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 진경원(陳景元)
비록 중앙정부에서는 계속 동의하지 않고 있지만, 여전히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극력 진시황의 여산묘(驪山墓)를 발굴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상부"의 뜻은 여러 분야의 보호기술이 아직 충분한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였으므로, 맹목적으로 발굴하는 것은 문화재를 타당하게 보호하는 방법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부"의 관점은 문화재를 발굴해야만 가장 유효하게 지하의 고대유물을 보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발굴할 것인가 말것인가"의 논쟁은 이미 수십년동안 계속되고 있다. 얼마 전에 개최된 전국인민대표대회기간에도, 여산묘를 발굴하자는 제안이 많았다. 그러나 아직은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현재,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즉시 발굴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어느 정도 다수의 의사를 밝히는 동시에 "상부"에서 조금은 완화된 입장을 나타낼까 기대하는데서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굳이 입을 열어 말을 할 필요가 무엇이겠는가. 여러 사람이 의견을 발표하는 것은 당연히 자유이다. 그러나, 그것을 여론의 압력으로 행사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여론이 다수가 된다고 하여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생각해서도 안된다. 더구나, 무슨 국민투표를 하는 것도 아닌데, 여론의 지지를 얻는다고 하여 실제적인 의미는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사람들의 여산묘(서안 여산에 있는 진시황릉)에 대한 이해와 인식은 아직은 상당히 모호하고, 부정확하다. 많은 역사학자, 고고학자, 일반인은 말할 것도 없고, 모두 유한한 사료의 기재를 자신의 판단근거로 삼고 있다. <<사기>>에 "진시황이 처음 즉위했을 때부너, 능묘를 짓기 시작했다"는 기재가 있다. 사람들은 이것을 근거로 아무 의심없이 진시황은 37년의 시간을 들여서, 자기의 능묘를 지었다는 것이 진실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진실한 역사는 이런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진시황의 즉위때, 먼저 만들어야 하는 것은 사망한 부친-진장양왕릉이다. 그리고, 사망한지 3년도 지나지 않은 조부-진효문왕릉을 만들어야 했다. 그리고, 조부보다 3일먼저 돌아가신 증조부-진소왕릉도 만들어야 했다. 이것이 바로 진시황이 해야할 3개의 황제능묘공사였다. 세상에 어느 사람이 부친, 조부, 증조부의 조상 능묘도 만들기 전에, 대규모로 자기 무덤부터 만드는 사람이 있겠는가. <<사기. 정의>>의 기재된 내용을 보더라도 진시황은 자기의 선조를 매우 존경하는 효자현손이었음을 알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반박할 수도 있다. 여산묘의 봉토에는 수은(水銀)함량이상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바로 <<사기>>의 기재 즉 "수은으로 강하대해(江河大海)를 만들었다"는 기재가 사실로 입증되지 않았느냐고, 그러니 사기의 기재는 전부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냐고. 당연히 그 사실을 입증만 할 수 있다면 그렇다. 즉, 주변의 섬서재봉틀공장의 수은을 함유한 폐수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점을 입증하고, 농업생산과정에서 수은을 포함한 농약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을 입증하고, 여산의 채굴중에 수은이 포함된 기폭제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하고, 현지의 주민들 중에서 수은중독으로 문제된 병력을 입증할 수 있다면 그 설은 성립될 수 있다. 여산모 봉토의 꼭대기에 있는 한 지점에서의 수은함유량이 1440ppb라는 것인데, 만일 이것을 기준점으로하여 수직으로 흙을 파서 관이 있는 곳까지 매10미터마다 흙의 샘플을 떠서, 각각 수은의 농도를 측정하고, 이 수직방향의 수은의 농도가 꼭대기부터 묘밑바닥까지 점점 증가하는 추세를 나타낸다면 이것은 바로 수은이상의 근원지가 확실히 지궁(地宮)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 될 것이다. 20년전 학술대회상에서 이미 어떤 학자가 이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해결방법까지 제시하였음에도, 서안측의 학자들은 전혀 이런 노력을 벌이지 않고 있다.
