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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명말청흥: 제3자의 시각으로 본

명망청흥(明亡淸興)(2): 인생약지여초견(人生若只如初見)

by 중은우시 2018. 8. 15.

이런 견해가 있다. 명나라의 멸망은 가정제에게서 시작된다. 더 많은 사람들은 그의 손자인 만력제야말로 죄괴화수(罪魁禍首)라고 본다. 바로 그가 수십년에 걸친 소극적인 태업과 부작위때문에 비로소 이 일찌기 번성했던 제국이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되돌릴 수 없는 지경에서 숭정제가 등극하고, 그는 가련한 속죄양이 되었을 뿐이라고 본다.


그러나, 당시의 유럽선교사들은 만력제에 대한 인상이 모두 나쁘지 않았다. "거리가 아름다움을 만든다"는 것 말고도, 아마 우리의 황제는 극히 나태한 것을 빼고(당연히 이렇게 말하는 것이 전면적이 아닐 수 있다. 어쨌든 그는 만력삼대정을 해냈으니까), 극히 탐욕스러웠다. 아무런 거리낌없이 자신의 개인돈 즉 내고(內庫)를 챙겼을 뿐아니라, 그는 특히 기이하고 괴상한 신선한 놀이감을 좋아했다. 보기만 하면 갖은 방법을 써서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선교사들이 가져온 자명종, 천상의(天象儀)등등의 재미있는 물건은 바로 만력제의 간지러운 곳을 긁어준 것이다. 그들들을 가지고 놀면 시간가는 줄 모를 정도였다. 심지어 몇몇 권세있는 교우(뒤에서 이들 중국역사상의 이름을 언급하겠다)의 도움하에, 이들 '공품(貢品)'을 수리하는데 편리하다는 명목으로 마테오 리치등은 자유롭게 궁을 출입할 수 있는 특권을 얻어낸다.


다만, 화려한 궁궐 밖에서는 명제국이 바닥이 보이지 않는 심연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만회불가능할 정도로 급속히 추락하고 있었다. 마테오 리치가 북경에 도착한 만력29년 즉 1601년 중국동북의 한 소수민족 추장이 마찬가지로 제국의 경사로 '조공'을 바치러 온다. 그의 이름은 누르하치이다. 그의 본민족인 여진어에서 이 이름의 뜻은 "야저피(野猪皮, 멧돼지가죽)"라고 한다.


그 뿐아니라 누르하치 추장의 두 동모동생인 수르하치는 "소야저피(小野猪皮, 작은 멧돼지가죽)"이고 야르하치는 "표자피(豹子皮, 표범가죽)"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리고 누르하치의 11년후에 태어난 아들 도르곤은 여진어에서 "환(獾, 오소리)"라는 뜻이라고 한다. 확실히 동물보호를 제창하지 않았던 그 시기에 이런 상황은 한 가지를 의미한다. 여진민족은 수렵에 의존해서 살아왔다.


증거는 없다. 같이 북경에 '조공'하러 온 선교사와 누르하치가 무슨 접촉을 했는지 아닌지는. 마테오 리치등도 누르하치에 관한 아무런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당시 전체 대명왕조는 이들 여진인을 신경쓰지 않았다. 그저 그들이 야만스러운 속국신하라고만 여긴다. 이교도의 신앙을 개종시키려고 극력 애를 쓰던 선교사와는 달리, 누르하치는 그런 각성이 없었다. 그가 이번에 경성에 온 주요 목적은 고관들에게 선물을 바치고 뇌물을 바치려는 것이다. 왜 그런지는 뒤에 따로 설명하겠다.


이전인 만력20년 즉 1592년, 중국과 일본은 조선에서 대규모 전쟁을 벌인다. 겉으로 보기에 우국우민의 누르하치는 적극적으로 명나라조정에 여진기병을 이끌고 조선에 가서 왜군을 무찌르겠다고 말했다.비록 이 제안은 인랑입실(引狼入室)을 걱정한 조선에서 완곡하게 거절하지만. 조정은 누르하치의 적극적인 태도에 아주 만족한다. 얼마후에는 그를 용호장군에 책봉한다. 그외에 부득이 얘기해야할 것은 항일원조기간동안, 명군은 동북의 병력배치가 많이 비어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이여송 휘하의 요동철기는 대부분 조선으로 가서 전투에 참가한다. 이렇게 하여 누르하치가 발전할 여지가 많았다. 그는 이 기회를 틈타 다른 여진부락의 영지를 집어삼키면서, 자신의 세력을 극력 확장한다.


