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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청 후기)

가경(嘉慶)연간, 좋은 인재가 많았는데 왜 점점 쇠퇴했을까?

by 중은우시 2020. 11. 8.

글: 기점문사(起點文史)

 

청나라는 아마 건륭제만이 자칭 천조상방(天朝上邦)이라 자처할 자격이 있을 것이다. 모두 어느 정도 알고 있겠지만, 강건성세(康乾盛世)이후 청나라는 아주 명확하게 쇠퇴현상을 보인다. 역사의 철칙을 보면, 한편으로 그럴 시간이 된 것이기도 하다. 모든 왕조는 거의 수백년의 기간동안 존속한다. 가경제때가 아마 흥성하다가 쇠퇴하는 기로일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건륭연간에 건륭제는 여러번 강남을 순유하고, 여기에 관료들의 부정부패현상이 엄중해졌다. 옹정제때처럼 전심전력을 다하여 정무를 보지도 않았고, 쇄국정책을 쓴다. 번성하던 대청왕조는 이때부터 이미 쇠퇴의 화근이 심어진 것이다.

 

한(漢)나라의 경우를 보면, 한편으로 진나라에서 모든 힘을 쏟아서 건설한 각종 도로와 성곽으로 이미 아주 견실한 기초가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한나라의 전기에는 휴양생식의 정책으로 점점 경제가 회복된다. 그리하여 한무제의 집권시기에 휘황한 시대를 맞이하는 것이다.

 

또한 당(唐)나라의 경우를 보더라도, 수나라때 각 시기에 엄격한 개혁조치가 제대로 시행되었고, 이는 당나라에 아주 굳건한 기초가 된다. 우리는 다시 청(淸)나라를 보자. 가경제가 계속 발전하고 번영하려면 앞의 황제가 반드시 튼튼한 받침을 깔아주었어야 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건륭제는 집권시기에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래서 가경제는 즉위함녀서부터 이런 기반은 없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단순히 황제만 본다면, 가경제는 기실 원대한 이상이나 포부를 가진 제왕이 아니다. 세계각지에서는 개혁의 조류가 일어나고 있었고, 가경제도 개혁의 조류를 쫓아가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는 아편을 금지하고, 언로를 널리 개방하며, 과감하게 서방열강의 무리한 요구를 거절했으며, 전력을 다하여 국가환경을 정돈하려 했다.

 

 

 

가경제가 집정한 초기의 몇년간은 그가 여전히 태상황인 건륭제의 그림자 아래에서 살아야 했다. 다만 건륭제가 죽은 후 그는 진정 대청왕조의 권력을 장악한다. 가장 빠른 속도로 각양각색의 문제를 해결했다. 그러나 그렇긴 해도, 그는 여전히 대청왕조의 쇠퇴의 발걸음을 저지할 수 없었다. 가경제가 실패한 원인을 분석해보면, 실로 약간은 어쩔 수 없었다는 생각도 든다. 왜냐하면 그가 기용한 두 명의 충량지신(忠良之臣)은 한명이 왕걸(王傑)이고 다른 한명이 유용(劉墉)이었다.

 

왕걸은 자가 위인(偉人)이다. 과거에 장원한 인재이고, 사서오경, 팔고문등에 모두 정통했다. 그리고 그는 청백리였다. 현량지신(賢良之臣)을 묘사하는 모든 말이 그에게 들어맞는다. 청렴하고 깨끗하면서 스스로 규율을 지키고, 강직하며 아부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사람은 통상적으로 한가지 치명적인 약점을 갖기 마련이다. 그것은 바로 수구적이고, 지나치게 조심스럽고 신중하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전의 황제때는 이런 자세의 대신이 황제에게 거울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가경제에게는 오히려 골치아픈 반각석(絆脚石, 뒷다리를 잡는 것)이 된다.

