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문화/중국의 종교

몽골과 티벳불교의 만남: "3차회맹(三次會盟)"

by 중은우시 2019. 2. 8.

글: 진호무(陳浩武)


오늘 저녁 자리해 주신 학자분들과 여러분들. 저는 경제학을 전공했고, 역사를 전공하지 않았습니다. 역사는 그저 취미로 배우고 있습니다. 그래도 독서의 경험을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오전에 우리는 둬룬(多倫)을 갔었는데, 너무 놀랐습니다. 이곳이 이렇게 중요한 곳일 줄이야. 문물국의 왕국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초원시대에 4개의 도시가 있었다고. 전장(前藏)에는 라싸가, 후장(後藏)에는 르카쩌(日喀則)가, 그리고 내몽고에는 둬룬이, 외몽골에는 울란바토르가. 이 4개의 도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뤄룬이 얼마나 중요한 곳인지 알 수 있겠지요.


저는 오늘 둬룬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몽골민족이 불교문화를 받아들인 역사를 생각했습니다. 이 역사는 아주 재미있는데, 저는 그것을 "3개의 회맹"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징기스칸이 초원에서 점점 세력을 키우고 있을 때, 당시 아시아판도에는 5개의 국가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금(金)이고 하나는 요(遼)이며, 하나는 서하(西夏)이고, 하나는 토번(吐蕃)이며, 나머지 하나는 남송(南宋)이었습니다. 징기스칸은 굴기하는 과정에서, 이 5개의 국가를 하나하나 멸망시켰습니다. 가장 먼저 멸망시킨 것은 금과 요입니다. 이는 그와 가장 가깝게 있어서입니다. 다음으로 서하를 멸망시킵니다. 당시 군대를 이끌고 서하를 공격한 사람이 누구였을까요? 바로 고단(闊端)입니다. 징기스칸의 셋째아들인 우구데이(오고타이)의 차남입니다. 서하를 무너뜨린 공로로 고단은 서하왕(西夏王)에 봉해집니다.


고단이 서하를 손에 넣은 후 다음 전쟁목표는 토번입니다. 다만 토번은 공격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해발이 너무 높고, 산소가 부족합니다. 몽골기병은 고원에서 전쟁을 벌이기에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전선에 있던 장군이 고단에게 한 가지 건의를 합니다: 이곳에서 그들과 싸우느니, 그들과 협상을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고단은 전방의 장군으로 하여금 약간의 조사를 해보게 한다. 토번측에서 대표로 와서 협상할 적당한 사람이 있는지를 찾아보라는 것이다.


그럼 당시 토번의 상황을 한번 설명해보겠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토번의 원래 지방종교는 본교(苯敎, Bon)입니다. 이는 몽골에서 믿던 샤머니즘과 유사한 무속문화의 범주에 속합니다. 송짼감뽀(松贊干布)가 즉위한 후, 대당과 네팔에서 불교를 도입하고, 그는 불교를 국가의 주류신앙으로 삼아 본교를 억압합니다. 본교를 억압함으로써 지방제후를 억누릅니다. 다만, 송짼감뽀가 죽은 후 본교를 믿는 부락우두머리들은 불교를 버리고 다시 본교로 돌아갑니다. 이 티벳에 불교가 전래된 역사시기를 "전홍기(前弘期)"라고 부릅니다. 11세기경, 불교는 다시 안다(安多, 청해)지방에서 티벳으로 전래됩니다. 이 시기를 "후홍기(後弘期)"라고 부릅니다. 후홍기에 전래된 불교는 본교와 결합하여, 소위 "티벳불교"가 형성됩니다.


