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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정치/중국의 대외관계

유럽의 온주인(溫州人)

by 중은우시 2006. 12. 20.

작자: 섭영렬(葉永烈)

 

네덜란드를 가기 전에 나는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온주에는 민물게가 많이 난다. 한 온주상인이, 배 하나 가득 게를 싣고 네덜란드로 갔다. 이 배가 네덜란드의 항구에 닿은 후에 네덜란드 세관에서는 게를 네덜란드로 들여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게가 어떤 병균을 가져올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 온주상인은 어쩔 수 없이, 배로 싣고 온 게를 바다에 버렸다.

생각도 하지 못했는데, 네덜란드 세관이 게를 네덜란드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지만, 그 게들은 바다를 통하여 육지로 헤엄쳐서 올라왔다. 결국은 네덜란드에 들어온 것이다. 그리고 네덜란드에 자리를 잡아 집도 마련하고 자식들을 낳으며 번식하기 시작했다. 몇년 후, 네덜란드의 각지에는 게가 있게 되었다.

어떤 사람이 재미있게 말했다: 사실 온주인들이 바로 게라고.

 

이번에 필자는 유럽을 가면서 이 우언과도 같은 이야기에 대하여 깊이 느끼게 되었다....

필자가 상해공항에서 오스트리아 빈으로 가는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 한 30여세된 중국남자가 양복에 구두를 신고, 유려한 독일어로 일행인 독일인과 얘기를 나누면서 종종 크게 웃기도 하였다. 그 독일인은 금사테로 된 안경을 쓰고 있는데, 선비티가 났고 50여세되어 보였다. 한눈에 지식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그 독일인은 아마도 교수이고, 이 중국남자는 그의 독일어통역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런데, 오스트리아항공회사의 비행기를 타면서, 나는 그 중국남자가 한 20여세된 중국여자를 도와 비행기에 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품에서 두살쯤된 아이를 안고서 걸어갔다. 그는 그 중국여자와 일종의 특수한 언어로 얘기했는데, 내가 곁에서 들으니 바로 알 수 있었다: 온주화(溫州話)다.

 

온주화는 일종의 아주 특수한 방언이고, 온주지구에서만 사용된다. 온주를 벗어나면, 외지인은 이 방언을 아주 알아듣기 힘들다. 바로 이렇기 때문에, 월남과 전쟁을 하던 시기에 중국부대는 온주병사를 통신병으로 써서, 전쟁터에서 온주말로 통화하게 하였다. 이런 특수한 '외국어'에 대하여 월남군대는 해석해낼 수가 없었다.

 

온주는 원래 중국동부연안해안의 보통 중급도시이다. 온주인은 장사에 뛰어났다. 개혁개방의 시대에 "온주모델"은 전국에 이름을 떨쳤다. 온주상인의 족적은 전국에 퍼졌을 뿐아니라, 세계로 퍼져나갔다.

나는 어려서부터 온주에서 자랐으므로, 그 특수한 온주화에 매우 민감하다. 특히 외지에서, 귀에 온주화 한마디가 들여오면, 나는 바로 소리나는 곳을 따라 쳐다보게 되고, 나의 고향사람을 찾게 된다.

나의 처도 온주인이다. 뉴욕의 차이나타운에서 나와 처는 물건을 살 때, 온주화로 얘기를 했더니, 바로 주인이 알아보았다. 점포주인은 온주말로 물어봤다. "너희는 온주사람이냐", 나도 온주화로 대답했다. "그렇다" 점주는 금방 아주 친절하게 바뀌었고, 이웃을 불러왔다. 이웃은 다시 이웃의 이웃을 불러왔는데, 그들은 모두 온주사람이었다. "이국에서 고향사람을 만나면, 두 눈에 눈물이 맺힌다" 그들은 온주화로 우리와 재미있게 얘기를 나누었었다.

 

이번에, 빈으로 가는 비행기에서 나는 최소한 ,4, 5곳에서 온주화를 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한 온주고향사람은 나에게 말해 주었다. 유럽에서, 중국유학생과 같은 고급 지식분자를 제외하고는 장사꾼들 중에서나, 일꾼들 중에서는 열명중 일곱,여덟은 온주사람이라고.

