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원)

오고타이: 몽골전통과 중원문화가 만나면서 후계자에 오르다.

by 중은우시 2018. 11. 23.

글: 소가노대(蕭家老大)


징기스칸에게는 네 명의 아들이 있었다. 장남 주치, 차남 차가타이, 삼남 오고타이, 사남 톨루이. 네 아들 중에서 주치(몽골어로 '손님'이라는 의미임)를 제외하고는 모두 징기스칸의 친아들이다. 네 아들은 모두 각자의 장점을 지니고 있고, 모두 영웅호걸이었다. 그래서 당시에 "사곡률(四曲律)"이라고 불리웠는데, "곡률"은 말이면 준마, 쾌마를 가리키고, 사람이면 호걸, 용사를 가리킨다. 징기스칸은 평생 전쟁을 벌이면서 방대한 가업을 일군다. 몽골족의 "유자수조(幼子守竈)"의 전통대로라면 톨루이가 칸의 자리를 계승해야 한다; 봉건사회의 '적장자계승제'에 따르면 차카타이가 맡아야 한다. 그런데, 최종적으로 징기스칸은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오코타이를 선택한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오고타이가 칸이 된 것은 몽골의 구전통과 중원 한문화가 서로 만난 결과라 할 수 있다.


오고타이(1186-1241), 몽골제국의 두번째 천자, <원사>에서는 오고타이를 "양시도력(量時度力), 거무과사(擧無過事)"(시기를 잘 따지고, 힘을 잘 계산하여, 일을 하는데 잘못한 적이 없다)라고 하였다. 사람됨이 공정하고, 겸손하며, 신중하고, 판단력이 좋았다. 4명의 형제중에서 비교적 수준높은 정무처리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몽골제국이 어느 정도 규모를 이룬 상황하에서 징기스칸이 오고타이를 후계자로 뽑은 것은 징기스칸의 장기적 안목과 탁월한 식견을 보여준다. 사실은 증명한다. 징기스칸은 사람을 잘못 뽑지 않았다. 오고타이가 집권하는 기간동안, 법령을 제정하고, 역참을 완비하며, 금나라를 멸망시키고, 동유럽을 정복했고, 중원을 경략했다. 일시에 유라시아대륙을 뒤흔들어 버린 것이다. 오늘날까지도 미국의 고등학교에서는 "만일 오코타이가 죽지 않았다면, 유럽에 어떤 변화가 발생했을까? 경제, 정치, 사회의 세 방면에서 분석하라"는 역사문제를 사용하고 있다. 이를 보면 오고타이가 세계에 얼마니 심원한 영향을 끼쳤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위대한 업적의 뒤에는 오고타이의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복잡한 성격이 있다. 오고타이는 천성이 시원시원하고 통이 크며, 사람됨이 인후하고 베풀기 좋아하여, 널리 은혜를 베풀었다. 각국에서 진공하는 물건을 그는 왕왕 관련부서에 등록하지도 않고 모조리 나눠주기도 했다. 보고하러 오는 부하들은 거의 모두 그로부터 하사품을 받았다. 그에게 무엇을 부탁하러 오는 백성들도 그의 입에서 '안된다'는 말은 거의 듣지 못한다. 그에게 먹을 것을 부탁하러 오는 사람도 그냥 돌려보내는 법이 없었다. 매번 사람들이 군주를 위하여 재물을 모아야한다는 말을 들으면 이렇게 말하곤 했다: "너희는 너무 총명하지 못하다. 재물은 우리를 죽지 않게 해주지도 못하고, 죽은 후에 다시 살려내지도 못한다. 그런데 재물을 모아서 어디에 쓸 것인가? 차라리 베풀어주고 인심을 얻는게 낫다." 오코타이가 보기에 금은재화는 '뜬구름(浮雲)'과 같다.


한번은 상인이 오코타이에게 3개의 수박을 바친다. 곁에 따르던 호위가 은자를 가지고 있지 않아서, 오코타이는 황후의 귀에 걸고 있던 두 개의 진주를 떼어내어 상인에게 하사한다. 황후는 못마땅해서 이렇게 말한다: "이 자는 물건을 볼 줄 모른다. 진주를 가져간 후에 싸게 팔아버릴 것이다. 차라리 내일 궁으로 와서 돈을 받아가라고 하자." 그러나 오고타이는 이렇게 말한다: "그는 가난한 사람이다. 생활이 힘들다. 내일까지 기다릴 수 없다." 그리고는 결국 진주를 주어서 보낸다. 또 한번은 오코타이가 궁을 나가서 길거리를 산책할 때, 대추를 팦고 있는 평민을 만난다. 그래서 수하에게 일 파리실(巴里失)로 대추를 사도록 시킨다. 수하는 대추를 많이 가지고 온다. 오코타이는 다 보고나서 묻는다: "이 대추는 왜 이렇게 싼 것이냐?" 수하가 바로 대답한다: "대추는 쌉니다. 일 파리실에 이 정도 사면 공평한 것입니다." 오고타이는 즉시 반박하여 말한다: "이 사람이 평생 우리같은 손님을 몇 번이나 보겠느냐. 그런데 그와 공평하게 거래하겠다고 한단 말인가. 돈을 모두 그에게 주고 와라." 그의 이 한 마디로 대추를 팔던 자는 일거에 횡재를 하게 되었다.