본교는 티벳의 원시종교이고, 본교는 샤머니즘과 가깝습니다. 몽골인들은 샤먼교 믿고 있고, 티벳인들은 본교를 믿고 있는데, 이는 모두 무속신앙의 범주에 속합니다. 티벳불교의 형성에 있어서 크고 작은 부락 우두머리들이 소제후처럼 매 부락은 각각 자신의 교파를 가지게 됩니다. 무슨 까귀파(嘎擧)니, 사캬파(薩迦)니, 닝마파(寧瑪)니. 누구도 압도적인 지위를 차지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상황하에서, 하나의 교파가 커지려고 한다면, 전제조건은 반드시 외부의 역량이 그를 지지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상대방을 압도하는 세력을 만드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다시 고단을 얘기하겠습니다. 그의 대장이 전방에서 조사한 결과를 가져왔는데, 토번의 교파는 각양각색이라는 것입니다. 고단은 이렇게 지시합니다. 네가 가장 법력이 뛰어나고 가장 지혜로운 법사를 찾아와라. 불교수양이 가장 높은 고승을 모셔와라. 그 결과 그는 사캬파의 우두머리를 모셔옵니다. 그가 사캬판디타(薩迦班智達, Sakya Pandita)입니다. 그를 토번의 대표로 확정하고 몽골과 협상을 벌입니다. 당시 토번의 크고 작은종교지도자들은 모두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그들은 몽골인들을 무서워하였기 때문에 아무도 나서려 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나섰다가는 리스크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머리를 잘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캬판디타는 당시 63세였습니다. 그 당시에 63세라면 이미 고령입니다. 다만 사캬 판디타는 확실히 장기적인 안목을 지닌 종교지도자였습니다. 그는 '내가 가겠다'고 말합니다.


티벳에서 당시 고단이 병력을 주둔해 놓고 있던 양주(凉州)까지 갑니다. 지금의 감숙성 무위입니다. 얼마나 오래 걸렸을까요? 2년을 갔습니다. 출발했을 때 63세이니, 도착했을 때는 65세입니다. 그러나 그는 결심을 귿히고 말을 타고, 티벳의 다른 교파들의 의견을 청취한 후, 양주로 갔습니다. 2년이 걸려 지금의 무위에 도착합니다. 당시의 양주는 고단의 행궁(行宮)이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보충설명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사캬 판디타는 이때 어린 조카를 하나 데려갑니다. 그의 동생의 아들입니다. 아이는 몇살이었을까요? 10살입니다. 그가 바로 파스파(八思巴)입니다. 파스파에 대하여는 뒤에서 다시 얘기하겠습니다.


고단과 사캬판디타가 만난 것은 1247년입니다. 1247년은 양주에 있어서 전환점이 되는 시기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회담결과는 토번을 초안(招安)하는 것이고, 평화적으로 토번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몽골인들은 도살을 포기하고, 평화회담의 방식으로 몽골과 토번의 관계를 해결합니다. 토번이 몽골에 귀순합니다. "양주회맹"이 끝났지만, 사캬판디타는 그의 사캬사(薩迦寺)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는 알아봤던 것입니다. 자신이 이곳에 남아서, 자신의 신앙과 티벳불교를 몽골인들에게 전수해주면, 특히 몽골의 왕실에 전수해주면, 그것은 큰 성과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종교지도자에 있어서, 그가 생각하는 것은 보통사람들과 다릅니다. 그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너희가 우리의 땅을 점령하였지만, 나는 정신적으로 너희의 정신세계를 절명하겠다. 그는 기실 이런 관계를 생각하였습니다.


사캬판디타는 양주에서 서신을 하나 씁니다. <사캬판디타가 토번인에게 보내는 글>입니다. 이 문서는 사서에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이 서신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몽골의 왕야와 우리는 평화적인 방식으로 토번문제를 해결하려고 준비한다. 우리는 고단 총사령관과 이미 협력조건을 얘기했다. 예를 들어, 우리의 호구가 얼마냐에 따라서 매년 얼마의 세금을 내고, 우리는 그들에게 재물을 제공하고, 그가 우리 땅에 임명하는 관리는 우리 사람이다. 즉 토번인이 토번을 다스린다. 몽골인들은 병력을 파견하지도 않고, 관리도 파견하지 않는다. 완전히 사캬파가 전체 토번의 최고행정장관이 되어 토번을 다스린다.