일찌기 어떤 학자는 이렇게 얘기한 바 있다. 진시황의 지궁 깊은 곳에는 13000여톤의 수은이 존재한다고. 그리고, 계속 움직이고 있다고. 그의 눈에는 지궁에는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영구동력기(永動機, 영원히 계속 움직이는 기계)"가 있다고. 이런 영구동력기에 관한 주장이 과학법칙에 맞는지는 따로 평론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13000여톤의 수은의 존재에 대하여는 역시 의문이 많다. 왜냐하면 현재까지 중국의 현대화설비로 생산하는 수은도 매년 겨우 900여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진시황의 시기에 수은으로 유명한 "파과부"가 존재하는 사천의 부릉의 수은광산에서도 명청양대에 이르러 조정에 진공하는 수은의 양은 매년 겨우 300여근(斤)이었다. 여산묘에 13000톤의 수은을 부어넣으려면, 명청의 수치로 계산하더라도 사천의 이 파과부에서 9만년간 생산해야 비로소 만족시킬 수 있는 양이다. 수십미터 깊이에 13000톤의 수은이 있다면, 이것은 엄청나게 큰 수은광산과 비슷하고, 그겋다면 봉토퇴적면에서 형성되는 오염권내의 수은함유량은 아마도 15000-20000ppb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진짜 산과 바다를 능묘에 가지고 들어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마천이 <<사기>>에서 "위로는 천문을 갖추고 아래로는 지리를 갖추었다. 수은으로 강하대해를 만들었다"고 하는 것은 사실 자그마한 비례의 모형에 불과하다고 보아야 한다. <<술이기>>에서 "노반은 돌로 우공의 구주도를 만들었다"고 되어 있고, <<후한서. 마원전>>에는 "쌀을 모아서 산을 만들고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려 지형을 만들었다"고 되어 있으며, <<광박물지>>에서는 "진시황 원년에, 건소국은 옥을 조각하고 그림을 그리는 자의 후예를 바쳤다. 땅을 그리고, 사독, 오악, 열국의 그림을 그렸다"는 등이 있는데, 모두 이것은 입체모형을 의미하는 것들이다. 축소된 모형이므로 진짜 강이나 물이 아닌 것이다. 바다도 진짜 바다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총명한 장인들은 유한한 공간내에서 강하의 모습을 진짜처럼 만들고, 상응한 위치에 은가루를 뿌리거나, 수은을 뿌린 것은 가능할 것이다. 이런 모형제작기교는 이런 은가루, 수은으로 수면을 표시하는 방법인 것이고, 당시의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방식이었을 것이다.
진시황이 죽어서 하북(河北)에 묻혔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원래, 진시황 37년 10월부터,제5차 순행을 시작하였다. 그는 무관(武關)을 떠나, 운몽(雲夢)으로 가고, 영릉(零陵)에 도착했으며, 동안(同安)으로 내려가고, 절강(浙江)에 가고, 윤주(潤州)를 지나 낭야(낭邪)에 이르렀다. 덕주(德州)의 평원진에서 병을 얻어, 7월 형태(邢台)의 사구궁(沙丘宮)에서 죽었다. 이 십개월의 기간동안, 거리는 약 1만5천킬로미터이고, 평균 매일 50킬로미터를 갔다. 통상적인 이치에 따르면, 그의 영구는 남쪽으로 가서 낙양을 지나 직접 함양으로 가야 한다. 이 길은 약480킬로미터의 길이이다. 그러나, 이렇게 가지 않았다. <<사기>>에 의하면, 진시황의 영구차는 형태에서 북쪽으로 가서 정형(井형), 태원(太原), 안문(雁門), 운중(雲中), 포두(包頭)에 도착한 후 다시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직선으로 함양을 향했다. 이 길은 약 2500여킬로미터에 달한다. 매일 50킬로미터의 속도로 계산하면 약 50일이 걸린다.
진시황의 사망후 "비불발상(秘不發喪, 사망사실을 감추고 상을 치르지 않음)"한 것은 그저 이사(李斯), 조고(趙高)등 대여섯명이 아는 것이고, 대외적으로는 완전히 비밀로 유지되었었다. 진시황이 비록 죽었지만, 원래의 노선도 변하지 않고, 전진하는 속도도 변하지 않았으며, 백관이 아뢰는 것도 바뀌지 않았다. 죽었다는 흔적은 전혀 나타내지 않은 것이다. 한마디로 하면, 당시에 공개된 "장례"는 치르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누구나 알 것이다. 7,8월의 하북, 산서, 내몽고, 섬서는 아주 더워서 견디기 힘들다는 것을. 진시황이 온량거에 갇혀서 1,2달을 견뎠다는 것인데, 이렇게 하면 도대체 어떤 결과가 나올 것인가? <<사기. 제태공세가>>의 기재에 의하면 "환공, 시체를 상위에 두고, 67일에 시충(屍蟲)이 시체에서 나왔다" 사람이 죽은 후 여름에는 3일을 넘기지 않고, 겨울에는 7일을 넘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신속히 변색하고 냄새가 나고 부패하며, 썩은 냄새가 진동한다는 것이다. 가마를 이끌도 천리를 돌아서 서안까지 왔다면 백골과 시충을 빼면 뭐가 남았겠는가? 그래서, 진정으로 여산묘에 묻힌 것은 그저 그의 의관이라는 것이다. 즉, 여산묘는 의관총(衣冠塚)이라는 것이다.
