목(古蘇木)이다"라고 적고 있다. 이것은 명나라때 혹은 그 이전에 중국에서는 일찌기 남아메리카를 다녀온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중의 한 곳에 "소목"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동시에 이것은 마테오 리치가 <<곤여만국전도>>를 만들 때, "소목"이라고 쓰여진 중국의 옛지도를 참고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리고 그 중국지도가 그려진 것은 아마도 오래 전이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고소목"이라고 주석을 달았을 리가 없다. 그저 "소목"이라고만 해도 되었을 테니까.

 

같은 시기의 명나라 지리학자의 일련의 저작도 당시 명나라의 지식인들은 이미 <<곤여만국전도>>를 보았고, 서반아(西班牙, 스페인), 포도아(葡萄牙, 포르투갈), 하란(荷蘭, 네덜란드), 의대리(意大利, 이탈리아), 법국(法國, 프랑스)등 서방국가의 구체적인 위치를 이해하고 있었다. 마테오리치와 동시대인인 명나라 말기의 저명한 이학자인 장황(章潢, 1527-1608)이 편집한 <<도서편>>에는 <<곤지산해전도>>와 <<여지도>>를 수록하고 있다. 명나라 말기의 학자인 풍응경(馮應京, 1555-1606)이 편저한 <<월령광의>>에는 <<산해여지전도>>를 수록하고 있다. 명말학자인 반광조(潘光祖, 생몰연대미상)가 편집한 <<회집여도비고>>에는 두 폭의 <<전도도>>를 수록하고 있다.

 

<<여지산해전도>>, <<여지도>>, <<산해여지전도>>, <<전도도>>와 같은 명나라때의 "세계지도"에는 오대주를 포함한 각종 지리명칭이 마테오리치의 <<곤여만국전도>>의 것을 이용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지리도형과 관념적으로 마테오리치의 세계지도인 <<곤여만국전도>>와는 또한 차이가 있다. 이로써 볼 때, 당시 중국과 서양의 지리학자는 서로 참고하고, 서로 교류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중국이 일찌기 명나라때 전세계의 지도를 알았다는 점이다. 그리고 서양각국의 지리위치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사학가들은 <<곤여만국전도>>에 대한 깊이있는 연구를 통하여, 많은 부분에서 동시대의 서방지도보다 더욱 정확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중에는 알라스카의 지도부분은 현대지도와 가장 가깝게 그려져 있다. 이로써 볼 때, 당시 마테오리치가 중국에서 <<곤여만국전도>>를 그릴 때, 많은 중국의 자료를 참고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마테오 리치의 <<곤여만국전도>>는 "중서방"의 지리지식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로써 "지리발견" "세계지도제작"의 측면에서 중국은 당시 서방에 비하여 낙후하지 않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심지어는 많은 독보적인 점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청나라가 시작된 후, 이상한 일이 연속된다. 청나라의 강희, 옹정, 건륭의 세 황제때 중신인 장정옥이 편찬한 <<명사>>에는 비록 "의대리아(意大里亞)", "불랑기(佛朗機)", "화란(和蘭)"과 "여송(呂宋)"과 같은 유럽국가와 관련된 명칭이 언급되기는 하지만, 그저 "대서양(大西洋)"의 가운데 있다고만 알 고 있었다. 나중에 예부관리들이 증거조사를 한 후, "<<회전>>에는 서양쇄리국만 있을 뿐, 대서양은 없다"고 기재한다. 이리하여 "대서양"은 "막막하고 고증이 되지 않는다" "진위를 알 수 없다"고 하게 되는 것이다.