다른 온주고향사람도 나에게 말해 주었다. 유럽에서 영어를 모르고, 독일어를 모르고, 프랑스어를 모르고, 이탈리아어를 몰라도 다 괜찮다. 온주화만 할 수 있으면 너는 생존해나갈 수 있다고.

과연,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한 중국식당에서 나는 요리하는 주방장이 온주화로 서빙하는 여자에게 빨리 요리를 내가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그 온주화는 듣기에 그다지 '정종(正宗)"은 아니었다. 그 요리하는 주방장이 나에게 말해주었는데, 그는 온주 청전(靑田) 사람이라고 했다.

 

청전은 온주의 서쪽에 있고, 온주시에서 개략 2시간정도 차로 가야 하는 거리에 있다. 그곳은 조각하는 돌이 나는 것으로 유명하다. "칠군자"의 하나인 장내기(章乃器)도 청전 사람이다. 나는 청전에 가 본 적이 있다. 그곳은 교향(僑鄕, 화교의 고향)이라고 불린다. 온주에서 청전사람이 유럽으로 간 것이 가장 빠르다. 50년대에 적지 않은 청전 사람들이 유럽으로 갔다. 청전의 "교향"이라는 칭호는 그래서 생긴 것이다. 지금도, 청전에는 새집을 짓는 것을 많이 보게 되는데, 들리는 말로는 유럽에 사는 화교가 짓는 것이라고들 한다.

유럽의 청전사람들은 네덜란드에 가장 많다. 그 요리사가 내게 얘기해주었는데, 네덜란드의 중국음식점중 2/3는 청전사람들의 천하라는 것이다.

 

프랑스의 '대파리'(파리도심바깥) 지역의 한 중국음식점에서는 우리가 막 들어가자, 한 중국 젊은이가 온주화로 전화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내가 묻자, 주인은 자기는 대만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식당에서 일하는 남자 여자는 모두 온주에서 왔다고 한다.

이 중국음식점의 안내아가씨의 온주화는 명백히 서안(瑞安)쪽의 사투리였다. 서안은 원래 온주지역의 한 현(縣)이다. 지금은 이미 시(市)로 승격되었다. 서안은 온주시에서 약 1시간정도 거리에 있다. 나의 모친은 서안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서안사투리가 비교적 익숙하다.

그 안내아가씨는 나에게 그녀는 확실히 온주 서안사람이라고 말해주었다. 파리의 온주사람들 중에서는 서안사람이 가장 많다고 했다. 그녀는 친척이 파리에 살고 있어서, 온주 서안에서 파리로 왔다고 한다. 그녀는 여기에 온지 이미 7,8년이 되었다고 했다. 그녀는 올해 온주에 돌아가본 적이 있었는데, 온주의 변화가 너무 커서 깜짝 놀랐으며, 거의 못알아볼 뻔했다고 했다.

그녀는 또 나에게 "소파리(파리도심지)"의 차이나타운에는 중국음식점이 수십개가 있는데, 거의 모두 온주 사람이 운영한다고 했다.

 

이탈리아의 플로렌스는 50여만명의 인구를 지닌 중급도시이다. 나는 한 중국음식점에 걸어들어갔는데, 바로 점포주인이 온주화로 일하는 아가씨를 부르는 것을 들었다. 나는 금방 알아차렸다. 이곳도 온주식당이라는 것을. 이 온주 사장의 온주화도 "정종"이 아니었다. 그는 나에게 그는 온주의 문성현(文成縣)사람이라고 말해 주었다. 문성현은 온주시의 남쪽에 있다. 문성은 온주에서 차를 타고 청전과 비슷한 거리에 있다. 이탈리아의 온주 사람들은 문성현 사람이 제일 많다고 한다.

이 온주 사장은 4년전에 플로렌스에는 겨우 4개의 중국음식점이 있었는데, 지금은 이미 70여개로 늘어났다고 한다. 이 중국음식점들은 거의 모두 온주사람들이 연 것이다. 이탈리아의 밀란에는 플로렌스보다 크고, 100여만의 인구를 지니고 있다. 그곳의 중국음식점은 400여개에 달하는데, 대부분 온주사람이 연 것이라고 한다.