어떤 고고학자는 이렇게 말한다. 2호동마차중의 "안거(安車)"의 원형을 고쳐서 영구차로 사용했을 것이라고. 관련자료를 보면, 2호차의 거여(車輿)는 전, 후 양실로 나뉘어 진다. 전실은 마부가 사용하고, 후실에 관목을 안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후실의 넓이는 넓이 78센티미터, 길이 88센티미터밖에 되지 않는다. 전국시대의 관의 등급표준에 따르면, 진시황의 외관은 길이 320센티미터, 넓이 210센티미터, 높이 219센티미터는 되어야 한다. 내관도 길이 250센티미터, 넓이 127센티미터, 높이 132센티미터가 되어야 한다. 진시황의 안거는 순행시에 앉는데는 문제가 없지만, 죽은 후에 영구차로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개조해서 두 배로 늘였다고 보아도 힘들다. 왜냐하면 어떻게 하더라도 안거안에 그렇게 큰 관을 집어넣을 수 없기 때문이다. 죽었다는 소식을 바깥으로 내보내지 않아야 하는 시점에 공개적으로 안거를 개조하는 것도 힘들었을 것이다. 혹은 바깥에 주문해서 특제관을 짜서 운송했을 가능성도 없을 것이다.
비록 진시황의 관목이 이 안거에 끼워넣을 수 있었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하북성을 벗어날 수 있었겠는가? <<사기>>에 의하면 정형은 진시황의 유일한 귀국행로의 통로였다. 그렇다면 정형의 진나라 고도는 어떠했는가? 정형은 길이 좁았다. 암석을 깨서 길을 만들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깊은 자국이 남아 있다. 이것은 당시 수레의 위력을 말해준다. 여기의 도로폭은 140센티미터에 불과하다. 여기는 넓이가 203센티미터인 안거 또는 온량거는 지나갈 수없다. 왜냐하면 양쪽으로 돌이 솟아 있어서 차량바퀴가 지나갈 공간이 안생기는 것이다. 네마리의 말이 끄는 온량거는 기본적으로 이 길을 지나갈 수가 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차량은 통과하지 못하더라도, 말은 갈 수 있지 않느냐는 의견을 제시한다. 관을 온량거에 싣고, 사람들이 들고서 좁은 길을 지나가면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관을 들고 지나간다는 것을 얘기한다면 그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자희태후가 청동릉에 묻힐 때, 120킬로미터의 거래를 100명이 관을 들고 꼬박 5일을 갔다. 100여명이 진시황의 관을 들었다고 하더라도 정형관, 안문관등 험준한 길을 간다는 것은 길이 너무 좁을 뿐아니라, 사람들이 발을 디딜 틈도 없을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드러나게 했다가는 진시황이 죽었다는 것을 감출 수가 없게 된다는 점이다.
사람이 들고서도 못가고, 안거에 싣고도 못간다면 날씨는 더운데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이런 상황하에서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적당한 장소를 찾아서 진시황의 시체를 비밀리에 매장하는 것일 것이다. 그 후에 다시 원래의 계획대로 천천히 계속 행진해서 함양으로 가는 것일 것이다. 그리고는 죽었다는 소식을 전하고, 전국의 인력을 모아서 급히 여산묘를 만드는 것이다.패현의 유방, 육안의 영포는 모두 당시 일꾼을 이끌고 여산으로 갔었다. 여기서 사람들은 수직구멍을 파고, 황장제주를 만들고, 의관을 준비하고 관을 넣었으며, 부장품을 넣고, 궁전모형을 가지고 들어갔고, 주변에 모래판을 조각하고, 최후로 지붕을 덮고, 흙을 덮었으며 높은 흙무덤을 쌓았다. 그러나, 누가 알았으랴. 관속에 든 것은 진짜 진시황이 아니고 그저 의관에 불과할 줄을. 지면의 공사 즉, 궁전, 침전, 내성, 외성은 천천히 만들어도 되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공사가 끝나기도 전에 진나라는 농민반란군에 의하여 이미 망하기 일보직전에 이르게 된다.
