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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분석/중국역사의 분석

왜 전세계에서 중국에만 환관이 있었는가?

by 중은우시 2007. 2. 8.

작자: 미상

 

최근 필자는 호남위성TV의 <<대명왕조. 1566>>을 보았고, 드라마 속에 나오는 여방, 양금수, 진홍, 황근등의 태감(太監, 환관, 내시)의 역할에 매우 관심이 갔다. 그래서 태감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태감을 얘기하자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서태후의 곁에 있던 이연영(李蓮英)을 떠올릴 것이다. 그래서, 태감이라는 단어난 자고이래로 사람의 마음속에서 아마도 뿌리깊은 '낮춤말'이 되어 버렸다. 그렇지 않은가? 그들은 황제의 위세를 등에 없고 온갖 못된짓을 하고, 심지어 황제를 손바닥위에 올려놓고 권력을 농단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명나라의 유근, 조흠, 위충현처럼 국정을 농단해서 망국으로까지 이끌어 천인공노할 악명을 후세에 남기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왜 전세계에서 소중화로 자처하던 조선을 제외하고는 중국에만 태감이 있었던 것일까? 일본에도 태감은 없다.

 

첫째, 봉건제도 그 자체는 가천하(家天下, 천하를 집안으로 보는 것)였다. 그래서 반드시 황자를 많이 낳아야 했고, 땅을 나누어 군, 왕이 함께 천하를 지켰다. 현대와 비교하면, 고대의학은 발달되지 않아서, 미성년자사망률이 높았다. 황제의 아들이라고 하더라도 어려서 죽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황제는 강산을 확보하기 위하여 후계자가 필요했고, 반드시 아이를 많이 낳아야 했다. 이를 위하여는 후궁을 많이 들여야 했다. 이런 황제의 곁에 있는 노비는 반드시 거세한 남자여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잡종이 나올 수도 있었고, 강산의 씨가 바뀔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 황제는 황권을 강화하고, 대신을 견제하고 독재정치를 시행해야 했다. 그러기 위하여는 반드시 노비적인 성격을 지닌 태감이 필요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봉건왕조는 세습제이다. 황제는 다른 사람이 자기의 황위를 빼앗는 것을 겁냈다. 일반적인 상황하에서 황제는 조정의 문무대신을 의심했고, 그들이 딴 마음을 품지 않도록 방비했다. 그러나, 조석으로 자기의 신변에 있고 자신이 말이라면 무엇이든 따르고, 신분이 천하고 후손을 두지 못하는 내시는 아주 믿을만했다. 환관은 궁중에서의 이런 특수한 지위를 활용하여 큰 권력을 차지하고, 심지어 황제를 조종하기도 했다. 이런 사람은 수량은 많지 않았지만, 노예근성은 강했다. 교활하고 음험했으며, 잔인하고 독랄했다. 일단 황제의 심복이 되면, 더욱 기승을 부렸다. 그들은 사당을 조직하고, 황제를 끼고서 가짜 성지를 내려보내고, 관직을 팔아먹고, 횡령을 서슴치 않았다. 충신들을 모함하고, 심지어 황제를 폐위시키고 황제를 죽이기까지 하였다. 중국의 봉건사회역사에서 환관의 권력독점은 국가와 민족을 해하는 것으로 끝나곤 했다. 그중에 동한, 당, 명의 삼대가 가장 심했다. 진나라의 조고, 동한의 후람, 장양, 당나라의 고역사, 구사량, 전령자, 명나라의 왕진, 왕직, 유근, 위충현, 그리고 청나라의 이연영은 역사상 악명을 떨쳤던 환관들이다.

 

그렇다면, 태감은 어떻게 하여 가짜로 성지를 내리고,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을까? 이것은 중국 고대사회의 정보통신과 교통운송이 발달하지 못한 것과 관련된다. 황제가 명령을 발포하면, 전화, 핸드폰과 전보는 쓸 수 없다. 비행기, 자동차등 빠른 교통도구도 없다. 이것은 반드시 황제의 신변에, 황제의 신임을 받는 사람이 황제의 뜻을 전달할 수밖에없다. 그래서 태감이 명령을 하달하게 되는 것이고, 마치 태감은 죽은 사람을 대신하여 말하는 '무당'과도 같이 황제의 말을 대신하여 전하게 되는 것이다. 성지를 전하는 것은 결국 그것을 고쳐서 전할 수도 있는 기회를 잡게 되는 것이다.