오고타이는 신용을 아주 중시했다. 그는 자신이 한 말이나 분부한 일은 왕왕 수하가 제대로 처리했는지 확인하곤 했다. 어떤 때는 약간 자잘하게 굴기도 했다. 한 평민이 그에게 보통의 모자를 보내온다. 오고타이는 사람을 시켜 200 파리실(약 400냥은자)을 주도록 한다. 수하는 그가 술에 취해서 한 말이라고 여겨서, 지급을 거절한다. 다음 날, 오고타이는 다시 그 사람을 보고, 그가 돈을 받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그에게 300 파리실을 주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수하는 여전히 지급하지 않았다. 셋째 날, 오코타이는 다시 하사금을 400 파리실로 올린다. 수하는 여전히 지급하지 않았다. 하사금이 600 파리실로 올랐을 때, 그는 비로소 돈을 받을 수 있었다. 오고타이는 수하를 크게 욕하며 질책한다: "너는 내가 말을 지키지 않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실로 나의 진짜 적이다. 만일 한 두명을 처벌하지 않는다면, 너희들이 잘못을 고치지 않을 것이다."


통이 크고, 말한 것은 반드시 지키는 외에, 오고타이는 "관홍지량(寬弘之量), 충서지심(忠恕之心)"이 있었다(<원사>). 그에게 인자한 일면이 있었다. 한번은 3명의 죄수들에게 그는 처형하라는 명을 내린다. 그가 대전을 떠날 때 부녀 한 명이 대성통곡을 하고 있는 것을 본다. 오고타이는 걸어가서 왜 우는지 물어본다. 그 부녀는 이렇게 대답한다: "폐하께서 처형하라고 말한 이 세 사람중 한 명은 내 남편이고, 한 명은 내 아들이며, 다른 한명은 내 오라비입니다." 오고타이는 그 부녀에게 말한다; "그러면, 그 중 한 사람을 네가 골라라. 그러면 그는 죽이지 않겠다." 그 부녀는 말한다: "남편은 죽어도 내가 다시 구할 수 있고, 아들이 죽으면 새로 낳으면 되지만, 오라비는 오직 한 명입니다. 그를 사면해 주십시오!" 오고타이는 그녀의 말을 듣고 아주 감동하여, 3명을 모두 사면해서 석방해준다.


오고타이의 성격중에는 잔인, 포악, 비인간적인 일면도 있다. 오고타이는 일생동안 무수히 많은 사람을 죽인다. 특히 징기스탄을 따라 서정(西征)을 하는 기간동안, 걸핏하면 도성(屠城)을 했다. 그의 손에 죽은 사람이 개략 2천만명은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오고타이가 군대를 이끌고 호라즘(花剌子模)을 공격하여 함락시킨 후, 선창(先搶), 후살(後殺), 재소(再燒). 즉 먼저 빼앗고, 다음에 죽이고, 그 다음에 불지르게 한다. 도시 전체의 사람들이 그에게 모조리 죽임을 당한다. 그 후 오코타이는 아모하(阿姆河)의 강물을 끌어들여 도시를 물에 잠기게 한다. 이렇게 호라즘을 완전히 평지로 만들어 버린다. 현지 주민들을 모조리 도살했고, 수세기동안 만들어놓은 관개시설도 모조리 파괴시켜 버리며, 농업전문가와 기술도 모조리 사라진다. 취약한 생태는 파괴되었고, 호라즘과 하중지구(河中地區)는 다시 원기를 회복하지 못한다. 당히 중앙아시아에서 유명했던 호라즘은 오고타이의 손에 완전히 사라져 버리게 된다.