사캬판디타는 계속 양주에 남아서, 한편으로 그의 어린 조카 파스파를 가르치고, 다른 한편으로 몽골의 고위층인 왕야들과 왕래하며, 그들에게 티벳불교를 전수합니다. 이렇게 하여 많은 몽골의 왕공귀족들이 티벳불교를 받아들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바로 몽골인들이 샤만교를 버리고 티벳불교를 믿기 시작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시작점은 바로 양주회맹입니다. 이것은 몽골인들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는 사건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물을지 모르겠습니다. 몽골인들은 왜 샤만교를 버리고 티벳불교를 믿기 시작했을까요? 사캬판디타는 고단에게 한 가지 도리를 설명합니다. 그것은 바로 불교의 '호생원칙(護生原則)'입니다. 몽골인이 사먄교를 믿을 때, 한 가지 전통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부친이 죽으면 부친이 가졌던 모든 금은보화, 소양, 여인을 전부 죽여버리는 것입니다. 순장을 하는 것인데, 이것이 샤만교의 전통입니다. 샤만교의 전통에서는 특별히 조상을 중시합니다. 왜냐하며 그들에게는 아직 초월적인 존재인 신이라는 개념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조상을 신으로 모시고 제사지내는 것입니다. 이 점으로 인하여, 재산이 많으면 많은 재산을 순장해야 하고, 대량의 소,양을 죽여야 합니다. 심지어 그와 잤던 여자들도 모조리 죽여버립니다. 사캬판디타는 고단에게 무슨 이치를 얘기했을까요? 불교에는 가장 중요한 이념이 있는데, 바로 '호생원칙'이라는 것입니다. 살생하지 않는 것, 죽이지 않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가장 중요한 "오계(五戒)"가 있는데, 바로 살(殺), 도(盜), 음(淫), 망(妄), 주(酒)를 금하는 것입니다. 이는 불교의 가장 중요한 계율입니다. 첫번째가 바로 살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즉 생명을 아끼라는 것입니다.


사캬판디타는 고단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기실 불교의 법사의식을 통하여 마찬가지로 여러분 집안의 재산, 소양, 여인을 지하의 망령에게 보낼 수 있고, 망령은 마찬가지로 누릴 수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몽골인들을 아주 기쁘게 만들었습니다. 원래 부친에게 10만마리의 소,양이 있으면, 내가 모두 죽여야 했고 부친을 위해 순장해야 했는데, 지금은 법사의식을 통해서 보낼 수 있으니, 기껏해야 1만마리의 양만 쓰면 되고, 부친은 마찬가지로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내심으로 부친의 그런 재산을 남겨두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캬판디타가 얘기하는 이런 내용은 몽골귀족들에게 아주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그는 귀족들의 마음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귀족들은 기꺼이 그런 정신적인 정복을 받아들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많은 재산을 상속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순장을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티벳불교는 금방 몽골고위층 왕공귀족들의 마음을 얻게 됩니다. 거기에는 내재적인 경제논리가 있습니다. 저는 경제의 각도에서 이런 문제를 해석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우리가 재산상속의 각도에서 보면 아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양주회맹이후, 전환은 아주 컸습니다. 고단에 있어서, 칼에 피한방을 묻히지 않고, 토번문제를 해결했습니다. 토번인에 있어서는 백성들이 도탐이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몽골인들이 가는 곳마다 피로 도살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항을 하기만 하면 모두 죽여버립니다. 저는 우즈베키스칸에 갔고, 그 전쟁의 현장을 보았습니다. 당시 몽골인들이 호라즘을 멸망시킨 전쟁의 현장에는 지금까지도 유적이 남아 있습니다.


"양주회맹"의 의의는 여기에 있습니다. 피비린내나는 살륙을 피할 수 있었고, 토번이라는 지방을 평화적으로 해결했습니다. 이는 전체 몽골의 정복사에서 극히 보기드문 경우입니다. 고단은 이를 통해 칸의 자리를 노릴 희망을 갖게 됩니다. 그는 칸의 자리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서하를 점령했고, 토번을 점령했습니다. 몽골의 왕야들은 전공을 가지고 따지는데, 그의 전공은 너무나 큽니다. 5개의 적수들 가운데, 그 혼자서 둘을 해결한 것입니다. 고단은 아주 대단합니다. 다만 고단은 40여세의 나이로 죽고 맙니다. 너무 일찍 죽었습니다. 기실 그는 몇번 몽골인들이 쿠릴타이라고 부르는 대회에 참가했었습니다. 쿠릴타이는 지금의 인민대표대회와 같습니다. 추천제입니다. 즉 원로정치입니다. 원로들이 다름 칸을 추천하여 뽑습니다. 그는 몇번 참가한 후, 낙망합니다. 오고타이이후 칸의 지위는 기본적으로 톨루이의 일가가 가져갑니다. 즉 몽케, 쿠빌라이로 이어지는데, 이들은 모두 톨루이의 자손입니다.


