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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민테른24

"대만독립"을 누가 가장 먼저 주장했는가? 글: 안창해(顔昌海) 현재 중국대륙의 이데올로기지도에서 '대독(臺獨, 대만독립)'은 제1호적이라 할 수 있다. 미국식의 자유주의가 종국적인 의미에서는 중국대륙의 최대위협이지만, 미국은 태평양 건너편에 있고, 국내외 민주운동인사들의 반항도 대륙에 발을 붙이지 못하고 있다. 오직 일의대수(一衣帶水)의 대독은 중국대륙에서 '내정'으로 분류되긴 하지만, 실제로 간섭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그리하여 대만이 중국대륙에 끼치는 정치적 충격이 가장 크다. 대륙에서 공식적으로는 "대독"의 최초기원을 2차대전이후라고 한다. 1946년에 창간된 "대만잡지", 1947년에 성립된 "대만재해방연맹(臺灣再解放聯盟)"의 요문의(廖文毅)를 대표인물이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대독'은 1920년대말에 이미 등장했다. 그렇다면 중국.. 2023. 5. 24.
진독수(陳獨秀)는 왜 모스크바의 초청을 5번이나 거절했을까? 글: 왕우군(王友群) 중국공산당과 모스크바의 연원은 102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21년 당시의 러시아공산당(이후 소련공산당으로 명칭을 바꿈)이 장악하고 있던 코민테른(공산국제)은 러시아공산당의 이익을 위해, 대표를 상해로 파견하여 반드시 러시아공산당의 지시를 듣는 중국공산당을 성립시키고자 한다. 진독수는 중공의 초대 당수(黨魁)로 1921년 중공1대부터 1927년 중공5대까지, 진독수가 중공의 당수를 맡았다. 1927년에 이르러, 코민테른의 극동지부로서 중국공산당이 이끈 '대혁명'이 실패로 끝난다. 중공당수 진독수는 일거에 중시지적(衆矢之的)이 된다. 1927년부터 1930년까지, 코민테른은 거듭하여 진독수에게 모스크바로 올 것을 요구하였지만, 진독수는 모두 거절했다. 이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 2023. 4. 21.
향충발(向忠發)과 그의 체포전후 (1) 글: 오기민(吳基民) 향충발은 중국공산당의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1928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중공6대때 중앙정치국 주석 겸 중앙정치국 상임위원회 주석에 당선된다. 사람들은 그를 습관적으로 '총서기'로 불렀다. 사건이 많았던 1931년 6월 22일 체포되었고, 변절한다. 그리고 24일 사망한다. 최근에 출판된 중공중앙당사연구실이 쓴 에서는 그의 체포에 대하여 단지 두 마디만 적혀 있다: "6일,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주석을 맡았던 향충발이 상해에서 체포된 후 변절한다. 이 두 사람(향충발과 같은 해 4월에 체포되어 변절한 고순장(顧順章)을 가리킴)의 변절은 중공중앙기관과 중앙지도자의 안전에 극히 큰 위협을 조성했다" 오랫동안 향충발에 대한 평가는 아주 각박했다. 노동자출신이기 때문에 '.. 2023. 4. 21.
왕명(王明)중독사건: 중공당사 최대의 미스테리사건 글: 지식도학잡료(知識都學雜了) 1943년은 연안정풍운동(延安整風運動)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때였다. 그때 중공당내에는 제3자의 "좌경착오노선"에 대한 비판투쟁이 진행중이었다. 바로 이때 하나의 중대한 사건이 터진다. 즉 "왕명중독사건"이다. 이 사건은 점차 중공당사상의 최대 역사미스테리사건이 된다. 그리고 향후 수십년간, 중공당사를 추화(醜化)하고 오랫동안 국제적으로 엄청난 악영향을 끼지게 되는 사건이 된다. 1974년, 왕명은 죽기 전에 모스크바에서 이라는 회고록을 출판한다. 그는 이 책에서 자신이 연안에서 중독된 사건을 언급하는데, 그는 그것이 모택동이 사람을 시켜 그에게 독을 쓴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주장이 나오자,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다. 왕명이 기록한 글은 속속 해외의 매체에서 전재되었다... 2023. 2. 6.
진독수(陳獨秀) vs 모택동(毛澤東): 중국공산당의 초기지도자 글: 오성수행(悟性隨行) 중국공산당 최초의 지도자는 진독수이다. 진독수의 특징은 학술사상분야에서 독립구신(獨立求新), 자신불기(自信不羈), 시야서리(視野犀利), 격정양일(激情洋溢)하며, 자신의 의견을 얘기하기 좋아하고, 또한 잘 말할 수 있었다. 이런 특징은 현대교육에 종사하거나 방향성과 기치성을 확립하는 인물로서는 더 이상 적합할 수 없다. 그래서 진독수가 중국공산당의 초대 지도자가 된 것은 아주 적합하다. 민주와 과학 덕선생(德先生, Democracy를 말함)과 새선생(賽先生, Science를 말함). 중국의 신문화운동은 모두 진독수가 극력 추진하여 중국의 넓은 대지 위에 광범위하게 전개되고 스며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그의 한계성이다. 그는 멀리 보고 깊이 보지만, 현실은 도외시했다. 192.. 2023. 2. 1.
