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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정치/중국의 대외관계

모스크바의 중국성(中國城)

by 중은우시 2007. 1. 3.

중국성: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중심의 고건축군의 하나. 붉은 광장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14세기말에 토성을 건축했으며, 1535-1538년에 돌로 된 성벽, 성루, 6개의 성문을 만들었다. 성벽은 두께가 6미터이고, 높이가 6.3미터이다. 붉은 광장과 크레믈린궁등의 건축군과 함께 모스크바시의 핵심을 구성한다. 16세기에서 20세기초까지 모스크바의 상업중심지였다. 여러번 무너졌으며, 현재는 일부 성벽과 건축물이 남아 있고, 지하철역등 새로운 건축물이 들어서 있다.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에 간 사람은 이 도시에 많은 곳이 "중국성"이라고 명명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예를 들면, "중국성" 지하철역, "중국성" 골목이 있고, 심지어 중국의 고성의 성문과 탑루와 비슷한 곳도 있어, 모스크바에 도착하는 중국인들이 매우 친근하게 느껴지도록 만든다. 사실, 시간을 500년전으로 되돌린다면 모스크바의 중심지에는 중국의 고성을 닯은 성안의 성이 있었고, 이것이 바로 전설적인 '중국성'이다.

 

'중국성'을 만든 사람은 예레나. 그린스카야(1508-1538)이며, 보통 사람들은 잘 들어보지 못했겠지만, 그녀는 러시아 역사상 첫번째 짜르인 이반 대제의 모친이다. 더 재미있는 것은 이 러시아 역사상 유명한 미녀는 중국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이다. 원래, 예레나의 먼 선조는 14세기 몽코 킾차크한국의 풍운인물 마마이(馬邁)였다. 역사학자의 고증에 따르면, 마마이는 중국에서 건너간 한족 또는 거란족이다. 그는 지용을 겸비한 것으로 유명했다. 그가 킾차크한국의 만부장(萬夫長)을 맡고 있을 때, 마마이는 백전불패의 전적으로 칸국의 군사와 정치의 요인이 되었다. 그는 칸과 자녀를 결혼시켜 인척이 되었을 뿐아니라, 칸이 죽은 후에는 직접적으로 킾차크한국의 대권을 장악하였다. 마마이가 정권을 잡았던 23년동안 킾차크한국의 칸은 25번 바뀌었지만, 마마이는 여전히 그 자리를 유지했었다. 이로써 그의 권력이 얼마나 강했었는지를 알 수 있다.

 

당시에는 이미 몽고철기군의 위풍은 사라졌지만, 마마이는 자기의 군사적인 재능을 십분 발휘하여 장기간동안 몽고인들은 러시어의 여러 공국(公國)들에 대하여 지배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내분이 계속되고, 실력이 계속 쇠퇴하던 킾차크한국에서 마마이의 군사적인 업적은 그저 회광반조에 불과했다. 중앙아시아와 동유럽을 20여년간 종횡한 후 마마이는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다. 1380년 모스크바 대공 드미트리가 이끄는 러시아공국 연합군은 마마이와 결전을 벌인다. 결국 마마이는 패전한다. 이어서 킾차크한국은 내분이 발생하였는데, 마마이는 정적에게 패하여 쫓겨나고 다음해에 타향에서 비참하게 사망한다. 비록 마마이의 일생은 비극으로 끝났지만, 그는 러시아 역사상 위대한 명성을 남긴다. 그에 대한 전설은 아직도 러시아에서 전해지고 있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그를 "러시아의 신"으로 떠받든다. 마마이의 패망이후, 그의 후손들은 도망길에 들어선다. 오랫동안의 유랑끝에, 그의 후손들은 리투아니아에 정착한다. 나중에는 다시 모스크바 부근으로 이주한다. 자기의 가족을 기념하기 위하여 마마이의 후손들은 자기의 영지에 "소중국성"이라는 장원을 건설한다.