앞에서 말한 사캬판디타가 데려온 10살짜리 소년이 바로 파스파입니다. 이때 파스파는 몇 살이나 되었을까요? 19살입니다. 바로 양주회맹이후 2년동안에 고단과 사캬판디타가 차례로 죽어버립니다. 그들은 회담후 2년만에 둘 다 죽었습니다. 새로운 세대가 온 것입니다. 이 세대는 누가 대표할까요? 몽골측은 쿠빌라이입니다. 사카판디타의 측은 파스파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2대의 회맹입니다.


이때 파스파는 이미 사캬파의 우두머리가 됩니다. 사캬판디타는 사캬파의 제4조(第4祖)이고, 파스파는 제5조(第5祖)입니다. 그가 사캬판디타의 지위를 이어받을 때, 나이는 겨우 15.6살이었습니다. 사캬판디타는 임종시에 법의를 그 소년에게 전합니다. 쿠빌라이가 서하왕의 왕위를 승계했을 때 그가 직면한 것은 사캬파의 종교지도자가 바로 파스파라는 것입니다.


쿠빌라이가 처음 파스파를 만났을 때, 두 사람은 싸웁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쨌든 고단과 사캬판디타와 같은 서로간의 감정이 없기 때문입니다. 쿠빌라이는 파스파에게 말합니다. 나는 대리(大理)를 공격할 것이니, 너희 토번은 우리에게 양식 얼마와 사병 얼마를 내놓아서 전쟁에 참전하게 하라. 그러자 19세의 파스파는 일어나서 말합니다. 당신이 이 명령은 집행할 수 없습니다. 우리 토번은 아주 구석진 곳이어서, 사람들도 아주 가난합니다. 돈도 없고 양식도 없습니다. 사람을 찾아서 전쟁을 벌이려고 한다면 더더욱 어렵습니다. 우리 토번인들은 모두 불교도이고, 가사 싸울 수가 없습니다. 처음 왕공회의를 개최했을 때, 두 사람은 이렇게 싸웁니다. 쿠빌라이는 아주 불쾌해 합니다.


쿠빌라이의 정실부인은 차브이 카툰(察必)이라고 하는데, 그녀는 쿠빌라이가 가장 총애한 여인이고, 아주 대단했습니다. 그녀는 현처(賢妻)라 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뒤에서 두 사람이 싸우는 것을 듣고, 쿠빌라이에게 말합니다. 내가 보기에 파스파는 원래 당신 곁에 있던 고승들보다 훨씬 뛰어나다. 파스파는 당시 떠나려고 했다. 난 토번으로 돌아가겠다. 너희와 같이 있지 않겠다. 사캬사로 돌아가겠다. 그는 이미 말을 탄 상태였다. 차브이 카툰은 쿠빌라이에게 말한다. 이 자를 그냥 보내서는 안된다. 그는 아주 뛰어난 인물이다. 그의 말과 행동거지를 볼 때 그는 용모가 장엄하니 장래에 반드시 큰 일을 할 사람이다. 그를 남겨두어야 한다. 쿠빌라이도 이때는 후회하고 있었습니다. 그도 자신이 너무 예의없게 굴었다고 생각해서 그를 쫓아갑니다. 그를 가지 못하게 만류하여 다시 그를 데려올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 두 사람이 처음 접촉했을 때는 우호적인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다만 나중에 여러번 만나면서 쿠빌라이가 파스파에게 질문을 하면, 파스파는 책을 많이 읽었고, 그의 큰아버지가 사캬판디타였으므로 그의 곁에서 배운 것들이 있습니다. 그는 종교지도자로 키워졌습니다. 그래서 파스파는 성숙했고, 숙련되었으며 박학다식했습니다. 쿠빌라이는 당시 한족문화에 대한 이해가 많지 않았는데, 그래서 파스파에게 많은 질문을 했습니다. 대답을 듣고나서 반신반의할 때면 사람을 시켜 책을 찾아보게 했는데, 모두 맞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점점 파스파를 존경하기 시작합니다.


