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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서태후)

서태후(자희태후)의 사체가 세번 입관된 경위

by 중은우시 2006. 9. 11.

자희태후(서태후)는 생전에 여러가지 독특한 경력으로도 유명하지만, 사후에도 믿기힘든 경우를 당했다. 그녀의 사체는 76년의 시간내에 3번에 걸쳐서 동일한 관에 입관되었다.

 

첫번째 입관.

 

광서34년(1908년) 10월 22일 미시 삼각, 자희는 그녀의 74년에 걸친 일생을 마치고 세상을 떠났다.  오후 4시 30분이었다. 장의사수령태강은 아황길상교를 써서 서태후의 유체를 서원 의란전에서 태우고 나왔고, 5시 15분에 황극전에 도착해서 상위에 두었다. 다음날 상오 8시 5분, 융유황태후와 근비가 보는 데서, 자희의 사체는 염을 거쳐 입관되었다. 선통원년(1909년) 10월 4일 사시에 서태후의 관은 보타욕 정동릉의 지궁에 묻혔다.

 

두번째 입관.

 

서태후의 사후 20년이 지난 1928년 7월 4일에서 10일까지. 군벌 손전영은 건륭제의 유릉과 서태후의 릉을 도굴하였고, 관을 훼손하고 사체를 방치했으며, 부장된 보물을 모두 약탈해갔다. 서태후의 사체는 관밖으로 옮겨졌을 뿐아니라, 입안에 물려있던 구슬도 빼갔고, 상의는 모두 벗겨졌으나, 하의도 속옷 하나만 남겼다. 도굴사건이 발행한 후 부의는 재택, 기령, 보희, 진의등 사람들을 동릉에 보내어 다시 안장하도록 조치하였다. 재택등은 지궁으로 들어가서, 서태후의 유체가 관두껑위에 엎드려 있는 것을 보았다. 머리는 북쪽을 향하고 있었고, 다리는 남쪽을 향하고 있었으며, 왼손은 뒷등에 꺽여들어가 있었다. 지궁내에서 노출된지 이미 40여일이 지났고, 사체에는 많은 반점이 나타났으며 많은 흰털이 자라났다. 재택등은 내관이 아직 완벽하고 다시 사용할 수 있는 것을 보고는, 만주족여자로 하여금 노란비단으로 서태후의 유체를 덮고, 황단 덮게를 유체의 측면에 두고, 천천히 시신을 뒤집었다. 그리하여 사체가 황단요위에 바로 하늘을 보고 눞도록 하였다. 자희의 얼굴은 회백색이었으며, 두눈은 깊이 파여 있었으며 눈알은 없었다. 광대뼈는 높이 솟아올라 있었고, 입술에는 상처가 있었다. 여러 사람이 도와서 여의판을 이용하여 서태후의 사체를 관안으로 넣었다. 여의판은 꺼내지 않았다. 유체위에는 황단이불을 덮었다. 지궁에서 얻은 서태후가 생전에 깎은 손톱과 빠진 이빨은 노란 비단으로 잘 싸서 이불위에 두었다. 재택은 당시에 가진 서태후의 유물인 황단포와 어깨덮개를 이불위에 놓고 관두껑을 덮었으며, 관의 입구를 칠로 봉하였다.

 

세번째 입관

 

1979년 2월 17일, 청동릉 문물보관소는 서태후의 지하궁전에 대하여 정리를 시작하였다. 5월1일부터 서태후의 지궁과 자안릉의 지면건축을 공개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보관소의 간부는 서태후의 관을 관광객이 적은 때에 다시 정리하고자 한 것이다.

 

1983년 12월초, 관광객이 없는 계절이 되었다. 보관소의 간부는 서태후의 내관을 정리하고자 결정하였다. 12월 6일, 정리소위원회가 관두껑을 열었다. 황단이불이 관내를 꼭 덮고 있었고, 이불위에는 옷 두개가 놓여 있었다. 분명히 1928년에 재택등이 다시 입관할 때의 원래모습 그대로였다. 55년간 전혀 건드린 흔적이 없었다. 보관소의 간부는 즉석에서 관두껑을 덮고 지하궁전을 봉쇄하기로 결정하고 바로 상부에 보고하였다. 1984년 1월 4일, 국가문물국은 몇명의 전문가를 파견했다. 그리하여, 청동를문물보관소와 자희내관정리10인소위원회를 결성하였다. 둘째날 정리소위원회는 순서에 따라 두개의 의복을 꺼내고, 서태후의 손톱과 이빨을 싼 작은 노란색주머니를 발견했다. 황단이불을 걷었을 때, 서태후의 유해가 눈앞에 나타났다. 얼굴과 윗몸은 노란비단으로 쌓여 있었고, 아랫몸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바지에는 수(壽)자가 가득 새겨져 있었따. 한쪽 발에는 양말이 신겨져 있었다. 사체는 하늘을 향해서 똑바로 누워 있었고, 얼굴은 약간 왼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오른 손은 배에 놓여 있었고, 왼팔은 자연스럽게 몸의 왼쪽에 늘어뜨려져 있었다. 두 눈은 구멍이 나 있었고, 허리에는 끈이 묶여져 있었다. 사체는 완전하였고, 153센티미터였다. 정리소조는 그녀의 몸아래 있는 여의판을 들어 유체를 관밖으로 꺼냈고, 지궁의 지면에 두었다. 그리고는 관내에 방부소독약을 뿌린 후, 서태후의 유체를 다시 관안에 넣었다. 이것은 그녀의 사망후 세번째 이 관안에 입관되는 것이다. 그 후에 이불, 작은 주머니와 두 개의 의복도 원래의 순서대로 원래의 위치에 놓아두었다. 일체를 원상대로 회복한 후, 관내에 약을 뿌리고, 관두껑을 덮었으며, 관입구를 봉쇄하였다. 목공들은 부서진 외관을 수리하였다. 지금까지 서태후의 유체는 완전하게 관내에 누워있고, 1928년에 새로 염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