그때 북경으로 와서 진공하고나서 15년이 지난 만력44년 즉 1616년에 이 수렵민족의 우두머리는 마침내 허투아라(지금의 요녕성 신빈현 영릉진)에서 거병하여 반란을 일으킨다. 자칭 "복육열국영명칸(覆育列國英明汗)"이라 하고, 연호를 "천명(天命)"이라 한다. 국호는 여진조상의 '금'을 그대로 쓴다. 역사상 그를 '후금'이라 부른다. 이 후금은 바로 청왕조의 전신이다. 그리고 후금의 개국칸 누르하치는 나중에 청태조로 존칭되는 바로 그 사람이다.


이때 마테오 리치는 이미 죽은지 6년이 지났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아마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이 사대부들에게 "서태선생(西泰先生)"으로 존경받고, 겉으로 보기에 자애로운 눈과 선량한 눈빛의 이탈리아 노인이 살인화기에 정통하고 사용기교를 가진 일련의 중국학생을 배양했을 줄은. 그리하여 일정한 정도에서, 뒤에 나오는 명청전쟁의 과정에 영향을 미친다. 또한 객관적으로 대명의 수명을 연장시킨다. 심지어 백전백승의 누르하치칸 본인이 마지막에는 아마도 마테오 리치의 손에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이것은 왜냐하면, 만일 누르하치가 정말 소문대로 화포에 맞은 상처로 죽었다면, 그의 사망 혹은 중상을 가져온 그 포탄은 분명히 영원성의 홍의대포에서 발사된 것이다. 어떤 사람의 고증에 따르면, 이들 대포는 마카오의 바깥바다에 침몰된 영국순양함에서 건져낸 것이라고 한다. 당초 이것을 도입한 사람은 바로 마테오 리치의 저명한 학생이다. 그리고, 제국의 포병에게 어떻게 그것을 사용할지 가르친 교관도 역시 마테오 리치의 제자의 제자들이다. 심지어 당시 영원성 현장의 명나라 포병지휘관도 역시 그들 중 하나이다.


만일 누르하치가 1601년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면, 같이 북경에 있던 마테오 리치등을 찾아가서 만나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들과 관계를 맺지 않았을까? 아. '인생약지여초견'(인생은 처음에 생각했던 것처럼 진행되지 않는다)이다.


이야기를 처음부터 시작하려면, 명청간의 은원을 얘기해야 한다. 거슬러 올라가서 원인을 찾는다면, 선교사들의 견해에 따르면, 중국인과 이들 달단인'간의 갈등은 최소한 당시보다 4백년전인 13세기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베니스인 마르코 폴로가 중국과 달단간의 전쟁을 서술했다. 그들의 사서와 편년사의 기록에 따르면, 1206년부터 77년간 지속되었다."


여기에서 다시 말하지만, '달단인'은 당시 서방선교사들이 장성이북에 있는 기마민족을 통칭하는 말이다. 여진인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몽골인과 다른 유목민족도 포함한다. 아마도 그들과 당시의 명나라사람들이 보기에, 여진과 몽골같은 '달자'는 모두 한통속이다. 그다지 큰 차이가 없다. 그들을 하나로 묶어서 불러도 되는 것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1206년, 몽골초원의 각부는 지금의 외몽골 긍특산 동록의 알난하(斡難河) 원두(源頭)에서 개회를 개최하여 공동으로 테무진을 '징기스칸'으로 옹립하고, '대몽골국'을 건립한다. 이것은 이후 유라시아대륙을 석권하는 몽골제국이 정식으로 성립된 것을 표시한다.


아마도 발음이 가까워서인지 당시의 유럽인들은 자주 징기스칸 테무진과 14세기후반의 테무르대제 즉, 중앙아시아 테무르제국의 개국황제와 혼동하곤 했다. 설사 학식이 많은 마테오 리치도 이 두 사람을 혼동한다. 그는 일찌기 이렇게 쓴 바 있다: "1206년에 이르러 이방인이 처음으로 전국을 정복한 기록을 가지게 된다. 그때 한 타타르 우두머리는 전체 민족의 정복자였는데 ,전체국가를 향하여 승리의 진군을 한다. 우리의 일부 역사학자는 그가 테무르 혹은 그의 계승자라고 하는데, 나는 그렇게 믿을 이유가 있다고 본다."


기실, '달단'과 '중국'의 전쟁 혹은 몽골이 중원을 정복한 것은 분명히 1206년보다 훨씬 뒤의 일이다. 징기스칸은 1211년에 비로소 중국북방으로 대거 침공한다. 그들의 공격대상은 누르하치의 선조가 건립한 금나라이다. 징기스칸은 이렇게 선언한다. 몽골과 여진은 피의 원한을 지닌 원수이다. 자신의 조상인 아바하이는 금나라에 잔인하게 살해당했다. 그러나 역사는 항상 놀랍게도 유사하다. 여러해 이후, 여진인의 자손인 누르하치가 거병하여 몽골을 무너뜨린 명제국에 반란을 일으킬 때도 거의 마찬가지의 이유를 댄다.