얼마나 존경했을까요? 나중에 파스파를 국사(國師)로 봉합니다. 그 후 쿠빌라이는 본인이 티벳불교에 귀의하면서, 파스파를 그의 상사(上師)로 모십니다. 파스파는 그에게 말합니다. 만일 나를 상사로 청하려면, 우리 티벳불교의 법도에 따르면 내가 상좌에 앉고 당신이 하좌에 앉아야 합니다. 쿠빌라이는 그 말을 듣고 화를 냅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 네가 어찌 나보다 윗자리에 앉을 수 있느냐. 파스파는 말했다. 만일 우리 종교에 귀의하려면 우리 종교의 법도에 따라야 하는데, 그게 바로 상사는 윗자리에 앉고 신도는 아랫자리에 앉는 것이다. 이때도 다시 차브이 카툰이 나서서 중재합니다. 왕공귀족회의같은 경우에는 쿠빌라이가 상좌에 앉고, 파스파가 하좌에 앚고, 종교회의나 사적인 자리에서는 파스파가 상좌에 앉고, 쿠빌라이가 하좌에앉도록 하자고. 이렇게 하여 쿠빌라이도 동의합니다. 나중에 그는 점점 더 파스파를 존경하게 되고, 그에게 아주 높은 지위도 줍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가 파스파에게 몽골문자를 만들도록 한 것입니다. 바로 파스파문자입니다. 그리고 파스파가 이 파스파문자를 쿠빌라이에게 바칠 때, 쿠빌라이는 아주 기뻐하며 전국의 모든 공문, 인장, 화폐에 반드시 파스파문자를 쓰도록 합니다. 파스파문자는 지금은 이미 소실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현재의 몽골문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디에 가면 볼 수 있을까요? 바로 북경에서 상도로 가면 우리는 거용관(居庸關)의 운대(雲臺)를 지나가게 됩니다. 운대는 하나의 공문(拱門)이고, 원나라때 만든 것입니다. 거기에는 6가지 문자가 적혀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파스파문자입니다. 유일합니다. 현재 파스파문자를 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은 바로 거용관의 운대입니다. 이 문의 왼쪽에 3가지, 오른쪽에 3가지 모두 6가지 문자가 적혀 있습니다.


파스파는 아주 높은 수양을 자랑합니다. 그는 뛰어난 종교지도자입니다. 그가 쿠빌라이와의 관계를 처리할 때 아주 잘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무가 몽골귀족과 왕공들 사이에서 티벳불교를 전파한 성과를 공고히 하였고, 그는 국사가 되어 많은 것을 제안합니다. 쿠빌라이가 추진하는데 그의 공로가 아주 큽니다. 파스파는 젊었을 때 꿈을 하나 꿉니다. 그가 나중에 사캬판디타에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무슨 꿈이었을까요?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손에 하나의 지팡이를 쥐고 있는데, 이 지팡이는 등나무로 만든 것이며 모두 80개 마디가 있었습니다. 다만 제46번째 마디에서 돌연 휘어집니다. 지팡이는 이렇게 한번 휘어집니다. 그는 사부에게 물었습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사부가 대답합니다. 그건 네가 46살이 되었을 때 특별히 조심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는 바로 46살때 죽습니다. 그가 사캬로 돌아간 후에 독살당합니다.


만일 우리가 고단과 사캬판디타의 "양주회맹"을 제1차 회맹이라고 부른다면, 파스파와 쿠빌라이의 만남은 제2차 회맹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제2대의 회맹은 제1대의 회맹을 공고히 하였습니다. 특히 파스파가 몽골에 끼친 영향은 아주 컸습니다.


이제는 제3차회맹을 얘기해 보겠습니다.