 

왕걸의 청렴함과 자율성을 얘기하자면, 몇 가지 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첫째는 왕걸이 태자의 스승으로 있을 때, 태자에 대한 교육과 단속이 아주 엄격했다. 그래서 잘못을 범하면 바로 벌을 주었다. 조그만치도 봐주지 않았다. 심지어 황자를 무릎꿇게 하기도 했다. 이런 일은 당시 조야를 깜짝 놀라게 만든다.

 

둘째는 왕걸은 탐관 화신(和珅)과 맞서싸울 담량이 있었다. 화신은 아주 재능있는 신하이고, 건륭제의 총애를 크게 받았다. 그래서 화신의 부정부패에 대하여 건륭제는 보고도 못본 척 지나갔다. 이런 사람에 대하여 왕걸은 화신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전혀 사정을 봐주지 않고 비판을 가했다. 이를 보면 이런 성격의 왕걸이 있고, 그렇게 수구적인데, 가경제가 어떻게 그를 기용해서 개혁을 추진할 수 있었겠는가?

 

유용은 아주 뛰어난 서예의 조예를 지녔다. 관직에 있으면서 사람됨과 일처리가 용감하고 과단성있었다. 그리하여 건륭제가 좋아했다. 후기에 그는 여러 백성들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일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떤 때는 흐리멍텅한 짓을 하여 적지 않은 잘못도 저질렀다. 다만 그에게 백성을 생각하는 초심은 항상 존재했다. 가경제는 집정후 그를 아주 높이 평가한다. 대사를 해결하는데는 유용이 흐리멍텅하지 않고, 가끔 잘못을 저질러도 가경제는 용서해 주었다. 기실 그를 적절한 자리에 앉혔더라면 그가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가경제는 굳이 그를 아주 높은 자리에 앉혀버린다. 그래서 탄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도 가경제에게 또 하나의 반각석이 된다.

 

유용의 일생에 대하여는 어떻게 평가해야할지 정말 모르겠다. 백성들의 억울한 사건을 해결하는데서는 포청천처럼 태도가 강경했다. 그러나 인재를 추천하는데서는 연이어 잘못을 범한다. 과거답안지를 잘못 비판하는가 하면, 쓸데없는 사람을 추천하기도 했다. 황제의 뒤에서 문제를 해결할 때, 유용은 부지불식간에 여러 규정을 어기게 된다. 그리하여 건륭제로부터 여러번 강등당했다. 가경은 그를 어른으로 여겼고, 또한 재능과 학문이 있다고 여겨서 중임을 맡긴다. 다만 실제상황은 조정에서 중임을 맡길만한 대신이 많지 않아서, 결국 중하책을 선택한 것이었다.

 

가경제가 집권하는 기간동안 위의 두 충량지신을 기용한 것은 그 일 자체로만 보면 잘못이 아니다. 다만 가경제가 집권한 시기는 바로 개혁의 조류가 아주 보편적이던 시기였다. 국가를 잘 운영하려면 전력을 다해서 개혁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 두 노신중 한 명은 성실하고 착실하지만 개혁의 용기는 조그만치도 없다. 또 다른 한명은 자주 멍청한 일을 벌였다. 권세를 무서워하지도 않고, 일처리도 과감했지만, 개혁의 주력을 맡기에는 부적합했다. 그래서 비록 당시의 가경제에게는 개혁하고픈 마음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인재를 선택하는 면에서 실수를 저질렀다. 그래서 청나라가 쇠락하는 국면을 제지할 수 없었던 것이다.

 

가경제의 집권시기에 인재는 많이 배출된다. 그러나 가경제는 인재를 적절한 위치에 가져다 놓지 못했다. 충량대신은 비록 아주 높은 인품을 지니고 있지만, 개혁이라는 업무를 실천하는데서는 마음이 있더라도 힘이 없었다. 가경제에게 청나라의 현상을 개혁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더라도, 당시에 사정의 주요한 모순을 이해햐지 못했다. 비록 힘을 다하여 개혁한다고 하더라도 대청왕조의 쇠락을 약간 늦출 수 있을 뿐이었을 것이고, 시종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