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청 후기)

새금화(賽金花): 기녀에서 공사부인까지

중은우시 2006. 6. 5. 13:45

 

 

새금화(미상 - 1936년)는 19세기말 20세기초에 중국의 전설적인 여인이다. 일찌기 공사(公使) 부인이 되어 유럽 4개국에 나간 적이 있고, 기녀(妓女)가 되어 상해에서 이름을 날린 적도 있고, 8국연합군이 북경을 점령하였을 때는 연합군의 총사령관을 설득하여 북경시민을 보호하기도 하였다. 새금화는 또한 평생 3번 결혼하였다.

 

새금화의 원래 이름은 조영비(趙靈飛)이고, 어릴 때 이름은 조채운(趙彩雲)이었다(일설에는 鄭씨라는 설도 있다). 그녀의 출생일시에 대하여는 1864년설, 1871년설, 1872년설, 1874년설의 여러가지 version이 있다. 그녀의 출생에 대하여 설이 정립되지 않아서, 그녀의 나이에 대하여도 여러가지 다른 견해가 전해진다. 통상적으로 1872년 10월 9일, 안휘성 휘주에서 태어난 것으로 본다. 나중에 부친을 따라서 소주(蘇州)로 이사간다. 1886년에 소주의 강에서 화선(花船)에서 일을 하기 시작하면서 이름은 부채운(富彩雲)으로 고친다.

 

- 공사부인이 되다.

 

새금화는 1886년 홍균(洪均)을 만나게 되는데, 홍균은 과거에 장원급제한 인재로서 당시 소주에 돌아와서 친상을 치르는 중이었다. 새금화와 만나자마자 홍균은 그녀의 미모에 푹 빠진다. 1887년 1월 14일, 홍균은 새금화를 셋째 첩으로 받아들이고, 이름을 홍몽란(洪夢鸞)으로 고친다.

 

1887년 5월, 청나라 정부는 홍균을 독일, 러시아,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네 개국을 공사로 임명한다. 홍균의 정실부인은 홍균을 따라 외국을 나가고 싶어하지 아니하여, 새금화로 하여금 홍균을 따라 유럽으로 가도록 지시한다. 이로써 새금화는 공사부인의 명의로 4개국에 나간다.

 

공사부인인 기간동안 베를린에서 수년간을 머물면서 성페테르스부르그(레닌그라드), 제네바등지를 가보고, 상류사회와 교분을 가진다. 여러번 독일황제 빌헬름2세와 황후 아우구스타 빅토리아를 접견했다. 이 기간동안 나중에 팔국연합군의 총사령관이 되는 바드쉬를 알게 된다.

 

베를린에 거주하는 기간동안 새금화와 홍균은 딸을 하나 낳는데, 이름을 덕관(德官)으로 짓는다.

 

3년후인 1892년 11월 30일, 홍균은 임기를 마치고 상해로 귀국하고, 12월말에 북경에 도착해서 병부좌시랑이 되고, 북경의 저택에 거주한다.

 

- 기녀생활

 

1893년(광서19년) 음력8월23일, 홍균이 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새금화는 홍균의 관을 소주로 운송하는 도중에 홍씨집안을 떠나 상해에 머문다. 새금화는 상해의 이마로 정풍리 곁에 있는 언풍리에 방을 빌리고, 2명의 아가씨를 사서, 기생집을 낸다. 이름을 조몽란(曹夢蘭)으로 고치고 화명을 부채운(傅彩雲)으로 한다. 그녀가 장원부인도 지내고, 공사부인도 지냈으므로, 그녀의 가게는 상해탄에서 유명하게 된다.

 

광서24년(1898년) 여름, 소주장원 육윤상은 상해지부를 움직여, 새금화로 하여금 상해를 떠나게 만든다. 화를 피하기 위하여 새금화는 천진으로 올라간다. 먼저 고소매(高小妹)의 기생조직에 들어가 있는다. 나중에 빈강북도에 원래 "금화(金花)"라는 이름의 기생집을 빌려서 "새금화서우(賽金花書寓)"로 이름을 걸고 자신은 새금화로 개명하고, 자신의 기생조직인 금화반(金花班)을 조직한다.