1234년에 이르러, 초원의 철기가 광풍에 낙엽이 떨어지는 것처럼 신속히 밀고 내려와서 여진인이 건립한 금나라를 무너뜨린다. 몽골은 중국남방의 송나라에 정식 선전포고하는 것이 1년이후이다. 이전까지는 쌍방이 최소한 명목상으로 반금의 동맹국이었다. 놀라운 점은 겉으로 보기에는 문약한 송나라사람들이 처음에 전혀 약세를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1259년에는 몽케칸이 대거 남정하는데 조어성(지금의 중경)에서 운명한다. 이 일은 도대체 양과 대협이 한 것인지 아닌지는 영원한 수수께끼이다. 예를 들어 소문에 따르면, 이 몽골칸은 기실 깨끗하지 못한 것을 먹어서 어리버리하게 죽었다고도 한다.


팔뚝은 다리를 당해내지 못한다. "결국 1278년 달단인은 이 강성한 국가를 전부 정복하고 송왕조를 멸망시킨다. 그리고 원이라는 신왕조를 건립한다. 원왕조 달단은 9대황제까지 전해지면서 평화적이고 안정적으로 중국을 70년간 통치한다. 개략 이 전쟁이 끝났을 때, 베니스인 마르코 폴로가 달단인을 따라 중국으로 왔다. 이것은 그의 저술에서 볼 수 있다."


만일 도성 임안이 점령되고, 황제와 태후가 포로로 잡힌 것을 남송멸망의 표지로 삼는다면, 그것은 1276년에 발생한다. 다만 남송의 마지막 함대가 저명한 애산해전에서 전멸한 것을 멸망의 표지로 삼는다면 그것은 1279년이다. 어느 것이던 모두 선교사가 말한 것과는 맞지 않는다. 확실히 후자일 가능성이 더 클 것같기는 하다. 이들 선교사들은 아마도 필자처럼 아마추어 역사가일테니 1년 정도의 오차는 충분히 봐줄 만하다.


근대정치사회학의 창시자이자 프랑스 사상가인 토크빌은 그의 면저인 <미국의 민주를 논한다>에서 이렇게 썼다.


"피정복자는 선진민족이고, 정복자는 반개화상태인 상황하에서, 북방민족이 로마제국을 침입한 경우나 몽골인이 중화제국을 점령한 것같은 경우, 야만인은 군사정복을 통하여 얻은 권력으로 피정복된 문명민족과 동등한 수준까지 끌어올리고 공등으로 발전하는데, 상대방에 동화될 때까지 진행된다."


"한측은 실력을 가지고, 다른 한측은 지혜를 가진 경우; 전자는 피정복자의 지식과 기술이 필요하고, 후자는 정복자의 권력을 선망한다. 그리하여 야만인은 문명인을 그들의 궁정에 들어오게 하고, 문명인은 야만인에게 자신의 학교를 개방한다."


토크빌은 나폴레옹의 전성기인 1805년에 태어났고, 전체세계가 혼란스럽기 그지없던 1859년에 사망한다. 그의 또 다른 명저는 더욱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그것은 바로 고위층이 추천하여 사회에 널리 보급된 <구제도와 대혁명>이다.


마치 200년후의 그 프랑스 지식인의 정확성을 증명하려는 듯이, 중원을 점령한 몽골인의 이후 생활에 대하여 명나라말기의 선교사는 이렇게 썼다: "이 기간내에, 달단인은 옛날의 용맹한 기개와 상무정신을 잃어버렸다. 중국에서 편안한 생활을 누리며, 그들의 의지는 사라져갔다. 장기간 평화롭게 살면서 그들은 날로 온순해지고, 중국인의 본성과 기질에 깊이 감염된다."


그러나, 토크빌과 선교사들은 아마도 너무 절대화했던 것같다. 후자를 예로 들면, 이 말의 앞의 절반은 맞다. 편안한 생활이 초원기마민족의 투지를 소멸시켰다. 그러나 뒤쪽의 경우는 사서를 뒤져보면 우리가 발견할 수 있다. 살천석(薩天錫), 마백용(馬伯庸, 원나라시인 마조상)등 극소수를 제외하고 최소한 원왕조가 존재하던 대다수의 기간내에 대다수의 '달단인'은 중원문화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중국인의 본성과 기질에 깊이 감염된다'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 제국을 최종적으로 멸망시킨 원나라말기의 농민반란의 원인은 상당히 복잡하다. 다만 최소한 상당한 요소는 이런 문화상의 충돌과 민족간의 갈등에 기인한다.


