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황에게 몇명의 자녀가 있었는지? 진시황의 사후 이 자녀들의 행방은 어떠한지?
수천년간 아무도 이에 대하여 확실한 대답을 내놓지 못하였다. 사서에서 이름이 나타나는 진시황의 자녀는 장자 부소(扶蘇), 막내아들 호해(胡亥), 공자 고(高), 공자 장려(將閭)의 네 사람이다. 어떤 사서에는 진시황에게 12명의 아들이 있다고 적었고, 사서중에는 진시황의 10번째 딸이 피살당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렇게 보면, 진시황의 자녀는 적어도 2,30명은 되었던 것이다. 전문가의 고증에 의하면 진시황은 모두 33명의 자녀를 두었다고 한다.
진시황의 33명의 자녀는 호해가 조고, 이사의 공모하에 황위를 빼았아서 진이세(秦二世)가 된 것을 제외하고, 나머지 32명은 모두 비명횡사하였다. 장남 부소는 위조된 유조에 따라 사사당했고, 호해는 황제에 오른 후 형제들이 불만을 가질 것이 두려워 그들을 잔혹하게 살육하였다. 사서의 기재에 따르면 "육공자를 두(杜)에서 죽였다"고 되었다. 십이공자를 함양시에서 죽였다고 되어 있고, 공자고는 도망치려고 준비하다가, 전가족이 몰살당할 것이 두려워 상소를 써서 진시황을 따라 순장하게 해달라고 하였고, 호해는 그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공자 장려의 형제3인은 "어쩔 수 없이 검을 들어 자결했다" 호해는 그의 모든 형들을 죽였을 뿐아니라, 자매들도 그냥 놔두지 않았다. 사서의 기재에 따르면, 호해는 "십공주를 두에서 죽였다" 이처럼, 호해는 자기의 황위를 보전하기 위하여, 잔혹하게 자신의 형제자매들을 죽여버렸던 것이다.
최근들어 진릉을 발굴하면서 하나의 새로운 사실이 드러났고, 후세에 이 측명의 단서를 제공해주고 있다. 1976년 10월, 진릉 동쪽에 있는 상초촌부근에서 배장묘군(陪葬墓群)을 발견하였다. 모두 17개였다. 고고학자들은 그 중 8개를 발굴하였는데, 8개의 묘에는 각각 관이 1개씩 들어있었고, 7개의 묘에는 각각 인골이 1구씩 있었는데, 5남2녀였다. 1개의 묘에는 관내에 청동검이 하나 있을 뿐 인골은 없었다.
불가사의한 점은 관에 있는 유골이 매우 흩어져 있었다는 점이다. 어떤 유해는 사지가 서로 분리되어 있었고, 어떤 것은 두개골과 몸통이 분리되어 있었다. 어떤 두개골에는 머리에 화살촉이 박혀 있었다. 이런 현상은 묘의 주인이 비정상적으로 사망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동시에 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들었던 점은 묘안에 부장품이 매우 풍부하였다는 점이다. 금, 은, 동, 철, 도자기, 옥, 조개, 뼈, 칠기 및 비단의 잔품 200여점이 발굴되었다. 이런 규격은 묘의 주인이 상당한 신분을 지녔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런 상당한 신분을 지녔으면서 잔혹하게 살해된 묘의 주인이 모두 능원부근에 매장된 것을 보면, 그들이 반드시 진릉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점으로 인하여 이들이 바로 잔혹하게 살해된 진시황의 자녀들일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발굴과정에서 사람들은 묘를 팠던 사람들이 불을 붙였던 흔적을 발견했다. 이것은 당시 묘에 묻을 때 날씨가 매우 추웠다는 점을 말해준다. 이것은 호해가 여러 공자들을 죽였던 시기와 일치한다. 이로 인하여, 전문가들은 분석을 거쳐, 이 묘장의 주인들은 아마도 진시황의 자녀들일 것으로 본다. 발굴과정에서 두 개의 사인(私印)이 발견되었는데, 하나에는 "영록(榮祿)"이라고 적혀 있으며 남성묘에서 나왔고, 다른 하나는 양자(陽滋)라고 새겨있으며 여성묘에서 나왔다. 만일 추측이 정확하다면, 이 영록은 진시황의 아들 이름이고, 양자는 진시황의 딸의 이름일 것이다. 발굴이 더 진행된다면, 좀더 많은 증거가 나올 것이고, 진시황의 자녀 행방에 얽힌 수수께끼를 풀어줄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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