신중국의 개국장수(開國將帥)중 '외국인' 글: 조대부(趙大夫) 개국장수는 1955년-1965년, 군대계급제를 실행한 후, 장군, 원수 계급을 수여받은 해방군고위장군의 통칭이다. 1955년에서 1965년사이에 수여받은 원수(元帥)는 10명, 대장(大將)은 10명, 상장(上將)은 57명, 중장(中將)은 177명, 그리고 소장(少將)은 1,360명이다.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은 사실은 개국장수중에 여러 명의 "외국국적자"가 있다는 것이다. 1. 개국상장 섭비(葉飛) 섭비(1914.5.7 - 1999.4.18), 원래 이름은 Sixto Mercado Tiongco이다. 1914년 5월 7일 필리핀 루손섬 케손주 티아옹시의 중국계 가정에서 태어났다. 부친인 섭손위(葉蓀衛)는 1900년 단신으로 필리핀에 갔고, 모친 Francisca Mercado는.. 2022. 11. 9.
누가 중국을 분열시키는가? 글: 진숙함(陳叔涵) 중공은 걸핏하면 중국분열의 죄명으로 타이완독립인사, 홍콩독립인사, 신장독립인사 및 티벳독립인사들을 공격하곤 한다. 마치 중공만이 중국통일을 옹호하는 것처럼. 그런데, 중공은 기실 도둑이 도둑잡으라고 소리치는 격이다. 중공이야말로 중국분열의 시작용자(始作俑者)이고, 중공의 굴기는 완전히 중공이 중국을 분열시킨 결과이다! 중국역사가 20세기에 접어들었을 때, 모택동은 중국분열의 비조(鼻祖)가 된다. 그는 일련의 중국 각성(省)이 각자 따로 가자는 주장을 한다. 예를 들어 , 등등. 1920년 9월 30일 모택동은 장사의 에 자신의 이름으로 을 싣고, 공공연히 중국을 27개국가로 나누자고 주장한다; 전국의 '총건설'을 일정한 시기내에 완성하는 것은 바라기 어려우니, 그렇다면 가장 좋은 방.. 2022. 8. 20.
왕명(王明): 신비한 최고지도자 글: 호기조장(好奇組長) 이전에 학교에 다닐 때, 교과서에서 왕명을 언급할 때면 좌경착오와 우경투항주의착오를 저질렀다고 하여, 좌우로 모두 착오를 저지른 사람이라고 하였다. 역사서에 이름이 오를 정도면 그는 아주 중요한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도대체 어떤 인물인가? 왕명은 거의 부호화된 인물로, 많은 사람들은 그의 기본적인 평생이력조차도 잘 알지 못하고 있다. 왕명은 1904년 안휘(安徽) 육안(六安)에서 태어났고, 원래 이름은 진소우(陳紹禹)이다. 왕명은 그가 나중에 쓴 가명이다. 그때 혁명에 참가한 사람들은 가명을 많이 썼다. 어떤 때는 가명이 원래 이름보다 사람들에게 더욱 널리 알려지기도 한다. 예를 들면 박고(博古)같은 경우이다. 1925년, 왕명은 무창상과대학(武昌商科大學)에서 공부한다.(.. 2022. 7. 3.
중국공산당 건당(建黨)의 내막 글: 방주자(方舟子) 중국공산당이 상해에서 제1차전국대표대회("1대")를 개최한 것을 중국공산당 성립의 표지로 본다. "1대"는 7월 1일에 개최된 것이 아니다. 이 날짜가 공산당건립기념일로 정해진 것은 모택동이 임의로 지정한 것이다. 공산당이 성립된 초기에는 도망다니느라 바빴기 때문에 매년 건당을 경축하지도 못했다. 1938년 공산당이 섬서북부에 근거지를 마련 하고, 안정되고난 후에 비로소 모택동은 매년 건당을 기념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다만, 모택동이 비록 1대 대표이고, 기록을 책임진 대표이기는 하지만, 자신도 "1대"를 도대체 언제 개최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당시 연안에는 또 한명의 "1대"대표인 동필무가 있었다. 모택동은 동필무를 찾아가서 물어본다. 동필무도 구체적으로 어느 날에 개최했는지.. 2021. 12. 23.
진독수(陳獨秀): 중공 제1대 총서기의 최후 글: 왕우군(王友群) 금년은 중국건당100주년이다. 100년동안, 중공은 전후로 12명의 총서기(당수)가 있었다. 제1대 총서기는 진독수이다. 재직기간은 1921년 7월부터 1927년 8월까지이다. 그후 진독수는 면직당하고, 당적을 박탈당했으며, '일본스파이'로 몰렸고, 여러 '막수유(莫須有)'의 죄명을 뒤집어 쓴다. 진독수는 자가 중보(仲甫), 호는 실암(實庵)이며, 안휘 회녕 사람이다. 청나라때 과거에 급제한 수재(秀才)이다. 5번 일본으로 건너가 공부를 하거나 피난을 했다. 북경대학 교수, 북경대학 문과대학장을 지냈고, 5.4운동의 지도자중 한 명이다. 1920년 4월 소련공산당(볼세비키) 극동국 블라디보스톡분국 외국처는 그레고리 보이틴스키(중국명 吳廷康)를 중국으로 파견하여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선전.. 2021. 4.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