 

"불랑기"라는 명칭에 대하여는, 청나라의 사적이나 각종 저작을 보면 3개의 나라와 1개의 무기의 네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청나라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을 구분하지 못했는데, 그리하여 그들을 모두 "불랑기"라고 불렀다. 나중에 포르투갈인들이 사용하던 "대포"라는 의미도 추가된다. 그리고 프랑스가 중국에 들어온 이후에는, "프랑스"와 "불랑기"가 발음이 비슷하므로, 프랑스도 "불랑기"라고 부르게 된다. 이리하여 중국에 온 지 이미 수백년된 포르투갈 사람들은 할 수 없이 마카오(澳門)의 지명을 따서, "오문이(澳門夷)"로 바꿔 부르게 된다. 중국에 온 모든 유럽이들은 이로 인하여 합쳐서 "서양오이(西洋澳夷)"라고 통칭되게 된다.

 

명나라때 이미 알고 있던 지식이, 청나라에 이르러서는 "막막하고 고증되지 않는 전설"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막막하고 고증되지 않는 전설"은 청나라 사람들에게는 진실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하란(荷蘭), 불란서(佛蘭西), 영규려(英圭黎, 잉글랜드), 간사랍제국(干絲臘諸國)은 나라가 존재하는 것으로 고증이 된다고 하였으나, 대서양, 소서양은 은 고증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대청일통지>>는 건륭8년(1743년)에 만들어졌는데, 책에는 '서양(西洋)'에 대하여 논하는데, 완전히 혼동되어 있다. 서양국가는 인도양부근에 있다고 하고, 서남의 바다에 있다고 하였고, 불랑기, 하란과 소문답랍(蘇門答臘, 인도네시아의 수마트라), 조와(爪, 인도네시아 자바)가 서로 이웃하고 있다고 했다. 4,50년후인 건륭 54년에 화신등이 명을 받아 편수한 <<흠정대청일통지>>가 완성되었다. 외국은 모두 조공국으로 열거되었는데, 서방국가에는 하란, 서양, 아라사(俄羅斯), 서양쇄리(西洋鎖里), 불랑기등이 있다. 지이위치, 인문제도는 모두 혼란스럽고 모호하다. 명나라때 마테오 리치, 서광계, 양정균등의 노력이 완전히 수포로 돌아간 것이다.

 

건륭32년(1767년) 기효람등이 <<청조문헌통고>>, <<사이고(四夷考)>>에서 <<직방외기(職方外記)>>의 문장이 과장되었다고 비판한다. 오대주가 있다는 주장은 황당하다고 했다. 더욱 심한 것은 마테오리치를 간악한 소인으로 부르면서 그에게 속았다고 하였다. 즉, 유럽은 구라파(歐羅巴)라고 한자로 적어 크게 표시하고, 아시아주는 아세아(亞細亞)라고 번역하여 일부러 아시아는 좁고 뒤쳐지는 것처럼 비치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중국을 멸시하는 것이라고 했다.(텔레비전 연속극에서 치켜세우던 기효람이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아편전쟁이 실패한 때, 도광황제는 비로소 영국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를 물어보았다. 그러나, 명나라시기의 <<곤여만국전도>>에서는 영국의 위치를 명확히 표시하고 중국까지의 항로도 표시했다. 도광제의 명을 받아 포로로 붙잡힌 영국사병을 심문했던 요영(姚瑩)은 그제서야 마테오리치의 <<곤여만국전도>>가 여러나라가 어디와 접경하고 있고, 어디가 동쪽이고 어디가 서쪽인지, 거리는 얼마나 되는지를 정확하게 그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명나라의 <<곤여만국전도>>와 청나라의 <<건륭내부여도(乾隆內府輿圖)>>의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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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륭내부여도의 황해 부분]

 

"<<곤여만국전도>>는 청나라의 비참한 퇴보를 입증한다" 는 글을 어떤 사람이 인터넷에 올렸다. 글의 주요 내용은 청나라가 명나라에 비하여 "사상전례없이 크게 퇴보"했다는 것이고, 핵심은 지리지식측면에서 찾았다.

