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이 송나라때 독립한 이래로, 중국-월남의 국경선은 여러번 변동을 거쳤다.
송나라때, 광원주(廣源州, 지금의 월남 高平省)의 토호추장 농지고가 반란을 일으키나, 송나라에 의하여 평정된다. 안남(安南, 당시 월남)은 송나라에 광원(지금의 월남 고평성)과 양동(지금의 광서 나파현 부근)의 영토를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송나라 황제는 광원은 멀고 지키기 어렵다는 이유로 광원주를 안남에 하사한다.
원말명초, 월남은 중국내란을 틈타, 변경을 200여리 넘어들어와 중국의 녹주(祿州, 현재의 월남 녹평현)과 서평주(西平州, 지금의 월남 양산)을 점령했다. 그리고 국경선을 현재의 월남 양산 서남의 귀문관(鬼門關)에서 오늘날의 진남관(鎭南關, 友誼關)부근까지 밀어올렸다. 월남은 또한 중국 광서 사명부에 소속된 여섯개의 현(지금의 월남 탈랑현등 현 중-월국경선부근의 각현)을 점령했다.
명나라때, 월남은 중국이 월남에서 철군하는 것을 틈타, 중국운남의 영원주(寧遠州, 현재의 월남 내주 및 내주이북지구)를 점령했다.
명나라후기에, 월남에 내란이 발생하고, 내란의 일방 안남왕은 광동의 육동지구(현재의 광서 북륜하이북에서 광서의 강평)을 중국에 반환하였다. 운남쪽에서는 호접, 진원(중국운남성의 율파이북)을 중국에 되돌려주었다.
청나라초기, 운남의 건수현 외육맹(지금의 중국금평현, 월남의 봉토현에서 월남내주이북의 지역)을 중국에 붙인다. 즉, 명나라는 운남의 영원주를 중국으로 회복시켰다.
청나라 옹정제때, 월남은 운남쪽으로 국경선을 밀고 들어왔다. 대도주하(월남 황수피현 화하강이남)에서 소도주하(현재의 운남 마관성외 소도주하)로 올라왔다. 옹정황제는 월남에 대대로 매우 공순하였다는 이유로 소두주하이외의 영토를 월남에 하사했다.
프랑스의 월남침입시기에, 청나라는 병사를 보내어 프랑스군을 막았다. 흑기군의 도움하에, 월남북방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프랑스도 중국대만의 팽호지구를 점령하고, 대륙과 대만의 연결을 절단시키며, 중국남양수사(南洋水師)를 전멸시킨다. 그래서 이홍장과 프랑스는 <<중프신약>>을 체결하는데, 조약에는 중-월 국경선을 현재의 경계를 기초로 변경하기로 규정하였다.
중-월 국경선은 역사상 한번도 전면적으로 측량조사된 적이 없으므로, 중국의 국경획정관리는 한편으로 협상을 준비하면서, 한편으로 군대를 보내어 국경선부근의 유리한 지형과 월남국경선내의 중국에게 아주 중요한 지역을 점령했다.
중국의 국경획정관리는 먼저 프랑스에 양산에서 고평에 이르는 일선을 정부 중국에 귀속시키는 방안(이 방안은 송나라 이래 월남에 빼앗긴 중국영토를 전부 회수하는 것이다)을 제시하였다. 프랑스의 협상관리는 동의하지 않았다. 나중에 중국의 국경획정관리는 다시 월남의 문연현등 3개현(현재의 월남의 동등현등 삼개 현)을 중국에 귀속시키는 방안을 제시했고, 프랑스의 협상관리는 처음에는 동의했으나, 나중에는 떼를 쓰고 최후의 조약에서는 회수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중-프(월)의 변경조약에서 중국측의 득실은:
광동방향(현재 이미 전부 광서성에 귀속됨)에서는 월남의 비지(飛地, 연결되지 않고 고립된 맹지)인 강평, 황죽, 석각, 구동(현재의 광서 흠주의 강평, 황죽)이 중국에 귀속된다. 청사에서는 광동서남의 강평, 황죽일대는 사륵에서 국경선을 바다로까지 확대하였다. 남북 모두 40리이며, 동서 모두 60리이다라고 적었다.
십만대산에서는 하나의 삼불관지(三不管地, 광동도 원치않고, 광서도 원치 않으며, 월남도 원치 않는 땅)이 있는데, 조약에서는 이 지역을 중국에 귀속시켰다. 십만대산 분모령, 동중(현재의 광서 동중)은 모두 중국에 귀속되었다. 가륭하 팔장등 각지의 월남족은 프랑스인을 두려워하고, 중국과는 글도 같고 민족도 같으므로, 중국관리에게 프랑스인의 통치를 받기 싫다고 게속 제기하였고, 청나라 옷으로 갈아입었다. 중국-프랑스관리가 현지의 국경선을 탐사조사할 때, 월남민들은 전부 국경선이 남쪽이라고 하였고, 자기의 마을은 중국에 속한다고 말하였다. 이런 상황은 국경선 연안지역에서 여러번 발생하였다. 그리하여 중국이 더 많은 영토를 회수할 수 있었다. 청사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광동흠주의 경계선의 서쪽국경인 분모령, 가륭, 팔장일대는 국경선을 가륭하까지 넓혔고, 남북 모두 40여리, 동서 모두 300여리가 된다.
