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기스칸47 몽골과 티벳불교의 만남: "3차회맹(三次會盟)" 글: 진호무(陳浩武) 오늘 저녁 자리해 주신 학자분들과 여러분들. 저는 경제학을 전공했고, 역사를 전공하지 않았습니다. 역사는 그저 취미로 배우고 있습니다. 그래도 독서의 경험을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오전에 우리는 둬룬(多倫)을 갔었는데, 너무 놀랐습니다. 이곳이 이렇게 중요한 .. 2019. 2. 8. 서하(西夏): 신바하게 사라진 고대국가, 글: 문재봉(文裁縫) 1909년, 제정러시아의 대령이자 러시아왕립지리학회 회원인 코츠로프는 완전무장하 '탐험대'를 이끌고, 야생동물을 고찰한다는 명목을 내걸고 중국 내몽골의 흑성(黑城)으로 간다. 목적은 바로 오래전부터 전해져 내려온 전설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다. 전설상의 보물.. 2019. 1. 18. 야율초재(耶律楚材): 징기스칸은 왜 그를 중용했는가. 글: 황수(黃帥) 1211년, 징기스칸의 철기(鐵騎)가 야호령(野狐嶺)에서 금나라군대와 격전을 벌일 때, 야율초재(耶律楚材)는 겨우 21살이었다. 그는 가슴에 큰 뜻을 품고 금나라 황제와 함께 곧 중원으로 쳐들어올 몽골인을 격퇴하려고 준비했다. 그러나, 역사의 저울은 이때 이미 몽골인에게 기울어 있었다. 수십년간의 향락과 소비로 완안아골타(完顔阿骨打)의 자손들이 지탱해온 국가는 사상유례없는 위험에 처하게 된다. 야호령 전투에서 금나라군대는 정예병을 모조리 잃는다. 심지어 황제 금선종(金宣宗)마저 남으로 도망쳐 변경(지금의 개봉)으로 간다. 일시에 금나라가 망할 것이라는 공포분위기가 중원의 대지를 감싸게 된다. 야율초재는 몽골인과 더욱 거리가 가까웠던 중도(中都)에 남는다. 즉 지금의 북경이다. 이곳은 여.. 2018. 12. 19. 다르후트(達爾扈特)인: 징기스칸능의 수호자 글: 취역사(趣歷史) 관직을 맡지도 않고, 세금을 내지도 않으며, 무덤을 지키는 임무를 대대로 전한다. 700여년동안 한 전설의 몽골부락인 "다르후트"는 징기스칸능의 영워한 수호자가 되었다. 이 부락은 1227년 징기스칸이 병사한 이후 지금까지 충성스럽게 그의 능묘를 지키고 있다. 신중.. 2018. 12. 3. 오고타이: 몽골전통과 중원문화가 만나면서 후계자에 오르다. 글: 소가노대(蕭家老大) 징기스칸에게는 네 명의 아들이 있었다. 장남 주치, 차남 차가타이, 삼남 오고타이, 사남 톨루이. 네 아들 중에서 주치(몽골어로 '손님'이라는 의미임)를 제외하고는 모두 징기스칸의 친아들이다. 네 아들은 모두 각자의 장점을 지니고 있고, 모두 영웅호걸이었다. .. 2018. 11. 23. 명망청흥(明亡淸興)(2): 인생약지여초견(人生若只如初見) 이런 견해가 있다. 명나라의 멸망은 가정제에게서 시작된다. 더 많은 사람들은 그의 손자인 만력제야말로 죄괴화수(罪魁禍首)라고 본다. 바로 그가 수십년에 걸친 소극적인 태업과 부작위때문에 비로소 이 일찌기 번성했던 제국이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2018. 8. 15. 이전 1 2 3 4 5 ··· 8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