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진시황)

진(秦)이 천하통일을 이룬 이유는?

중은우시 2006. 11. 20. 23:09

춘추전국시대를 종결한 것이 왜 하필이면 진(秦)일까? 위치로 보아서도 중국의 서북쪽 귀퉁이에 있고, 그다지 다른 지역에 비하여 강점이 없는 것같은데...특히 현재를 보면 진나라가 위치했던 감숙성 그리고 이후 옮아갔던 섬서성은 중국전체로 놓고 보면 보잘 것없는 지역이었다. 산동성을 차지하고 있던 제(齊)도 아니고 호북, 호남등을 아우르는 강남의 패자 초(楚)도 아니고, 삼진(三晋)의 적자로 강한 힘을 자랑하던 위(魏)도 아니고...왜 하필이면 서쪽 귀퉁이에 쪼그리고 있던 진나라인가? 이것은 항상 나에게는 하나의 풀리지 않는 궁금증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진나라가 상앙(商앙)의 개혁이후로 국력이 강해져서 그렇다고 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역사상 거의 유일하게 성공한 개혁시도라고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진나라는 도강언(都江堰)과 정국거(鄭國渠)를 보유해서 농업생산력이 가장 뛰어났던 사천과 섬서성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경제적인 기초가 가장 튼튼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어떤 사람은 진나라가 인재등용에서 나라를 가리지 않았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상앙, 이사등과 같은 진나라의 전통귀족출신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온 인재들을 폭넓게 등용함으로써, 서북의 모자라는 인재를 보충할 수 있었고, 장래 6국을 치는데 큰 도움을 받았다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진나라의 경우에는 평민이 귀족이 되고, 낮은 귀족에서 높은 귀족이 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전투에서 공을 세우는 것이었으므로, 백성들이 모두 전투에 나서면 서로 공을 세우기 위하여 덤벼들 정도로 되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진나라가 법가의 통치에 의하여 엄격한 법률제도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황제의 명에 따라 모두 움직이므로, 국가의 역량을 집중하여 천하를 통일하기에 유리하였다고도 한다.

 

이런 이유들도 모두 타당할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궁금증은 풀리지 않는다. 이런 이유들을 들으면 그것도 하나의 이유는 되겠다 싶으면서도 무릎을 탁 칠 정도로 공감이 가지는 않는 것이다.

 

최근 들어 글을 읽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구석진 위치때문이 아니었을까? 진나라는 확실히 중국대륙으로 놓고 보면 서북쪽에 치우쳐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위치는 장점도 많다.

 

첫째, 중국의 초기 문명에 대하여 중국에서 자체적으로 발생했다는 주장과 중동지역에서 유입되었다는 주장이 서로 대립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문명이 발생한 시기와 중동의 문명이 발생한 시기는 최소 500년내지 1000년씩은 차이를 두고 있으므로, 아무래도 중국문명이 다른 문명의 영향없이 단독으로 발생하였다기 보다는 아랍문명을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많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랍문명이 중국으로 유입된다면 그 통로는 어디일까? 바로 하서주랑, 지금의 감숙성, 즉 진나라가 발생한 곳을 지나서 들어오는 첫번째 땅이 바로 섬서성이 되는 것이다. 아랍문명은 상당한 기간동안 전세계의 문명을 주도했고 앞서갔던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마호메트가 나타나서 이슬람교를 퍼트림으로써 사람들이 종교에 심취하기 전까지는. 그러므로, 진나라때는 중국의 문명수준보다는 아랍의 문명수준이 높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높은 수준의 문명(예를 들어, 보다 날카로운 무기, 보다 방어력이 뛰어난 갑옷등)이 중국으로 들어올 때는 반드시 진나라를 거쳤을 것이다. 특히 야금술에 있어서 조금 더 강한 철을 만들 수 있다면, 그것은 전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이런 기술을 가장 먼저 받아들이고, 그것들이 중원의 다른 지역으로 보급되기 전에 진나라는 먼저 그러한 신기술로 무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진나라가 가진 가장 큰 장점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이 점은 주나라때부터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서안을 수도로 삼았던 이유가 되기도 할 것이다. 즉, 당시 중국으로서는 서역에서 건너오는 문명, 문화, 신기술은 매우 중요하였던 것이고, 이것을 먼저 받아들이고 소화시키는 것이 관건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나라 말기이후에 서역으로부터 더 이상 새로운 것이 들어오지 않으면서, 송나라에 이르러서는 그 중심이 점점 동쪽으로 이동하게 된 것이 아닐까?

 

둘째, 진나라는 아마도 긴장을 잠시도 늦출 수 없었을 것이다. 통일후에도 몽염이 대군을 이끌고 흉노를 방어하였던 데서도 알수 있고, 만리장성을 쌓았던 데서도 알 수 있다. 서역의 신무기를 조금 먼저 받아들인 중앙아시아의 종족들 즉 흉노족이나 월지족등과 가장 먼저 부딪친 나라도 바로 진나라일 것이다. 진나라는 이들과의 긴장감섞인 전투 속에서 자랐을 것이다. '도전'과 '응전', 항상 강한 적, 그리고 새로운 기술, 무기, 전술을 도입하는 적들과 대치하면서 군사적인 경험과 능력이 더 키워진 것은 아닐까?

 

셋째, 당시 주요한 전투도구중의 하나는 말이었다. 기병은 가장 전투력이 있는 부대였다. 그런데, 이후 한나라에서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아랍의 말은 중원의 말보다 훨씬 뛰어났다. 이후 한무제가 대완마, 한혈보마를 얻기 위해서 멀리 떨어진 나라를 여러번에 걸쳐서 공략하였던 데서도 알 수 있다. 진나라는 이러한 우수한 말을 얻는데 가장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이 점은 다른 여섯 국가가 가지지 못했던 장점이다. 좋은 말 품종과 말을 기르기에 적합한 넓다란 초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고, 그러기에 가장 강력한 군마(軍馬)를 보유할 수 있었고, 이로 인해서 가장 강력한 기병을 보유할 수 있었던 것이다.

 

[2006년 11월 20일 저녁에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