 

그는 또한 플로렌스부근에 백랑당이라는 작은 마을이 있는데, 모두 만천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데,  그중 7천여명이 중국인이고, 중국인중에서 90%이상이 온주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소도시에서는 온주화가 '통용어'로 되었다고 한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온주인이 유럽에 개설한 중국음식점에서 만드는 것은 중국요리인데, 백랑당의 적지 않은 중국음식점에서 만드는 것은 순전한 온주음식이라고. 이것은 그곳에 온주사람이 많이 살기 때문이라고 하며, 모두 식당에서 고향의 맛을 느껴보고 싶어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온주의 대황어, 화합, 청자와 같은 해산물을 온주에서 비행기로 암스테르담까지 운송하고, 다시 기차로 플로렌스까지 보낸다고 한다. 그렇게 하여 백랑당의 온주사람들이 온주음식을 맛본다고 한다. 그래도, 이곳의 온주사람들은 아직 만족하지 못한다. 운송해온 온주의 해산물은 동결시킨 것이어서, 맛이 고향에서 먹던 것처럼 신선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많은 온주사람들이 그 도시에 집중되어 있으면, 무슨 사업을 하느냐고 물어봤다.

그는 이탈리아의 온주 사람은 식당을 여는 것 이외에 주로 두 가지 사업을 한다고 했다. 하나는 의류이고 하나는 피혁이다. 그 도시에는 온주인들이 연 의류공장과 피혁공장이 있다. 많은 온주인들이 그곳에서 와이셔츠를 생산하고, 가죽구두를 생산한다.

와이셔츠같은 류의 의류는 온주 사람들에게는 어렵지 않다. 원래, 의류는 중국의 수출에서 강점이 있는 제품이다.

이탈리아의 피혁제품은 세계에서 이름이 있다. 지금, 온주인들이 이탈리아의 피혁시장을 뚫고 들어갔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온주의 영가, 평양, 창남, 문성에서 나는 많은 구두공장, 가죽옷공장, 가죽제품공장을 보았다. 최근들어 온주의 가죽구두의 품질은 현저히 제고되었고, 중국피혁10대브랜드중에서 온주가 2개를 점하고 있다. 온주 피혁업의 발전은 온주인이 이탈리아 피혁시장에 뚫고 들어가는데 강력한 뒷배경이 되고 있다. 그러나, 이탈리아에서 온주의 피혁제품은 온주의 브랜드를 달지 않고, 이탈리아의 브랜드를 달고 있다. 온주사람과 이탈리아인이 합작투자한 것이므로 그 이름 그대로 "Made in Italy"인 것이다.

 

그 온주 사장은 이런 온주인들이 생산하는 이탈리아브랜드 피혁제품은 대체로 세 종류라는 것이다.

첫째는 이탈리아 피혁을 원료로 해서, 이탈리아의 온주인공장에서 가공한 피혁제품이고,

둘째는 온주에서 운송해온 피혁을 원료로 해서, 이탈리아의 온주인 공장에서 가공한 피혁제품이고,

셋째는 온주에 있는 중국-이탈리아 합작공장에서 생산한 제품으로 직접 이탈리아까지 운송해온 피혁제품이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네가 이탈리아에서 산 가죽구두는 아마도 온주인이 생산한 것일 것이다"

그는 보충해서 말했다. 온주인이 생산한 이탈리아제품이 "정종"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탈리아브랜드를 쓸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측에서 이런 피혁제품에 대하여, 완전히 이탈리아피혁제품의 품질기준을 요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일본 "소니" 전기제품이 싱가포르나 말레이시아에서 많이 생산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네덜란드의 "필립스" 전기제품이 네덜란드 이외에서 많이 생산되는 것과도 같다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로마에서, 나는 온주인이 연 중국음식점을 보았다. 그곳의 한 온주 사장은 아주 식견있는 말을 하여,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는 온주인이 유럽에 진군한 것은 식당에서 기반을 잡았고, 식당으로 빈틈을 열었다는 것이다.