광서방향의 진남관이 있는 곳은 모두 험준한 높은 산이고, 변방의 중요한 지구이다. 청나라 협상관리의 노력하에, 진남관 동서 수십킬로미터내에서 중국국경선을 월남쪽으로 20 내지 50리를 확장하였고, 많은 험준한 요새가 중국에 속하게 되었다. 청사에서는 진남관의 동쪽 경계는 원래 미강산이었는데, 현재 파천산까지 확대하였다. 영토 50리를 확대하였다. 서쪽경계는 각구에서 20리를 확대하였다. 그리고 사선으로 서북방향과 운남국경선을 연결시켰는데, 사선은 역사적인 국경선보다 20내지 50리를 확장한 것이다. 선내의 마을은 중국측에 속하건 월남측에 속하건 모두 중국에 귀속시켰다.
광서 용주 서쪽의 금룡동은 변방의 요새이다. 역사상 중국관할이었다. 그러나, 당시 현지관리가 월남 고평 하량주에 채무대신 땅으로 갚은 곳이었고, 그 땅이 단계산맥중에 있으며 길이가 60여리였다. 그래서 매우 험준한 요시의 입구였다. 이 땅은 90여개의 마을이 포함되어 있는데, 협상관리의 노력하에, 이 땅과 이판의 3개 마을을 모두 중국에 귀속시켰다.
운남방향으로, 중국은 제2단의 만충, 동뉴의 두개의 채를 회수하였다(이 두개의 채는 이미 안남에 40여년을 통치받았고, 종횡30리이다), 제3단 국경은 녹수하동쪽으로 국경선을 40여리 확장하였다. 제4단은 전봉, 사인채등 6개마을을 중국에 귀속시키고 국경선을 30여리 확장하였다. 이상 모두 확장한 국경선은 100여리이고 중국은 토지를 잃은 것은 없었다.
중국은 마율파의 도룡, 맹동, 남온하를 회수하였고, 남단산이북에서 서쪽으로 월남 구두채(소도주하에 위치함), 동으로 월남 청수하(현재의 노산하)일대의 지방은 모두 중국관할로 귀속되었다. 이 변경은 대소도주하의 사이에 있고, 원래 중국인 남량, 맹강등지는 회수하지 못하였다. 회수면적은 약 600평방킬로미터이고, 회수하지 못한 지구는 약 400평방킬로미터이다. (명나라때 대소도주하사이의 1000평방킬로미터는 원래 중국땅이었는데, 청나라의 옹정제가 월남에 하사한 바 있다)
운남의 건수성 외육맹(오늘의 중국의 금평현, 월남의 봉토현 에서 월남내주이북에 이르는 지구) 는 건륭연간에 중국에 귀속된 이래로 중국의 관할을 받아왔다. 그러나, 중국은 마율파남쪽의 도룡, 맹동, 남온하지구를 취하기 위하여, 이 지구로 타협을 했다. 그래서 육맹중 삼맹(월남 내주, 봉토현등)을 프랑스에 귀속시켰다. 청정부는 마율하의 땅은 비교적 비옥하므로, 영토를 회수했을 뿐아니라 실리도 취하였다. 그러나 삼맹의 토지는 모두 산지로, 관할하기 불편하였다. 그리고 당시 삼맹의 토호추장은 1840년때 다시 월남에 붙었고, 월남의 관직을 받았다. 동시에 중국의 관직도 받아 두 나라의 공동관할지가 되었었다. 종합하면, 삼맹의 상실은 중국으로 하여금 토지면적 1600평방킬로미터를 잃게 하였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보면, 운남방향에서 중국라오스국경을 포함하지 않고 약 1000평방킬로미터를 손해봤다. 광동,광서방향을 얘기하자면 이 국경선은 중국에 유리한 것이다.
그래서, 청나라와 프랑스의 국경선획정은 중국에게 있어서는 얻고 잃은 땅이 대체로 상당하였다. 그러나, 중국이 얻은 것은 모두 해안과 분지에 가까운 비옥한 토지였고, 월남이 얻은 것은 관할하기 힘든 산지(당시 태족은 이미 한인이나 월남인에 대하여 모두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국경획정때, 변경에 사는 월남인들을 프랑스의 통치를 두려워해서, 옷을 갈아입고 중국의 관할을 받으려 했다. 그래서 국경선의 여러 월남마을이 중국에 속하게 되었다. 중국의 사서를 보면, 청정부는 이번 국경획정에 비교적 만족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실지조사시에 청나라군이 이미 유리한 지형을 점령하고 있었고, 당지의 월남민들은 프랑스통치를 받지 않으려 하였으므로, 중국은 이미 많은 이득을 얻고 있었다. 청나라가 회수한 토지는 수백리에 그치지 않았다. 프랑스의 사서에 의하면 이번 국경획정때 중국에 광범위한 토지에서의 이득을 주었다고 적고 있다. 실제로는 잃고 얻은 토지가 대체로 상당하고, 다만 중국이 얻은 토지가 약간 더 좋았을 뿐이다.
건국이후, 월남은 계속 국경획정이 월남에 불공평하였다고 생각하였고, 월남이 손해봤다고 생각했다. 중국에 대하여 영토를 계속 요구하기 시작하였다. 1979년, 중국은 분쟁있는 영토는 겨우 5평방킬로미터라고 생각한다.
1979-1989년의 중월전쟁을 거쳐, 중국은 대부분의 국경선의 기선점을 점령하였다. 광서와 월남의 국경선의 정호산, 법카산; 운남과 월남의 경게선의 임산, 나가평대산, 노산, 자음산, 이런 고지는 모두 중국군이 지배하였다. 변경에서 존재하는 분쟁지구 예를 들어 월남 황수피교계의 남목평등을 합쳐 새로 늘어난 분쟁지구는 200여평방킬로미터가 되었다. 이 영토는 모두 중국군인이 피를 흘려 얻은 것이며, 중국이 통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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