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애신각라. 부의에게는 일곱 명의 자매들이 있었다.
일곱 자매중에서 대공주는 1972년 사망했고, 육공주는 1982년에 사망했다. 육공주는 생전에 북경화원의 화가였다.
이공주의 결혼은 부의가 주재하였다. 그는 사부인 정효서의 손자인 정광원을 선택했다. 해방후 남편 정광원은 북경시 우정국에 취직했으며, 건축기술자였다. 지금은 퇴직했다. 이공주는 유치원책임자로 일했으며 1973년에 퇴직했다.
삼공주의 혼인은 부모가 주재했다. 해방후 삼공주는 북경 동성구의 정협상임위원이었다. 남편은 번역업무를 하였다. 다오얼족인 남편은 현재 전국 정협위원이다.
사공주는 부의의 소개로 부의의 친구인 조기(趙琪)에게 시집간다. 항일전쟁때, 조기는 장기간 해외에 나가 있었고, 1949년후에 중국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당시 사공주의 생활은 매우 곤란했는데, 주은래 총리의 배려하에 일자리를 찾았다. 1982년, 그녀는 34년간 헤어져 있던 남편을 만난다. 원래, 조기는 대만으로 간 후에 대륙과 소식을 끊었는데, 처자식의 상황을 듣고나서, 여러해동안 떠나있던 고국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오공주는 형제들의 소개로, 청왕조에 충성하던 대신인 만승의 아들 만가희와 결혼했다. 만가희는 1949년후에 북경에서 번역업무를 했고, 1972년 뇌일혈로 사망했다. 오공주는 자신의 힘으로 생활했다. 서직문 의화반점에서 출납을 맡았고, 1973년에 퇴직했다.
칠공주는 1921년에 태어났다. 그녀는 황족중 유일하게 혁명의 길을 걸었다. 1947년 26세인 칠공주는 황족의 "경업학교"에서 업무원을 하였는데, 당시 진보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던 교도주임 이숙분의 영향을 받는다 .북경해방때, 그녀는 학생을 데리고 해방을 경축하는 시위에 참여한다. 이어서 그녀는 교사가 되며, 황족중 제일 먼저 혁명에 참여한다. 그리고 그녀는 공주중에서 유일하게 자유연애로 결혼한다. 남편인 교굉지는 중학교의 교도주임이었다. 1960년에 학생을 데리고 밀운댐에서 노동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심장병이 발작하여 기차에서 사망한다. 그 때 나이 겨우 41세였다. 이러한 큰 타격에도 칠공주는 여전히 강인하게 살아왔다. 현재 북경 숭문구 정협의 상임위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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