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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정치/중국의 대외관계

중국과 일본의 역사상 4차례의 전쟁

by 중은우시 2007. 2. 12.

제1차전쟁: 당고종의 신라의 항왜 지원전쟁

 

당나라 초기, 한반도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이 정립하고 있었다. 그들은 피차 상대방을 공격하여 점령하려고 하고 있었으나, 실력이 상대방을 압도하지 못하였다. 고구려는 진, 한, 수나라를 거치면서 수, 당과 관계가 악화됨에 따라 왜구와 관계개선을 모색하게 되었다. 백제는 원래 왜구와 관계가 밀접하였다. 신라는 왜구와 원한이 있어, 당나라에 접근하였다. 이리하여 당시 한반도에는 고구려, 백제, 왜구를 한 축으로 하고, 신라, 당나라를 한 축으로 하는 정치국면이 형성되었다.

 

이 당시에는 당나라의 국력이 강했고, 일본은 아직 강국으로 성장하지 못한 단계였다. 그리하여, 왜구가 당나라에 대항하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다. 그리하여, 이 전투에서는 당나라가 승리를 거두게 된다. 이후 일본은 견당사를 중국으로 보내고, 중국천자에 책봉을 받으며, 중국의 문화와 기술을 배워갔고 이로써 일본을 개조하고자 하였다.

 

제2차전쟁: 명만력때의 조선의 항왜지원전쟁

 

명나라 만력제때는 이미 명나라 말기이고, 이미 상당히 낙후된 때였다. 만력은 유명한 혼군이며, 일년내내 조회를 열지 않고 주색에 빠져 살았다. 그러나, 이런 시기에 파견된 군대도 일본과 싸우는데는 지장이 없었다. 당시 명나라는 일본군에 맞서서 싸웠는데, 마치 독수리가 작은 닭과 싸우는 것이었다. 명나라 만력때의 조선과 명나라는 아주 관계가 좋았다. 자주 사신을 상호 파견하고, 정치경제적으로 모두 괜찮은 관계였다. 그리하여, 중국의 역사자료에 기재가 없는 것도 조선의 역사자료에 기재된 경우가 많았다. 풍신수길을 당시 일본을 통일한 장군이었고, 그는 야심이 컸다. 일본통일후 인근국을 침범하여 동아시아의 패주가 되고자 했다. 첫번째 목표는 조선이었다. 조선은 당시 기강이 문란하고 전국 300여개 군현은 대부분 방어할 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전쟁이 시작되고서 조선은 당랑거철과 같이 기본적인 방어능력도 없었다. 만력20년 12월 ,명나라정부는 송응창을 경락사로 이여송을 동정도독으로 정해서 4만명을 파견해서 압록강을 건넌다. 명나라군대는 대첩을 거두고 일본군을 궤멸한다. 그래서 평화협상이 시작된다. 4년후 일본은 다시 재란을 일으킨다. 당시는 명나라 군대가 대부분 귀국한 이후였고, 조선은 다시 전쟁을 벌인다. 명나라는 일본이 약속을 어긴데 분노하여 천, 섬, 절, 계, 요의 육군과 복건, 오송의 수군 모두 14만을 조선에 다시 파병한다. 전쟁은 7년간 계속되었고, 결국은 일본이 실패하여 한반도에서 물러났다.

 

제3차전쟁: 청말의 청일갑오전쟁

 

이 전쟁은 아주 유명하다. 많은 사람이 알고 있어 더 이상 소개할 필요도 없을지도 모른다. 중국과 프랑스와의 전쟁이후 갑오전쟁이 발발하기까지 9년동안은 중국의 19세기 하반기의 가장 좋은 시기였다. 이 기간동안 국내에도 큰 난이 없었고, 동아시아의 국제환경도 완화되었으며, 중국과 서방의 여러 나라와도 평화를 유지하던 상태였다. '부국강병'을 모토로 한 양무운동은 30년을 거쳐 효과가 나타나고 있었다. 일본은 이 청일전쟁에서의 승리로 동아시아강국으로 떠올랐고, 반식민지의 지위를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이 전투는 중국과 일본의 전투에서 중국측의 첫번째 치욕이다. 대만을 할양해주어 해상에서 포위당하는 형국이 되었고, 2억냥백은을 배상금으로 지급하여 일본은 많은 경제적인 이익과 군비를 확충할 수 있었다. 일본은 이 때부터 동북을 삼키려는 야심을 키워갔다.

 

제4차전쟁: 중화민국의 항일전쟁

 

일본이 노구교사태이후 중국대륙을 전면적으로 침략한 후 1945년 일본의 패퇴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이다. 이 때, 일본은 중국대륙 전체를 상대로 전투를 벌였으나, 제2차세계대전에서의 패배로 중국 대륙과 동북지방(만주국)에서 물러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