 

태감들은 왜 지고무상의 황권을 감히 잠식하고 나눠가질 수 있었는가? 봉건시대에 황제의 권한에 대한 어떠한 도전도 대역무도죄이고 9족을 멸할 죄었다. 일반적으로 대신들은 절대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하 어떻게 태감들은 이렇게 할 수 있었는가? 이것은 태감이 황제에 너무 가까이 있었다는 것이다. 즉, 최고권력에서 가장 근거리에 있고, 장기간 최고권력에 접근하면서 만지게 되면서 더 이상 그들은 황권을 신성하다고 보지 않게 되고, 점차 자기의 위치에 대한 포지셔닝을 바꾸어가게 되면서 최고권력을 엿보는 야심이 날로 팽창해진 것이다. 결국은 황권이 자기와는 그저 한 걸음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게 되고,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것은 마치 현대사회에서 지도자의 비서가 실제 권한을 넘어서 지도자의 권한을 행사하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중국의 태감제도의 화가 가장 컸던 시기는 동한과 명나라이다. 당나라도 포함된다. 이 몇개의 황조시대에는 태감이 심지어 황제를 죽이기도 하고, 스스로 황제를 골라서 옹립하기도 했으며, 결국 나라가 붕괴되기에 이르렀다.

 

당연히 태감도 사람이다. 많은 사람들은 가난한 집안 출신이다. 태감들의 결점은 거세하였따는 것이고, 그들의 일은 주인을 위하여 노예로서의 일을 하는 것이다. 당연히 어떤 사람은 심리적으로 변태적이 될 수도 있다. 그리하여 여러가지 야사와 전설들이 전해지는 것이다.

 

당나라때는 내시성(內侍省)을 두고 그 곳의 우두머리를 감(監) 및 소감(少監)이라고 불렀다. <<요사. 백관지>>에 의하면 요나라때의 남면관의 여러 "감'의 지객중 "태감(太監)"이라는 직책이 있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부를 때는 그저 "감"이라고 불렀다. 예를 들면, 태부감(太府監)과 같은 것이다. 원나라때는 태부와 각 감이 있었는데, '태감'이라는 관직이 있었다(예를 들어 의문감, 전목감, 전실감, 태부감등에 모두 태감을 두었다). 명나라때는 환관들이 이끄는 24아문이 있었고, 그 곳에 장인태감등의 직책을 두었다. 궁내의 내시들은 황제와 그 가족을 모신다. 명나라 중엽이후, 태감의 권력이 확대되었고, 사신, 감군, 방어, 정찰등의 대권을 장악한다. 청나라때는 태감은 환관을 가리키는 말이 되어버린다. 총관태감등을 수령으로 하고 내무부에 소속시켰다.

 

환관은 속칭 태감 또는 노공(老公)이라고 한다. 문서상의 칭호는 여러가지있다. 예를 들면, 엄인, 엄신, 환자, 중관, 내관, 내신, 내시, 태감, 내감등이 그것이다. 이런 남자의 생식기를 제거하고 남자도 여자도 아닌 중선인은 역대왕조에서 궁중내에 있으면서 황제와 그 가족을 모셔왔다.

 

기록에 의하면, 중국의 선진시대와 서한시대의 환관은 전부 거세한 사람은 아니었다. 동한때부터 전부 거세한 사람을 쓰기 시작했다. 이것은 황궁의 내궁에는 황태후, 태비, 황후, 비 및 궁녀등 여자들이 많고, 남자들의 출입이 허용되지 않으므로, 불행한 일이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고, 나머지 성년남자들은 궁중내에서 일을 맡지 못하도록 하게 된 것이다.

 

중국의 역대환관의 수는 명나라때가 가장 많았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10만명이라고 한다. 청나라때는 명나라때 커진 환관제도를 수술하였고, 숭정말년의 9만여명을 9000여명으로 삭감하였다. 청나라의 태감은 등급이 엄격했다. 청나라 궁중내에는 태감을 관리하는 기구인 경사방(敬事房)을 두었다. 그리고 궁전감판사처(宮殿監瓣事處)도 두었다. 대총관, 부총관, 대반수령, 어전태감, 전상태감, 일반태감과 아래의 소태감등으로 나누었다. 청나라 말기가 되어서는 태감등급은 더욱 복잡하게 되었다. 궁전감에는 총감, 수령, 장안, 회사, 소태감으로 구분되었다. 각처는 수령, 대사부, 사부, 대반, 진인, 도제등의 구분이 있었다. 이처럼 층층이 나뉘어서 한등급이 다른 한등급을 관리하고 통제했다.

 

청나라 말기에는 하북성의 청현, 정해, 창주, 임구, 하간, 남피, 탁현, 조강, 교하, 대성, 패현, 문안, 경운, 동광, 그리고 북경시의 창평, 평곡, 그리고 산동성의 낙릉은 모두 태감을 배출하는 고장으로 유명했다. 태감은 가난한 집안출신이고 생활상의 곤란으로 인하여 아이를 궁에 들여보내서 살 길을 찾곤 하였다. 당시 겨우 10살정도면 정신(淨身)을 했다. 이연영은 8세때 정신을 하고 9살때 궁에 들어갔다. 민국초기에 13살의 어린태감인 마덕청은 부의의 궁중에 들어가서 일을 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