진시황의 진정한 매장지는 분명히 하북성 정형 부근의 어떤 지방일 것이다. 많은 흔적들로보면, 확실히 산이 하나 있고, 생전에 진시황이 두번을 가본 곳이다. 이 산의 외형은 여산과 많이 닮았다. 그리고 당시 진나라 군대는 이 산에 주둔했었다. 여기의 풍수는 아주 좋고, 배산임수형이며, 환경이 조용하고, 건축에 필요한 모든 자료는 갖추어져 있다. 그 자리에서 써도 된다. 그러므로 긴급하고 은밀하며, 신속히 시공할 모든 조건이 갖추어져 있는 것이다. 진시황은 죽지 않았다고 해야 하므로, 아마도 다른 사람의 명의로 장례를 치렀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제왕의 격식에 맞추지도 않았을 것이고, 높은 분묘를 만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 능묘는 아마도, 큰 산의 오목한 곳에 깊지 않은 수평의 구멍을 낸 다음에 관을 집어넣고 입구를 막은 후, 산위의 주둔군들에게 명하여 대량의 흙과 돌로 덮지 않았을까? 그리고 내용을 잘 아는 장인들도 함께 묻어버리지 않았을까?
이런 비정규적이고, 제왕의 예에 부합하지 않는 무덤은 그리 많은 시간을 들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장시간의 대규모의 고급의 능묘공사라면 분명히 천기가 누설될 것이기 때문이다. 주도면밀한 계획하에 혹은 다른 대신에게 수권하여 처리하고 진정한 순행대는 일찌기 "가짜 진시황제"의 지휘하게 북쪽으로 시찰을 떠난 것일 것이다. 하남에서 남경으로 온 두 사람에 의하면 현지에서 진나라때 황궁에서 사용하던 기물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만일 이것이 확인된다면, 아마도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 산의 동굴에는 서한 유승묘처럼 2천년동안 세상사람들이 알지 못했던 진시황제가 묻혀 있을지도 모른다. 사실 이런 매장방법은 당시의 모순을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비밀리에 장례를 치를 뿐아니라, 진시황의 시신을 온전하게 보존하고, 진시황의 묘가 후세에 방해받지 않는 등 여러가지 좋은 결과를 가지는 것이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계속하여 여산아래에 있는 진시황릉을 발굴하자고 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 봉토아래에 분명히 신비스럽기 그지없고, 방대하기 그지없고, 거대하기 그지없는 지하궁전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문인들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것이다. <<장안사적고>>라는 책에서는 명확히 지적하고 있다. 기존의 사서에서 이 지궁에 대한 묘사는 과장되었거나 상상에 불과하다고. 고힐강 선생도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상고의 자료에서 가장 골치아픈 점은 잡스럽게 끼어든 전설적인 성분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현재의 많은 고서는 한대의 사람들이 쓴 것이다. 이 것들은 분명이 사람들이 날조한 가짜 역사이다. 혜환장, 장경휘는 <<섬서역사백미>>에서 사기는 책이 일찌감치 만들어졌고, 지금까지 전해지므로, 일찌기 사마천이 쓴 그 원저가 아니다라고 하고 있다. <<한서. 양종전>>에는 "종(양종)은 명을 받아 <<태사공서>>의 십만자를 삭제했다"고 적고 있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사기를 근거로 미지의 역사를 추단하려고 하지만, 사기 자체가 그다지 믿을 것이 못되는 것이다.
실제로 여산묘의 연구주체는 반드시 건축학자와 건축기술사학자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능묘공사의 속성이 원래 건축과학의 범주에 속하기 때문이다. 여산묘의 "지하궁전"의 건조는 도대체 어떤 건축적인 의미를 지니는지, 건축배치, 건축재료, 건축구조, 건축결구, 건축시공등의 문제가 있다. 그리고 전문지식의 한계로 고고학자, 역사학자들이 가서 분명하게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가장 기본적인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기 전에 맹목적으로 가서 발굴한다는 것은 문제를 크게 만드는 것일 뿐이다. 만일 여산묘의 발굴 후에 빈 관에 가짜 사람이 있다면 어찌 천하의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되지 않겠는가? 역사는 사람들에 의하여 2천년을 희롱당해 온 것이다. 그러나, 마음을 가라앉히고 보면, 이런 허위와 가짜를 만든 자는 이사와 조고이다. 과거는 싸울 필요가 없고, 책임을 추궁할 필요도 없다. 미래를 보아야 한다. 앞으로 어떡할 것인가? 하북의 진시황릉을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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