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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분석/중국역사의 분석

역사와 전설의 사이에서

by 중은우시 2007. 3. 17.

글: 소삼(蘇三)

 

중국은 오래된 나라이고, 중국에는 많은 역사와 전설이 있다. 어떤 때에는 엄숙한 역사도 전설처럼 허망하고, 어떤 전설은 진실한 역사를 담고 있기도 하다. 역사중의 진상과 허망을 가려내는 것은 아주 어려우면서도 재미있는 일이다.

 

나는 어려서 문화적인 분위기가 아주 농후한 하남의 어느 작은 마을에 거주했고, 그 곳에는 각양각색의 역사와 전설이 있었다.

 

매년 단오절이 되면 우리는 종자(粽子)를 만드는데, 종자를 싸는 잎은 위엽(葦葉)이다. 나는 자주 스스로 야외로 나가서 뜯어오곤 했었다. 모든 위엽에는 두 개의 작은 갱(坑)이 있었다. 사람들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역사상 왕망(王莽, 서한을 멸망시키고 新을 세웠던 인물)이 유수(劉秀, 신이 멸망한 후 동한을 세운 개국황제)를 쫓아낼 때, 유수가 갈대숲속에서 대변을 본 후에 엉덩이를 닦으면서 남긴 손가락도장이라고 하였다. 내가 살펴보니 모든 위엽에는 두 개의 작은 갱(坑)이 있었다. 당시는 나이도 어리고, 생물학적유전인자와 인류간의 관계에 대하여 아무런 개념이 없었으므로, 그저 유수는 어떻게 그렇게 대단할까? 나같은 보통사람도 식물에 흔적을 남길 수 있을까를 생각했었다. 나는 당시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유수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왕망이 유수를 쫓아낸 이야기"는 우리 동네에서는 잘 알려진 이야기였고, 이 주제를 둘러싸고 여러가지 이야기들이 전해졌다. 나에게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왕망과 유수의 관계였다. 어떤 사람은 왕망이 유수의 외삼촌이라고 했고, 어떤 사람은 그 반대라고 했다. 어쨌든 그들은 친척간이었다. 만일 내가 일생동안 고향에서 살았다면, 그리고 역사와 생물학교육을 받지 않았다면, 내 생각에 나도 아마 계속해서 이 전설을 다음 세대에 얘기했을 것이고, 그들도 계속 다음 세대에 전해주었을 것이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이런 전설들이 진실한 역사의 진상에서 그다지 멀지 않을 것이라고. 그러나 보기에 그렇지는 않은 것같다. 잘못하면 "관공(關公, 관우로 삼국시대인물)이 진경(秦瓊, 수당시대의 인물)과 싸운 일"을 얘끼하는 꼴이 된다.

 

며칠전에 <<한서>>(99권) <<왕망전>>을 읽었다. 거기에는 위의 전설에 관한 것은 전혀 실려있지 않다. 왕망은 유수를 쫓아낸 적이 없다. 심지어 유수도 왕망을 쫓아낸 적이 없다. 왕망은 마지막에 궁안에서 두오(杜吳)에게 죽었다. 장안을 점령한 두목은 유수가 아니었다. 당시에는 군웅들이 여럿 들고 일어났고, 아마 6, 7명의 두목들이 존재했었을 것이다. 사료를 보면, 왕망과 유수는 서로 한번씩 쫓아낼 수가 없다. 그들간의 유일한 관계라면 같은 시대에 살았다는 것뿐이다. 왕망은 기원전45년에서 기원후23년까지, 유수는 기원전6년에서 기원후 57년까지 살았다. 두 사람간에는 아니가 40살정도 차이난다. 왕망의 "신"나라가 들어섰을 때, 유수는 태학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그 뿐이다. "외삼촌"이라는 말도 유수는 동한 황실의 아주 먼 일가이므로, 왕망과 배분을 논할 정도는 아니었다. 적어도 역사서에는 그에 대해 아무런 말도 없다. 그러나, <<한서>>에 의하면 왕망은 효원황후의 조카이다. 만일 이런 "외삼촌" 관계가 성립되려면 바로 효원왕후의 아들이 왕망의 부친을 "아저씨"라고 불러야 합리적인데, 그럴 수가 없다. 왕망은 장안을 수도로 삼았고, 유수는 낙양을 수도로 삼았다. 유수가 동한을 건국한 것은 왕망이 죽은 후 2년이 지나서였다. 만일 논리적으로 "쫓아냈다"는 말을 하려면 유수가 왕망을 "쫓아낸" 것이라고는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가 듣는 전설에서는 모두 "왕망이 유수를 쫓아냈다"고 하고 있다.

 

보기에 민간의 전설을 너무 진짜로 믿으면 안될 것같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특히 신화와 전설을 진짜로 믿고 싶어한다. 예를 들면, 황제, 치우, 염제와 같은 것들이다. 도대체 그들이 무엇이고, 진실인지에 대하여는 아주 말하기 어렵다. 말하자면, 신화나 전설이라고 하여 아무런 근거도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무풍불기랑(無風不起浪, 바람이 없으면 물결이 일지 않는다)". 예를 들어, 왕망과 유씨서한왕조간에는 확실히 친척관계가 있었다. 그리고 유수와 왕망은 기본적으로 동일한 시기를 살았다. 그래서 "쫓아낸다"는 이야기를 만들려면 만들 거리는 된다. 왜냐하면, 왕망이 쫓겨난지 2년후에 유수가 황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체적인 점으로 들어간다면 전설과는 차이가 너무나 크다.

