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제갈량)

제갈량의 네트워크

중은우시 2007. 2. 16. 19:35

작자: 이중천(易中天)

 

사실상 제갈량은 인간관계네트워크가 잘 갖추어 있었다. 그의 장모와 유표(劉表)의 후처는 친자매이다. 모두 채풍의 딸이오, 채모의 누나들이다. 이렇게 보자면, 유표는 제갈량 처의 이모부이고, 채모는 제갈량 처의 외삼촌이다. 제갈량 본인은 채씨의 외손녀사위이다. 유표는 형주자사이고, 채씨는 양양의 망족(望族)이었다. 채모는 유표의 심복이었다. 제갈량이 이런 정치적인 자원을 가지고 있다면 괜찮은 조건이 아닌가?

 

제갈량의 이 혼인에 대하여 말하자면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해진다. 제갈량의 장인은 황승언인데, 당시의 명사였다. 이 사람은 제갈량을 아주 잘 보았다. 그래서 딸을 그에게 시집보내려고 생각한다. 황승언은 제갈량에게 "나에게 딸이 하나 있는데, 얼굴이 못생겼다. 그러나 재주는 뛰어나다. 네가 받아주겠는가" 그러자 제갈량이 동의하였다고 한다. 황승언은 즉시 마차로 딸을 그에게 보냈다고 한다.

 

이 사건에 대하여 역사학자들은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 어떤 사람은 황승언의 말이 겸양의 말이라는 것이지, 실제로 추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황승언이 이렇게 말한 것은 제갈량을 시험하려는 것이었고, 그가 색(色)을 중시하는지 재(才)를 중시하는지를 보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황씨녀가 못생겼다는데 한표를 던지고 싶다. 첫째, 황승언이 말한 바에 의하면 "추녀가 있는데, 머리는 노랗고 얼굴은 검다" 만일 겸양한 말이라면, 이렇게 구체적이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재주는 좋다'라고 한 말이 있는데, 이것은 겸양한 말이 아니다. 둘째, 다른 사람의 반응도 증거가 된다. 이 일을 기재한 <<양양기>>에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당시 사람들이 농담으로 하는 속담이 있는데, '공명처럼 부인을 선택하지 말라. 바로 아승(황승언)의 추녀를 얻지 않았는가'라는 말이 있다" 이로써 볼 때, 황씨녀는 확실히 못생긴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제갈량은 왜 이 혼인을 받아들인 것일까? 여기에도 두 가지 견해가 있다. 하나는 제갈량이 처를 취하는데 재주를 중시하고 용모를 중시하지 않았는데, 이는 고풍양절(高風亮節)이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완전히 반대인데, 제갈량이 중시한 것은 바로 황승언의 사회적 명망과 사회적 관계였다는 것이다. 처가 약간 추하더라도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첩을 들이면 되기때문이다. 처는 덕을 보고 선택하고, 첩은 용모를 보고 선택하면 된다는 것이 당시의 일반적 통념이었다는 것이다. 도대체 어떤 견해가 맞는지는 필자가 당돌하게 고인을 평하기 어렵다. 독자들이 잘 생각해보라. 그러나, 이런 관계를 가지고 있으면, 제갈량이 유표의 형주에서 관직을 하나쯤 얻는 것은 매우 쉬웠을 것이다.

 

더구나, 제갈량은 또 다른 소집단에 속해 있었다. 이 소집단의 사람들은 모두 제갈량을 높이 평가했고, 자주 제갈량을 선전해주었다. 사실상 유비가 제갈량을 알게 된 것도, 바로 서서가 추천했기 때문이다. 이외에 형주의 명사인 사마휘, 방덕공등의 사람들도 제갈량에 대하여 높이 평가했었다. "와룡"이라는 칭호도 사마휘가 제갈량에게 붙여준 것이다. 방덕공은 자기의 아들을 제갈량의 둘째누나와 결혼하도록 하였다. 이로써 볼 때, 제갈량이 비록 초려에 은거해 있었지만, '그와 얘기를 나누는 사람은 큰 선비이었고, 일반 백성과는 왕래하지 않았다" 그와 관계가 있거나 교분이 있는 사람은 고관이 아니면 명사들이었다. 그의 정치자원과 정치조건은 당시의 다른 사람들보다는 훨씬 좋았다. 예를 들어, 가익은 가족배경도 없고 아무런 관계도 없었으며 아무도 그를 선전해주지도 않았다. 그저 자기 혼자 세상에 부딛치며, 운에 맡기고, 토비와 군벌의 틈에서 굴러야 했다. 맞막에 조조에게 가서 고관이 되고 편안히 죽었는데, 그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제갈량은 조건은 정말 좋아보인다. 그는 좋은 배경이 있고, 좋은 네트워크가 있고, 소집단이 있어서, 만일 정치를 했다면 아주 편하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건안12년이전에 그는 거의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난세에는 생명이나 구차하게 연명할 뿐, 제후들에게 이름이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모습을 보였고, 남양의 융중에서 늙어죽으려고 작정한 것처럼 보였다. 이것은 무엇때문인가?

 

제갈량의 뜻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위략>>에 의하며, 제갈량은 일찌기 그의 세명의 친구 석도(광원), 서서(원직), 맹건(공위)간의 이런 대화가 전해진다. 제갈량이 "너희는 관리를 하게 되면 자사, 군수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친구가 반문했다. "자네는?" 제갈량은 그저 미소를 띄우고 대답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실 답안은 일찌기 있었다. "매번 스스로를 관중, 낙의에 비유했다" 관중이 누구인가? 명재상이다. 낙의는 누구인가? 명장군이다. 이것은 더 이상 분명할 수 없다. 제갈량의 이상은 왕이나 황제가 되는 것이 아니었고, 관리로서 작은 지방을 다스리는데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현명한 군주를 모시고 사해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정하며 중원을 차지하는데 있었다.

 

분명하게 이것은 곽가가 말한 것과 마찬가지로, 스스로를 위하여 좋은 군주를 찾는데, 찾아갈 수 있는 사람은 많았다. 예를 들면, 유표로 그는 바로 눈앞에 있었다. 그리고 인척간도 되었다. 조조와 손권은 모두 병마를 모집하고 현사를 모집하고 있었다. 그러나, 제갈량은 마치 아무런 흥미도 없었던 것같다. 이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원인은 아주 간단하다. 유표는 너무 수준이 낮았다. 조조는 너무 강했다. 손권의 공간도 너무 좁았다.  유표의 수준이 낮았다는 것은 당시 중원인사들이 형주로 피난온 경우가 많았다. 유표는 그러나 아무도 쓰지 않았다. 제갈량이 나서더라도 그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조조의 쪽에는 인재가 많았다. 조조 자신도 강자이다. 제갈량이 진짜로 간다고 하더라도 어찌될지 알 수가 없다. 아마도 제갈량은 자신이 가더라도 조조에 의하여 중용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