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의 수도 헬싱키의 한 큰거리에는 큰 화강암조각상이 서 있다. 군복을 입은 군인이 큰 말을 타고 형형한 눈빛으로 전방을 바라보고 있다. 그는 바로 핀란드사상 유명한 전설적인 인물이며, 제6대 대통령인 칼. 구스타프. 만너하임(Carl Gustaf Emil Mannerheim)이다.
1867년 6월 4일, 만너하임은 핀란드(당시 제정러시아에 예속되어 있었음)의 몰락한 귀족가정에서 태어난다. 집안의 7명의 아들중 셋째아들이다. 만하임의 부친은 시인, 작가 겸 상인이었다. 나중에 파산하여 집안을 버리고 프랑스로 가서 예술창작에 몰두했고, 모친도 곧 세상을 떠난다. 마침 외삼촌이 만너하임의 후견권을 갖게 됨에 따라, 그는 길거리를 유랑하지 않아도 되게 된다. 1887년, 만너하임은 세인트 페테르스부르그의 니콜라스기병학교에 합격한다. 이곳은 제정러시아에서 정예기병을 양성하던 2년제 학교였다.
만너하임은 키가 크고 잘 생겨서, 학교내에서 금방 두각을 나타낸다. 졸업후 그는 원하던 성페테르스부르그의 기사근위대에 들어가고, 황후 피로도로프나의 경비업무를 맡는다.
1897년 만너하임은 '왕실마필관리소'로 옮긴다. 그는 말의 조련에 재능이 있어서, 기병부대를 위하여 말을 종마와 특종마를 구매하는 업무를 맡는다. 이 기간동안 그는 기병의장대를 훈련시키는 업무도 맡는다. 1904년, 그는 중국 만주리에 있는 제52용기병단에 중령으로 나간다. 이후 그는 러일전쟁에 참전하고, 봉천전투(지금의 심양)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대령으로 승진한다.
1906년 3월 제정러시아 총참모부는 만너하임에게 비밀임무를 하달한다. 즉, 당시 제정러시아는 중국의 몽고, 신강등의 지역을 탐내고 있었는데, 프랑스의 과학자인 파울로 패리아이트는 제정러시아정부에 과학탐사활동을 하겠다고 신청한다. 노선은 타슈켄트-카스-나포박-난주-대동-북경이었따. 제정러시아 총참모부는 이를 좋은 기회로 여긴다. 제정러시아는 중국서북부지역을 탐냈으나 이 지역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문제였었다. 그래서 이를 중국에 대한 군사정보를 취득할 절호의 기회로 여기고 비밀리에 러시아의 장교 한 명을 패리아이트의 탐사단에 끼워넣기로 한다.
제정러시아총참모부는 고르고 고른 끝에 만너하임을 선택한다. 만너하임은 똑똑하고 일을 잘했을 뿐아니라, 러시아군에서 몇 안되는 '중국통'이었고, 더욱 중요한 것은 그가 핀란드 여권을 소지하고 있어 중국측의 의심을 살 가능성이 적었다는 것이다. 만너하임에게는 중국서북부의 군사, 정치정보를 수집할 것을 명했고, 2년치의 급여와 여행비용을 선급으로 주었는데, 모두 3만프랑이었다.
1906년 7월, 탐사단은 중앙아시아의 타슈켄트를 출발하여 신강에 들어간 후, 만너하임은 패리아이트와 돈문제로 이견이 생겨, 만너하임은 별도행동을 한다. 스스로 별도의 탐사단을 만들었으며, 중국인들과의 의사소통의 편의를 위하여 "마달한(馬達漢)"이라는 중국이름도 짓는다.
신강은 만너하임의 중국정보수집의 가장 중요한 지역이었따. 그는 남부신강과 북부신강을 모두 다녔고, 비단길의 노선을 벗어나서 다녔다. 그리하여 모든 관문과 군사요새에 대하여 상세한 탐사를 하고 지도로 그렸다. 그는 특히 소수민족의 상황에도 주의를 기울였고, 소수민족 지도자와 부락 지도자들을 만났다. 그는 홋텐(和田)의 고성폐허등 중요한 역사적 유적지에 대하여는 고고학적 발굴도 시도했고, 광범위하게 경문, 목독, 비명등의 문화재를 수집했다. 이후 만너하임의 일행은 하서주랑을 통과하여, 감숙, 섬서, 산서, 내몽고, 하북을 거처 북경에 도착한다. 가는 곳마다 만너하임은 지방관리와 교류하고, 관광의 명목으로 군사, 경제상황을 탐문했다. 그의 여행일기에는 주변의 지형과 특징, 하류와 수계분포, 동식물자원, 도시, 주민소재지, 역사연혁, 교통, 상업, 문화교육, 군사, 경제상황등이 상세히 기재되어 있었다.