이때 우리의 대명태조성신문무흠명게운준덕성공통천대효고황제 즉 주원장이 마침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주씨 성의 한 천민(그는 우상숭배자의 노비였다)이 거병하여 달단인에 항거한다. 그를 노비로 삼던 국가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그는 권력의 야심을 갖게 되고, 길을 막고 강도질에 나서게 된다."


몽골은 종족격리제도를 실행했다. 한인은 최저의 두 계층이었다. 주원장을 '천민'이라고 한 것은 그다지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상술한 민족주의정서는 의심의 여지없이 주원장등 한인이 반란에 참가한 원인 중 하나이다. 주원장의 종교신안에 관하여 <의천도룡기>를 본 사람이라면 알고 있을 것이다. 교주인 장무기 형의 동생이다. 젊은 주중팔(주원장)은 마니교 즉 명교의 신도였다. 단지 역사상의 그가 정말 명교에 가입했었는지에 대하여 후인들은 여러가지 주장을 내놓는다. 설사 정말 그런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당시 중원의 명교는 일찌감치 백련교들 비밀단체와 서로 융합하고 섞여 있었다. 이미 단순한 종교조직이 아닌 것이다.


확실히 선교사들은 위에서 말한 주장을 믿었던 것같다. 그는 주원장을 '우상숭배자의 노비'이라고 했다. 이것은 당연히 폄하하는 말이다. 다만 동시에 그는 이 이교도의 품행에 대하여 비교적 좋게 평가한다; '그는 천성이 관대하고, 용맹하며, 사상과 행동이 민첩했다. 의지, 게모, 동료와 운이 있었다." 그 외에 주중팔은 강도짓을 한 적은 없는 것같다. 그는 화상으로 있다가 직접 반란군에 들어간다. 후세사료에서는 이 일을 표백하기는 했지만.


선교사들의 기술에서는 우리의 주중팔이 "많은 인마를 끌어모아서, 단기간내에 대군을 형성했다; 이때부터 그는 더 이상 강도가 아니고, 군사지휘관이 되어, 용감하게 달단인을 공격했다." 주원장은 1352년 곽자흥의 홍건군에 가담한다. 보통사병에서 시작하여, 금방 총사령관의 인정을 받아 곽자흥의 양녀를 처로 맞이한다. 신부는 바로 나중에 유명한 대각 마황후이다. 결혼후, 주중팔은 주원장으로 정식 개명한다. 전해지는 바로는 앞의 두 글자는 "주원(誅元)", 원나라를 벤다는 뜻에서 따왔다고 한다. '장'이라는 것은 끝이 뾰족한 옥기로 원나라를 주살할 사람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간단히 말하면, 16년의 힘든 전투를 거치는데 그중 대부분의 기간동안 그의 주요적수는 진우량, 장사성등 다른 반라군의 두목이지 몽골인이 아니었다. 1368년에 이르러, 주원장은 마침내 여러 군웅을 무르고 응천부 지금의 남경에서 황제에 오른다. 국호를 대명이라 한다. 같은 해 명나라의 대군이 북진하여 일거에 대도를 점령한다. 원제국이 멸망한 것이다. 이 사건에 대하여 선교사들은 이렇게 썼다: "여러번의 격전 후, 그는 휘황한 승리를 거둔다. 마침내 1368년 달단인을 중국에서 쫓아낸다. 불후의 공을 세웠고, 전체 중국을 그의 영웅다운 업적의 상으로 받게 된다."


명태조의 '홍무'연호에 대한 내력은 여러가지 설이 있다. 이 연호는 통상적인 경우처럼 대신들이 경전을 뒤져서 찾아낸 것이 아니다. 주원장이 직접 정한 것이다. 그래서 황제가 무슨 이유에서 그렇게 지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여기에서는 선교사들이 한 가지 견해를 내놓았다는 것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는 대명왕조를 창건했고, 왕조의 초대황제로서 그는 스스로를 '홍무(洪武)'라 한다. 뜻은 '유명한 무사'라는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중국민간의 보편적인 생각이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마테오 리치는 이렇게 기록한 바 있다: "지혜와 궤계로 성공적으로 다른 군벌을 굴복시킨 영웅은 주씨가족의 후손이다. 나중에 중국인들은 그를 '홍무'라고 불렀는데, 그 뜻은 '탁월한 총사령관'이라는 의미이다. 더욱 정확하게 번역하자면, '홍수(洪水)같은 무공(武功)'이다.