 

광서25년(1899년)에 북경으로 이사간다. 서단의 석두후퉁에 살면서, 고비후퉁과 섬서강에 간판을 걸고 영업을 한다. 경성의 유명한 유생이자 거상인 노옥방과 결의를 맺어 새이야(賽二爺)라고 불리운다. 나중에 천진으로 돌아간다.

 

이 기간동안 경극으로 유명한 손작주(孫作舟)는 손삼야(孫三爺)라고 불리었는데, 계속 새금화와 동거하고, 새금화의 기생집의 버팀목이 되었다. 새금화가 손작주와 너무나 친밀하여, 새금화의 영업에 영향을 주었다.

 

- 경자년 사건

 

경자년에 천진에서는 의화단의 난이 일어나고 새금화는 북경통주로 도망한다.

 

새금화는 독일에 있는 동안 독일어를 배웠고, 독일병사들과 말이 통하였다. 그래서 팔국연합군의 총사령관인 바드쉬와는 이전에 만난 적이 있었으므로, 새금화는 한편으로는 팔국연합군을 위하여 군량을 조달해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바드쉬로 하여금 무고한 백성을 함부로 죽이지 말도록 권유하고, 북경시민들을 보호한다. 동시에 크린더의 미망인을 잘 설득하여, 커린더의 비석을 세워주는 방식으로 커린더가 피해입은데 대한 보상을 마치는 것으로 한다. 그리하여,당시 북경시민들은 새금화의 이러한 행적에 감사하게 생각하여 "의화대신(議和大臣 賽二爺)"라고 그녀를 불렀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는 여러가지 이설도 있다. 즉, 제여산과 같은 사람은 원래 새금화가 바드쉬와 잘 알지도 못했고, 더구나 커린더부인에게 무슨 영향을 끼칠 입장이 아니었다고도 본다. 새금화가 스스로 쓴 글에서도 어떤 때는 바드쉬를 모른다고 했다가, 안다고도 하고, 동거했다고도 하여 정확하지 않다.

 

- 두번째 혼인

 

1903년 4월, 금화반의 한 아가씨가 매춘을 견디지 못하고 아편을 대량으로 복용하여 자살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새금화는 순성어사인 고재염에게 체포되고, 형부로 압송된다. 5월에 소주로 보내어지고 나중에 석방된다. 새금화가 석방된후, 금화반은 해체되고, 가산도 흩어진다. 나중에 상해로 와서 이수향, 임강설, 화취금, 임대옥, 육난방등과 함께 가게를 낸다. 1905년 새금화는 손작주와의 관계를 청산한다.

 

1911년(선통3년), 새금화는 호녕철로단조사관 조서충(曹瑞忠)의 첩이 된다. 다음해에 조서충이 사망하자 다시 기녀가 된다.

 

- 세번째 혼인

 

1913년에 새금화는 참의원의원이자 강서민정청의 청장인 위사령(魏斯靈)을 알게 된다. 1916년에 두 사람은 같이 북경으로 간다. 그리하여 북경 전문밖의 앵도사가에 산다. 1918년 6월 20일, 새금화와 위사령은 상해에서 정식결혼을 하고, 이름을 위조령비(魏趙靈飛)로 바꾼다. 새금화는 66세의 나이로 북경에서 병으로 사망한다(어떤 사라은 72세라고도 한다)

 

새금화의 사후에 도연정의 향총에 묻힌다. 묘비는 유명한 서화가인 제백석이 썼다. 도연정에는 새금화의 평생을 쓴 세가지 석각이 남아 있는데. 채운도, 전채운곡, 채운후곡이 그것이다. 채운도는 유명한 화가인 장대천(張大千)이 그린 새금화의 초상이며, 전채운곡과 채운후곡은 반증상이 새금화를 위하여 지은 장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