2년간의 탐사활동중에 만너하임은 중국의 8개의 성을 지났고, 1.4만킬로미터를 다녔으며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획득했다. 그는 상세한 탐사보고서를 작성했고, 제정러시아의 짜르에게 보고했다. 그의 건의에 따라, 제정러시아군은 신강과 감숙이라는 두 개의 중요한 성을 점령한다. 이 보고서는 1909년에 인쇄출판되었으며, 정식정보자료로 러시아군내부에서 널리 열람되었다.
1910년, 만너하임은 소장으로 승진한다. 제1차세계대전중에 그는 전공을 세워 중장으로 다시 승진한다. 1917년 러시아의 '2월혁명'이 발발하자, 혁명을 적대시했던 그는 9월이 사직하고 핀란드로 돌아간다.
1918년 1월, 막 독립한 핀란드 의회는 만너하임을 군사위원회 주석과 자위군총사령관에 임명하며, 노동자들의 무장반란을 진압하도록 한다. 그러나, 내전중에 그는 자위군이 함부로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데 반대하고 대규모로 적위대를 감금하는데도 반대한다. 이후 그는 정부의 친독일정책에 불만을 품고, 총사령관의 직도 사임해버리고, 적극적으로 대통령선거에 참여할 것을 준비한다. 그러나, 1919년의 핀란드 제1기 대통령선거에서 만너하임은 약간의 차이로 낙선하고, 정치무대에서 물러난다.
1931년 만너하임은 다시 정치무대로 돌아온다. 핀란드의 국방위원회주석을 맡고 군대지휘권을 장악한다. 1939년 11월, 소련과 핀란드는 영토문제로 유명한 "겨울전쟁"을 치른다. 핀란드총사령관으로서 만하임은 여러번 친히 전선에 나가 작전을 지휘했다. 비록 핀란드가 최종적으로 패배하고 10%의 영토를 강박에 의하여 내놓게 되기는 하였지만, 소련군도 참중한 대가를 치렀다. 1941년 6월, 독일이 소련을 침입한 후, 핀란드는 잃었던 땅을 수복한다. 그리고 다시 소련과 "계속전쟁"을 치르게 된다. 그러나, "계속전쟁"에서는 핀란드가 비록 독일로부터 대량의 원조를 받기는 하였으나, 만너하임은 독일과는 거리를 두자고 극력 주장한다. 그는 여러차례 핀란드와 독일의 동맹요구를 거절하고, 레닌그라드포위공격에 대한 파병요청도 거절한다. 1941년말, 히틀러는 핀란드경내의 전체 독일군을 그에게 지휘해달라고 요청하지만, 만너하임은 이 요청을 받아들이면, 이후 히틀러에게 머리를 숙여야 한다고 생각하여 다시 거절한다.
1942년 6월 4일, 만너하임은 75세 생일을 맞이한다. 이날 두개의 예물을 받는데, 하나는 핀란드정부가 그에게 수여한 "핀란드원수"라는 계급이다. 이것은 핀란드역사상 전무후무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히틀러 본인이 친히 그의 생일축하를 위하여 방문한 것이다. 히틀러의 돌연한 방문에 만너하임은 반감을 가지고, 그래서 그는 일부러 구석진 철로선상에서 히틀러와 만난다.
히틀러가 만너하임을 보고 격정적으로 뛰어갔다. 그러나 만너하임은 히틀러 곁에 있는 장교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장교는 달려서는 안된다. 그것은 신분을 잃는 행위이다. 사병들이나 이렇게 뛰는 거다." 히틀러가 아주 격정적으로 생일축하연설을 한 후에, 만너하임은 그를 초청하여 식사를 했다.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이번 음식은 질이 아주 열악했다. 식사후, 만너하임은 커다란 시가를 피웠는데, 히틀러는 담배냄새를 매우 싫어했다. 그래서 히틀러는 핀란드에 그저 5시간만을 머무른후 총총히 귀국했다. 그는 원래 핀란드에 소련에 대한 군사행동을 촉구할 생각이었는데, 이 불쾌한 만남은 그러한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고, 아무런 요청도 하지 않고 총총히 귀국했다.
1944년, 핀라드의 대통령인 리티가 병으로 사직하자, 77세인 만너하임이 대통령직을 승계해서 제6대 대통렬이 된다. 취임후, 그는 신속히 스탈린과 정전협정을 체결한다. 핀란드가 소련과 평화협정을 체결한 후에도 독일군대가 스스로 철군하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만너하임은 다시 부대를 지휘하여 총부리를 바꾸었다. 그리하여, 핀란드 북부에 주둔하던 독일군을 쫓아냈다.
1951년 1월 28일, 만너하임은 스위스의 로잔에서 사망했다. 만너하임이 사망한 후, 역사학자들이 그에게 내린 평가는 아주 후하다. "핀란드가 중요한 관건적인 순간에 처했을 때 그는 국가를 평화와 독립의 길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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