적을 대할 때도 그러헸고, 수족형제를 대할 때도 그러했다. 넷째 동생 톨루이는 오고타이가 온갖 머리를 짜내서 죽여버린다. 톨루이는 옹골군대의 80%의 지휘권을 가지고 있었다. 군사력은 견실하고 웅후했다. 나중에 톨루이는 징기스칸의 유지를 받들어, 오고타이를 칸에 올리지만, 오고타이는 톨루이를 칸의 자리를 위협하는 가장 큰 은환으로 생각한다. 금나라를 정벌하는 전쟁에서, 톨루이는 탁월한 군사재능을 발휘한다. 이는 오고타이의 시기를 더욱 부채질한다. 회군하는 도중에 오고타이는 병이 들어 위중한 것으로 가장하여, 무당을 시켜 질병을 하나의 나무잔에 씻어서 담도록 한다. 그리고 독약을 암중으로 넣는다. 톨루이는 속임수인 줄 모르고, 잔을 들어 성의를 다하여 형의 장수를 빌며 다 마셔버린다. 얼마 후 톨루이는 급사했다. 미신을 빌어 수작을 써서 오고타이는 톨루이를 제거한 것이다.


집정 말기, 오고타이는 주색에 빠져 향락을 즐기며 황음에 빠지기 시작한다. 오고타이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 세상의 절반은 향락을 위한 것이고, 절반은 영명(英名)을 위한 것이다. 느슨해져도 될 때는 속박을 풀고, 속박해야 할 때는 꽉 조여야 한다." 특히 금나라를 멸망시킨 후, 오고타이는 더 이상 힘든 친정(親征)을 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의 군대가 동으로 고려를 침략하고, 남으로 송나라를 치며, 서쪽으로 간라사(幹羅思), 파란(波蘭), 헝가리(匈牙利)등지를 유린할 때, 그 공포가 유럽서방에 퍼질 때, 오고타이는 오로지 즐기고 놀며, 사냥과 음주에 빠져 있었다."(다상몽골사>)


오고타이는 어려서부터 "오락과 음주를 좋아했다"(<사집>). 말년에는 특히 심했다. 매번 술을 마시면 밤새도록 그치질 않았다. 술을 목숨처럼 좋아했다. 그리하여 오고타이의 건강에 큰 해를 끼친다. 둘째형인 차가타이는 일찌기 사자를 오고타이의 신변에 보내어, 그가 술을 마시는 잔 수를 제한하도록 한 바 있다. 그러자 오고타이는 잔을 큰 잔으로 바꾸어 마셨다. 이런 식으로 형제의 호의를 무시한다. 그리고 매일 술에 취해 있었다. 야율초재(耶律楚材)가 여러번 권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러자 쇠로 만든 술통을 가져와서 오고타이에게 말한다: "쇠로 만든 술통이 침식되어 갈라져 틈이 벌어졌습니다. 사람의 오장은 쇠만큼 단단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찌 해를 입지 않겠습니까?" 오고타이는 그 말을 듣고 즉시 깨닫는다. 그러나 성격은 고치기 힘들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옛 모습으로 다시 돌아간다. 누구도 그를 말릴 수 없었다. 그는 여전히 사냥하고 술마시고 즐기며 조정을 태만히 한다.


술과 여자, 이는 쌍둥이이고, 분리되지 않는다. 오고타이는 큰 잔으로 술을 들이키는 동시에, 사방에서 민간여자를 뽑아와서 자신의 노리개로 산는다. 오고타이가 일생동안 세운 황후만 6명이다. 나머지 비빈의 수량은 말할 것도 없다. 그렇지만, 오고타이는 여전히 만족하지 못했다. 남송 가희원년(1237년) 육월, 오고타이는 후궁을 더 뽑으려고 하다. 그러자 야율초재가 상소를 올려 말한다: "며칠 전에 금방 28명의 미녀를 뽑았는데, 충분한 정도입니다. 다시 미녀를 선발한다면 백성들을 괴롭히는 것이 될 것입니다." 야율초재의 상소를 보고 오고타이는 한참을 생각한다. 그리고 '그만두라'고 말한다.(<속자치통감>). 그러나, 오고타이가 미녀를 뽑는다는 소식은 밖으로 전해졌고, 몽골 간역랄(幹亦剌)부락의 사람들이 진위를 알지 못하고, 여동생, 딸이 끌려갈까봐 걱정하여, 급히 아직 시집가지 않은 여자들을 부족 사람들에게 시집보낸다. 어떤 경우는 채례도 없이, 연회도 없이, 직접 남자의 집으로 보내버린다. 이렇게 수천명의 여자들이 급히 결혼하는 '경혼(驚婚)'장면이 연출된 것이다.