소위 "나와 같은 족속이 아니면, 그 마음이 반드시 다르다(非我族類, 其心必異)" 선교사들이 보기에, 주원장이 성공을 거둔 것은 많은 정도에서 그가 선명하게 민족주의 기치를 내걸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혁혁한 공적을 거둔 후, 각 성은 속속 그에게 귀순한다. 즉 자신의 나라사람에게 귀순한 것이다. 그는 백성의 해방자가 된다. 중국인은 자기사람을 추대하고 존경하고, 이족을 미워하는데, 이것은 그들의 천성이다."


선교사들이 몰랐던 것은 비록 민족주의로 이익을 보긴 했지만, 천하를 얻은 후에는 명태조가 이민족을 무원칙적으로 미워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반대로 재능있는 달달인이 신왕조에서 일하는 것을 장려하고 흡수했다. "몽골, 색목인중 재능이 있는 자는 채용하여 쓸 수 있다." 설사 원나라의 그 황제에 대하여도 그는 말살하지 않았다. 오히려 "원나라 조상은 공덕이 있으나, 그 자손이 백성을 긍휼이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하늘이 버린 것이다." 확실히 명태조는 극단적인 민족주의자가 아니다.


중화제국을 오백년기본제도를 창건한 이 황제에 대하여 서방선교사들은 아낌없이 찬사를 보냈다. 마테오 리치는 자연히 주원장의 제도건설의 성과를 주목한다: "오늘날 중국인을 다스리는 법률은 모두 홍무이후의 것이다. 모든 이런 법률은 그가 친히 제정하거나 혹은 그의 앞사람에게서 받아들인 것이다. 그의 계획은 확실히 전면적인 법정을 제정하는 것이고, 놀라울 정도로 국가의 안전을 보증하고, 그와 그의 자손이 오랫동안 이어지게 하였다."


확실히 이들 법전은 중국법제사상 획기적인 홍편거작 <대명률집해부례> 간칭 <대명륭>이다. 이 법전은 중국고대법률의 집대성이다. 홍무연간에 3차에 걸친 대규모 수정후에 최종적으로 완성한다. 그리고 명나라때 더 이상 수정하지 않았고, 변통이 필요하면, 조정이 조령을 반포하거나 조례를 제정했다. 보율(輔律)의 형식으로 수정안을 내놓는다. 이것은 주원장이 자손후대가 '변란성법(變亂成法)'하는 것을 극히 싫어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명문규정으로 수정하는 자는 엄벌에 처하겠다고 정했다: "자손은 이를 지켜라. 신하들이 약간이라고 고치자고 논의하면, 변란조제(變亂祖制)의 죄로 다스려라"


<대명률>은 중국에서 오백년간 영향을 미친다. 이 법전은 조문이 많고 광범위하게 다룰 뿌아니라, 이전 각 왕조의 법률과 비교할 때 특징이 있다. 즉 양형에서 양극단을 달린다는 것이다. 죄가 경하면 처벌은 더욱 경하고, 죄가 중하면, 예를 들어 '모반'죄 처벌이 더욱 중한 것이다. 특히, 특별히 '간당(奸黨)'조를 둔다. 이렇게 하여 역대법전의 선례를 남긴다. <대명률>은 명문으로 '간당', '교결근시관원(交結近侍官員)', '상언대신덕정(上言大臣德政)'을 금지한다. "  이것은 명나라황제가 붕당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주원장은 제국의 수도를 자신의 고향인 응천부로 정한다. 즉 장강변의 남경이다. 위광국은 이렇게 말한다: "그는 금방 조정을 정비하고, 대명국을 창립한다. 더 이상 해방된 인민이 반란을 일으키는 것ㅇ르 걱정하지 않는다. 그는 수도를 큰 강의 변에 있는 남경으로 정한다. 중국인은 이 큰 강이 바다로 들어간다고 하여, 양자(洋子)라고 부른다."


기실, 양자강의 양자(揚子)는 바다의 양(洋)이 아니다. 이 명칭은 수나라대 양주남안에 설치한 양자진(揚子津)의 도구(渡口)에서 비롯된다. 처음에는 양주, 진강부근의 장강구역을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나중에는 장강하류를 지칭하는 것으로 확대된다. 고증에 따르면, 명말청초에, 바다를 건너온 유럽인들은 장강을 거슬러 올라갈 때, 분명히 양자강의 이 구간을 지났을 것이다. 그래서 서방에서는 "Yangtze"라는 이름으로 장강 전체를 부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