몽골제국은 그 후에 점점 쇠락합니다. 개략 16세기를 전후하여, 몽골에는 알탄칸(俺答汗)이라는 왕이 나타납니다. 몽골은 당시에 3개의 파로 나뉘는데, 알탄칸은 그중 주요한 하나의 파입니다. 우리가 북경에서 상도로 가려면 지나는 선화(宣化)일대의 초원이 바로 알탄칸의 세력범위입니다. 알탄칸과 명나라와의 관계는 개략 만력제때입니다. 장거정이 조정을 장악하고 있을 때입니다. 왜 알탄칸과 명나라간에는 계속하여 관계가 발생하게 되었을까요? 바로 몽골인들은 한족이 제공하는 일상용품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쇠솥을 그들은 만들 수가 없습니다. 의복, 비단등등의 물건도 그들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들입니다. 명나라는 쇄국의 모델을 써서 금해(禁海) 즉 해상무역을 금지하고, 금변무(禁邊貿) 즉 변방무역도 금지했습니다. 그래서 알탄칸은 큰 압력을 받게 됩니다. 백성들에게 쇠솥이 없으면 밥을 지어먹을 수가 없습니다. 유목민족이더라도 밥은 만들어 먹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의복을 꿰멜 실도 있어야 하는데, 그들은 만들 줄 모릅니다. 그리고 왕공귀족들은 비단도 필요로 합니다. 이런 것들은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그래서 한해는 그들이 덕승문(德勝門)까지 쳐들어 옵니다. 알탄칸이 덕승문까지 쳐들어온 이유는 명왕조를 없애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시장을 열도록 요구하고, 변방무역을 요구하기 위해서입니다. 기실 영국인들이 찾아와서 무역을 하자고 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는 해상에서 오고, 하나는 육지에서 온 것이 다를 뿐입니다. 그들은 모두 변경무역을 요구했습니다. 장거정과 고공이 재상으로 있을 때, 그들은 정식으로 협의를 하게 됩니다. 알탄칸과의 사이에 변경무역을 회복시키고, 장가구밖의 마시(馬市)에서 말을 교환하는 것입니다. 말은 그저 명목이고 기실 대량의 물건들이 거래되었습니다.


알탄칸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습니다. 그는 칸으로서 방계(傍系)의 자손입니다. 그의 혈통은 그다지 고귀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그에게 약점입니다. 칸이 되려면 반드시 황금가족의 구성원이어야 합니다. 징기스칸의 혈통을 '황금가족'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려면 반드시 황금가족의 정출(正出)이어야 합니다. 징기스칸의 4명의 아들 주치, 차카타이, 오고타이, 톨루이. 이들의 자손들만이 '황금가족'입니다. 다만 그는 약간 떨어져 있습니다. 아마도 그의 조상은 징기스칸 정처소생의 아들이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그에게 치명적 약점입니다. 이 약점은 반드시 외부의 역량을 통하여 보완되어야 했습니다. 1578년 그는 소남가쵸(索南嘉措)를 만납니다. 청해(靑海)의 앙화사(仰華寺)에서 두 사람은 한번 만나게 됩니다. 이때 몽고측의 대표는 알탄칸이고, 티벳불교측의 대표는 소남가초입니다. 소남가쵸는 황교(黃敎)의 대표인데, 바로 총카파(宗喀巴)가 창립한 겔룩파(格魯派)입니다. 겔룩파는 바로 오늘날의 황교이고, 당시에는 아주 작은 교파였습니다.


그들 둘은 청해 앙화사에서 만났는데, 소남가쵸는 알탄칸을 보자 첫 마디가 바로 "당신은 쿠빌라이의 전세(轉世)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후 알탄칸은 바로 소남가쵸에게 말합니다. "당신은 바로 파스파의 전세이다." 알탄칸에 있어서 티벳불교는 그에게 혈통상의 약점을 보완해서 정통으로 세워준 것입니다. 쿠빌라이의 전세라면 바로 황금가족의 정통혈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바로 너를 파스파의 전세로 인정해 준다. 이렇게 된 것입니다.


몽골과 티벳불교는 또 다른 공가에서 다시 한번의 회맹을 실현합니다. 이번 회맹은 청해의 앙화사에서 이루어졌고, 그가 자신을 파스파의 전세라고 인정했으니, 이제 하나의 봉호를 주게 됩니다. "달라이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