신하와 백성들의 '경혼'은 의심의 여지없이 오고타이의 황음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인 셈이다. 그 소식을 들은 후 오코타이는 화가 머리끝까지 난다. 그리하여 흉악한 일면을 드러낸다. 오고타이가 보기에, 그 자신이 이미 후궁을 늘이지 않겠다고 말했고, 그것만으로도 인자함을 보인 것인데, 좌익(左翼)의 여러 부족에서 '경혼'의 현상이 나타난 것은 공개적으로 그에게 불충하고 패역하는 것이다. 이는 분명히 그에게 대항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고타이는 용납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오고타이는 명을 내린다. 모든 출가하거나 아직 출가하지 않은 7살이상의 여자들은 모조리 불러들인다. 그리고 모두 부하장병들에게 하사한다. 이에 대하여, <속자치통감>은 이렇게 적고 있다: "육월.....좌익제부에 말이 잘못 전해져 민간여자를 끌고간다고 했다. 황제는 대노하여, 끌고와 휘하에 나눠준다." <신원자>에도 "육월, 황숙(皇叔) 간적근(幹赤斤)의 부족에 말이 잘못 전해져 황제가 민간여자를 끌고간다고 했다. 황제는 대노하여, 끌고와 장병들에게 나눠준다. 7살이상 시집가지 않은 여자 4천여명이었다."


만일 단순히 부하장병들에게 상을 내리는 것이라면 그만이다. 그러나, 이 결정을 내리는 동시에, 오고타이는 장병들에게 집단적으로 그 4천명의 소녀들을 강간하도록 명한다. 이를 통해 백성들에게 보복한 것이다. 그래서, 급히 출가한 여자들은 오히려 재앙을 당하게 된다. 권위있는 사료인 <세계정복자사>에서는 오코타이가 4천명의 소녀를 강간하도록 명한 것에 대하여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오고타이는 "당해 부락의 모든 7살 이상의 여자를 모으게 한다. 이미 시집간 여자는 시집에서 다시 데려오게 한다. 사병들은 마음 껏 그녀들을 유린한다. 그중 2명의 여자는 밟혀서 죽었다. 남은 사람들은 모조리 노예로 만들어, 기원(妓院)으로 보내거나, 사람들에게 하사하여, 그 자리에서 끌고가도록 했다. 그리고 이들 여자의 부친과 남편으로 하여금 곁에서 보도록 시킨다. 그리고 울지 못하게 했고, 여하한 불만도 표시하지 못하도록 명한다." 4천명의 약한 여자들이 수만명의 호랑이같은 장병들에게 강간당하니, 참혹하고 하늘과 땅이 분노할 야만적이고 포악하며 비겁한 죄악이다. 눈뜨고 보지 못할 광경이었다.


제왕은 보편적으로 복잡한 인물이다. 오고타이는 그 중의 전형이다. 좋을 때는 영명하고 위대하며, 명주(明主)이다. 나쁠 때는 경죽난서(罄竹難書)로 그는 폭군이다. 관홍, 충서한 사람이 일단 화를 내면, 그 결과는 상상하기 힘든 정도가 된다. 일시의 분노로 오고타이는 '경혼'사건에서 비인간적인 짐승같은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는 평소의 관후하고 인자한 이미지와 전혀 다른 모습이 된다. 그리하여 원성도 얻고 악명도 얻는다. <원사>에는 오고타이에 대하여 찬미하는 말을 많이 적어놓았지만, 그의 악행도 덮을 수는 없ㅇ다. 이 점은 오고타이가 4천명의 소녀를 유린하게 한 사건에서 엿볼 수가 있다. 그 후, 오고타이는 아예 사냥, 음락과 음주를 친구로 삼는다. 그리하여 몸은 날이갈수록 나빠진다.


남송 순우원년(1241년) 이월, 오고타이는 사냥에서 돌아와서, 술을 몇잔 더 마신다. 그래서 병세가 더욱 악화된다. 태의가 진맥을 해보니 "맥이 이미 끊겼다(脈已絶)"고 한다. 며칠이 지난 후, 오고타이는 "약간 회복했다(少蘇)", 그러나 "이미 말을 할 수 없었다(已不陵言)" 야율초재는 그에게 신체를 보중하고, 사냥을 하지 말라고 건의했고, 오고타이는 고개를 끄덕여 응락한다. 몇십일동안 편안히 지내니 오고타이의 병세가 크게 호전된다. 십일월에 이르러, 오고타이는 다시 '사냥을 나선다' 한번 나가서 4,5일간 사냥한다. 오특고호란산(烏特古呼蘭山)에서 숙영할 때, 오고타이는 기분이 좋아져서, 말리는 것도 듣지 않고, 가희(歌姬)를 가까이 하고, 술을 밤새도록 마신다.(<속자치통감>). 다음 날, 사람들은 오고타이가 이미 죽어있는 것을 발견한다. 향년56세이다. 재위기간은 13년이고, 묘호는 태종(太宗)이다. 일대제왕이 주색으로 인하여 죽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