 

<<곤여만국전도>>는 명나라말기에 중국에 온 서양전도사인 마케오리치가 유럽인들의 당시 지리지식에 근거하여 만든 세계지도이고, 중국인은 참여하지 않았다. 다만, 당시 중국인들의 관념에 영합하기 위하여, 마테오 리치는 이 지도를 만들 때, 일부러 중국을 지도의 중앙에 놓았다. 위에서 소개한 글은 지리지식측면에서 청나라가 명나라보다 많이 퇴보하였다고 문제제기를 하면서, 명나라와 청나라의 몇개 저작을 열거하면서 비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저작을 자세히 분석해보면 문제를 발견할 수 있다. 무슨 문제인가? 바로 그 글에서 열거한 명나라때의 저작은 실제로 개인적인 성격의 저작이다. 그러나, 열거한 청나라의 저작은 모두 관방적인 저작이다. 건륭이 만든 <<청일통지>> <<왕조문헌통고>> <<명사>>등등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문제가 있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한 시대의 전체수준과 주류입장을 반영하는 것은 관방저작이지 개인저작이 아니다. 그래서 명청양황조의 특정한 분야를 비교하자면, 합리적인 방법은 명나라의 관방저작과 청나라의 관방저작을 비교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몇 개의 명나라때 개인저작을 가지고 청나라의 관방저작과 비교한다면 적합하지 않은 것이다.

 

명나라 말기의 몇 권의 개인저작은 당시 유럽전도사가 전해준 세계지리의 신지식을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이런 지식이 중국내에 보편적으로 전파되었다거나 조야,상하에 보편적으로 인정받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정규의 역사서에서는 이런 지리지식이 중국지식계에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졌다는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근대과학은 실증을 연구한다. 만일 명나라말기의 서양전도사가 전해준 세계지리지식이 당시의 중국지식인들에게 실천과 검증을 통하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면, 이런 지식은 거리에서 떠도는 풍문과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이런 경우라면, 어떻게 청나라가 명나라보다 불쌍하게 퇴보하였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다른 영역은 차치하고, 지도제작에 대하여만 보자면, 청나라는 명나라보다 훨씬 뛰어났다. 명나라의 <<곤여만국전도>>는 그저 당시 중국에 온 서양전도사가 개인적으로 만든 것이고, 명나라의 관리는 참여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거기의 중국부분은 모두 다른 2차자료를 보고 만든 것이지, 대규모로 실지측량을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청나라 전기에 여러번 중앙정부는 측량팀을 조직하여 서양전도사가 전해준 근대과학적 방법을 사용하여 전국에서 대규모의 실지측량을 진행했다. 그 후에 실지측량한 기초 위에서 전국지도를 만들었다. 그 최종적인 성과가 바로 <<건륭내부여도>>이다. 이 지도는 경위선의 직선이 비스듬히 교차하는 제형투영법을 따라 만들었다. 위도는 매 5도를 1줄로 하여 모두 13줄이다. 그래서 <<건륭13배도>>라는 명칭도 얻었다.

 

여기에 그려진 지역은 아주 넓다. 동으로는 쿠릴열도부터, 동남으로는 대만, 북으로는 북빙양, 남으로는 해남도, 서로는 페르시아만, 지중해, 홍해까지, 서남으로는 인도양까지이다. 중국지도일뿐아니라, 18세기의 아시아대륙지도라고 할 수 있다. <<건륭내부여도>>는 중국강역을 가장 명확하고 완전하게 표시한 국가지도이다. 그리고 나중에 그린 중국지도의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 이는 청나라가 다민족통일국가의 판도를 완성한 중요한 증거이고, 중요한 정치역사가치와 과학가치를 지니고 있다. 청나라는 바로 지금 중국의 강역판도의 기초를 만든 것이다.

 

명나라 말기의 학자들의 학풍은 대부분 "공리공담"이었다. 그러나, 청나라초기의 학풍은 대량으로 근대과학방법이나 근대과학방법에 유사한 방법을 사용하여 연구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