 

그리고, 비교적 엄숙한 사료인 <<삼국지>>에는 손권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적지 않았다. 그러나, 명나라때 만든 <<삼국연의>>에서는 손권이 "벽안자염(碧眼紫髥, 푸른 눈에 자줏빛 구렛나루)"이라고 적고 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과장'한 것이라고하였고, '믿을 것이 못된다'고 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야 말로 '바람이 없으면 물결이 일지 않는다'는 것에 해당하는 것으로 본다. 아무 이유없이 왜 다른 사람의 모습을 그렇게 표현했을 것인가? 2005년 여름, 나는 동부연해지방을 돌아다녔는데, 상해와 남경박물관에서 각각 몇몇인물이 나타나있는 오나라때 자기를 보게 되었다. 거기의 인물을 예외없이 높은 코에 깊은 눈을 가진 사람들이고, 수염이 긴 사람들이었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는 <<삼국연의>>의 정보가 진실한 것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동부연안지역에서 지금 통용되는 "오어(吳語)"를 분석해보니 상당히 많은 부분이 알타이어의 흔적을 가진다는 것이다(吳晨의 결론). 그리고, 남경에 수도를 정한 육조의 조소들중에는 대량으로 높은코와 깊은 눈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이미 고증(孤證, 하나뿐인 증거)가 아니다. 여러 측면을 고려하면 이렇게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삼국연의>>은 아마도 <<삼국지>>가 드러내지 않은 어떤 진실한 역사를 보충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기>>는 중국에서 특수한 의미를 지닌다. 학술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사기>>에 기록되어 있다면 다른 곳에 기록이 없더라도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것은 대단한 것이다. 이런 신뢰는 정말 높은 평가이다. 그러나, <<사기>>에 기재되어 있다고 하여 반드시 믿을만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거기에 아방궁을 불로 태웠다는 기록이 있는데, 현재 고고학에서 연구한 바에 의하면 "아방궁"은 원래 지어진 적이 없고, 그저 "기초"만 세우다가 중단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기>>에 쓰여있는 아방궁에 대한 기록은 잘못된 것이다. 그렇다고 사마천의 공로가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그저 객관적으로 당시의 역사기록상황을 기록하였던 것이다. 직접 겪은 사람이 아니라면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을 들을 수밖에 없고, 사마천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당시의 사료는 한계가 있었고, 정보를 전달하고 보존하는 것도 아주 어려웠으므로, 그 당시의 역사기록에 교란이 생긴 것이다.

 

실제로 내 생각으로 한나라 이전의 모든 역사는 대부분 그다지 정확하지 않다고 본다. 원고시대로부터 진나라때까지 사마천은 모두 전설에 의지했다. 그렇다면 신뢰도는 별로일 것이다. 많은 사건들이 그저 흰종이에 검은 글씨로 쓰여 있을 뿐, '왕망이 유수를 쫓아냈다'는 말처럼 진실과 거리가 멀 수 있다. 그러나, 비록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런 전설을 기록한 역사도 여전히 의미가 있다고 본다. 조심해서 취합하면 되는 것이고, 아무 기록도 없는 것이 더 무섭다.

 

요즘 전국각지에서는 관광지를 개발하느라고 난리다. 이 와중에 수많은 새로운 신화가 나타난다. 비록 저급하고 무료한 이야기이지만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우리 고향에도 관광지를 개발하고 있고, 효과도 괜찮은 편이다. 한번은 고향으로 가서 새로 개발한 계곡을 관광했다. 경치는 괜찮았다. 우리를 안내한 옛 동창은 특별히 그 동네의 "유명인사"를 전화로 불러냈다. 그는 이 골짜기의 곳곳에 신화와 전설을 만들어서 얘기했다. 원래 아무런 근거도 없는 것들이었으나 재미로, 또 관광을 위해서 요즘 만들어낸 것들이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아주 중요하고 위대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같았고, 한시간내내 입이 멈추지를 않았고, 이야기를 꾸며내는 능력이 보통이 아니었다. 그러나, 사실 그는 외지인이고, 대도시에서 일하다가 은퇴한 노동자였다. 고향사람들은 그를 매우 존경했고, 그가 얘기한 이야기들을 정리해서 인쇄출판하여 관광객들에게 팔려고 하고 있었다. 이년도 지나지 않아 그는 죽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 고향에는 또 얼마나 많은 "왕망이 유수를 쫓아낸 이야기"가 만들어졌을 것인가.

 

시간이 흐르면서 역사와 전설에 대하여 나름대로 느낌을 가지게 되었다. 보통 쓰는 말로 하자면 "역사서의 내용을 다 믿는 것보다는 아예 역사서를 보지 않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그리고 전설에 대하여도 역시 "바람이 없으면 물결은 일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 오늘 막 발생한 역사도, 사람들마다 말이 다르다. 왜냐하면 입장이 다르기 때문이다. 직접 겪은 사람도 서로 다르게 기재하고 해석한다. 그래서, 엄숙한 역사도 전설처럼 볼 수 있는 것이고, 전설도 엄숙한 역사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둘 다 적당히 고려해서 읽어야 하고, 글자를 너무 그대로 읽어서는 안된다. 이것이  바로 "역사"를 읽는 법이고, 또한 "역사"를 쓰는 법이다.

 

역사는 아마도 "엄숙한 착각"이라고 부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때때로 어떤 사람들이 그 착각을 수정한다고 하더라도, 그다지 이상하게 생각할 것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