 

시대가 흘러 마마이의 후손들은 그린스키라는 성을 쓰기 시작하고 '공작'의 작호를 받게 된다. 1525년, 바실리 그린스키공작은 모스크바 대공 바실리3세의 요청을 받아, 연회에 참석한다. 연회에서 바실리3세는 그린스키공작의 딸인 예레나 그린스카야의 미모와 고귀한 기품에 반하여, 그날로 그녀의 치마밑에 무릎을 꿇는다. 수도로 돌아간 후, 바실리 3세는 바로 부인과 이혼하고, 예레나에게 구혼한다. 그린스키공작은 이 요청을 수락한다. 그래서 중국혈통을 지닌 예레나는 모스크바대공의 새부인이 된다. 바실리 3세는 이 젊은 부인의 말이라면 뭐든지 들어준다. 이 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바실리3세는 자기의 신앙과 생활습관까지 바꾸고, 자기의 수염까지 깍아버린다. 1533년, 바실리3세가 병으로 사망한 후, 그는 예레나의 3살된 어린 아들 이반에게 대공의 지위를 승계하도록 하며, 예레나는 섭정이 된다. 마마이의 가족은 백년의 시간을 두고 다시 모스크바공국을 장악하게 된 것이다.

 

예레나는 비록 여자였지만, 아주 똑독하고 능력이 있었다. 섭정을 맡은 때로부터 신비스럽게 급사할 때까지, 짧은 5년의 시간내에, 그녀는 다른 군왕들이 50년을 하더라도 이루지 못할 위업을 달성한다. 서방에서 그녀는 당시의 군사강국 스웨덴을 설득하여 러시아와 리투아니아의 전쟁에서 중립을 지키도록 하는데 성공하고 이로써 이 전쟁에서 우세를 점할 수 있었다. 동방에서 예레나는 한 파는 끌어들이고 한 파는 치는 전략으로 중앙아시아의 칸국들과 합종연횡을 한다. 이로써 제정러시아의 이후 중앙아시아에서의 확장에 기초를 닦아 놓는다. 국내에서는 이 여섭정은 철완으로 적수들을 제거했을 뿐아니라 중앙집권을 강화하고 국내건설에 매진한다. 예레나의 섭정초기에 바실리3세의 두 동생도 섭정리스트에 올라 있었고, 당시의 러시아는 삼두정치가 출현하였다. 그러나, 예레나는 돌연 근위병을 보내어 두 시동생을 체포하고 반란죄로 처형한다.

 

대권을 장악한 후, 예레나는 한편으로 화폐를 통일하고, 공국의 세수체계를 정비한다. 다른 한편으로 도시건설을 적극 추진하였는데, 모스크바의 "중국성"은 바로 이때 탄생한다. 그 때 모스크바는 내외의 양층으로 나뉘는데 내부의 핵심지구는 크레믈린이다. 즉, 왕실구성원과 대귀족이 거주하고 활동하는 지역이었으므로 전체 모스크바와 전체 공국의 핵심지역이었다. 그러나, 이 지역은 자주 비적들의 공격을 받았다. 통치핵심지역의 안전을 위하여, 예레나는 모스크바의 전성인구를 출동시켜 1개월내에 성벽을 건설한다. 성벽과 탑루의 건설에서는 중국적인 영향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자기의 조상이 만든 "소중국성"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예레나는 특히 이 성벽과 크레믈린과의 중간지역을 "중국성"이라고 부르게 한다. 저명한 붉은광장도 바로 이 지역내의 한 지역이 위치한다. 사실 모스크바 뿐아니라, 모스크바공국의 다른 도시에도 많은 지방이 "중국성"이라고 그녀에 의하여 명명된다.

 

이후의 역사에서 이 성벽은 계속 수리, 보수되었으나, 도시의 확대와 더불어, "중국성"은 성안의 성이 되었다. 1930년대에 이를 때까지, 모스크바의 "중국성"은 기본적인 면모가 그대로 있었다고, 중국적인 풍격을 지닌 성벽과 탑루는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제2차세계대전때 모스크바에서 발생한 방어전으로 인하여 중국성의 성벽과 탑루는 심하게 파괴된다. 도시를 재건하면서 모스크바시정부는 대부분의 성벽을 허물어 버린다. 지금에는 "중국성"이 그저 몇개의 탑루를 남기고 있고, 중국성이라고 이름붙인 건축, 거리가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