식당을 여는 투자는 공장을 여는 투자에 비하여 적다. 그리고 요리기술을 장악하는 것은 비교적 쉽다. 사람은 어쨌든 먹어야 하고, 유럽은 유동인구가 많아서 식당을 열면 쉽게 자리를 잡을 수 있다. 식당의 운영기술은 매우 간단하다. 온주의 고향사람, 친척이 모두 와서 일을 한다. 식당에서 일하면, 먹는 것이 해결된다. 그리고 저녁에 바닥을 청소하고 그냥 자면 된다. 이외에 식당은 사람의 왕래가 많으므로 정보센터, 사교센터의 역할을 한다. 그래서 금방 현지의 친구를 사귈 수 있다. 이런 친구들은 온주인들이 외지에서 발을 넓히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온주인은 총명하다. 아주 강한 시장의식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힘든일도 마다하지 않고, 참고 일한다. 온주인은 응집력이 매우 강하다. 고향사람들끼리 잘 뭉친다. 내부에서 싸우는 악습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네가 출국하면, 네가 나를 출국하도록 도와주고, 나는 다시 다른 사람을 출국하도록 도와준다. 그래서 유럽의 온주인들은 계속 증가하는 것이다.

 

당연히, 온주인들은 큰 결점도 지니고 있다. 그것은 문화주준이 비교적 낮다는 것이다. 유럽에 온 것은 대부분 일꾼이다. 거의 외국어를 모르고, 모두 유럽에 온 후에, 유럽인과의 교류과정에서 배우게 된다.

 

빈에서 비행기를 타고 상해로 돌아오면서 나의 앞자리와 왼쪽 앞자리에서 모두 온주화가 들려왔다. 나는 고향사람들과 계속 얘기하면서 왔다. 그들은 그들 세대는 제대로 배우지 못했지만, 다음 세대는 유럽에서 자라므로, 다음 세대의 온주인들은 더 잘해낼 것이라고 하였다.

 

나는 유럽에서 상해오 돌아온 후에 온주의 요청을 받아, 강연을 했다. 온주에서 나는 아주 재미있는 소식을 들었다.

중국에서 외환보유고중에서 달러, 일본엔등으로 보관하는데, 직접 이탈리아 리라로 보관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이탈리아의 온주인들은 이미 7만에 달하였다. 많은 온주인들은 이탈리아에서 많은 리라를 번다. 국내로 송금한 후에 반드시 달러로 바꾸어서 은행에 예금한다. 환전할 때, 적지 않은 손실을 보게 된다. 그래서, 이탈리아의 온주인들은 온주의 은행에서 이탈리아 리라의 예금구좌를 개설해주도록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

중국건설은행의 온주지점은 이탈리아의 온주교포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전국에서 처음으로 이탈리아 피라예금업무를 시작하였다.

 

"온주인현상"은 각계의 주의를 끌고 있다. 대만의 유명한 티비 M.C.인 능봉이 찍은 <<온주인>>특집에서 온주의 온주인, 상해의 온주인, 북경의 온주인을 찍은 외에, 파리로 가서 파리의 온주인을 찍은 바 있다.

"온주인현상"은 생각해볼 가치가 있다. 어떤 사람은 온주인이 집시와 비슷하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온주인이 유태인과 비슷하다고 한다. 사실, 온주인은 집시와 유태인의 장점을 겸비하고 있다. 온주인들은 집시들처럼 서로 다른 환경에 잘 적응한다. 그러나 그들처럼 사방을 떠돌면서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하지는 않는다. 온주인들은 유태인처럼 총명하다. 그러나 온주인들은 조국이 있고, 날로 강대해지는 조국은 해외 온주 떠돌이들의 강한 방패역할을 해준다.

 

유럽의 "온주인현상"은 더욱 주의를 끈다. 온주인들은 지금 네덜란드 해안으로 상륙한 게처럼, 유럽에 집을 마련하고, 자식을 낳고 번창하고 있다. 온주인들은 이미 유럽의 새로운 구성원이 되었다. 미래의 유럽은 온주인들이 생활하는 근거지가 될 것이고, 분투하는 장소가 되고, 투자하는 낙원이 되며, 세계로 향하는 받침대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