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문재봉(文裁縫)
1909년, 제정러시아의 대령이자 러시아왕립지리학회 회원인 코츠로프는 완전무장하 '탐험대'를 이끌고, 야생동물을 고찰한다는 명목을 내걸고 중국 내몽골의 흑성(黑城)으로 간다. 목적은 바로 오래전부터 전해져 내려온 전설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다. 전설상의 보물이 제정러시아강도의 미친듯한 발굴로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이는 중국고고학역사에 거대한 상처로 남는다. 무수한 보물들이 해외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 진귀한 보물들은 40마리의 낙타로 성페테르스부르크로 옮겨갔고, 러지아에서 공개적으로 전시하여 전세계를 깜짝 놀라게 만든다. 이 발견은 은허 갑골문, 돈황 막고굴이후 중국의 제3대 고고문헌발견으로 불린다.
내몽골의 민간에는 하나의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다: 수백년전, 서하국의 군사중진 흑수성(黑水城)에 한 '하라장군'이 주둔했는데, 그의 이름은 하르바투르(몽골말로 검은 영웅이란 뜻임)였다. 하르바투르는 용맹하고 전투를 잘하여, 황제의 환심을 샀으며, 황제는 자신의 막내딸을 흑장군의 하둔(哈敦, 부인이라는 뜻)으로 삼게 했다.
나중에, 흑장군의 세력이 커지고, 권세가 강해지자 황권을 노리게 된다. 그런데, 이 음모를 공주가 알아차린다. 그녀는 흑장군이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소식을 부황에게 전한다. 황제는 분노하여 수만대군을 보내어 흑성을 공격한다. 그리고 하르바투르에게 현상금을 건다. 그러나 대군이 흑성을 공격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했다. 흑장군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흑성을 포위한다. 흑성을 함락시키기 위하여, 서하황제는 무사(巫師)를 불러와서 점을 친다. 무사는 이렇게 말한다: "흑성은 지대가 높고 강이 낮다. 성을 포위하는 관군이 성밖에 우물을 파도 물이 없는데, 성안의 군민들은 물부족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니 ,분명히 암도로 물이 통한다. 만일 이 수로를 막으면,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그리하여, 서하의 병사들은 머리에 모래흙을 맞으면서, 흑하의 상류에 거대한 제방을 만들어 성으로 가는 수원을 차단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성안의 물이 바닥나고, 사병들은 갈증을 견디지 못한다. 할 수 없이 성의 서북쪽에 우물을 파서 물을 퍼올리려 한다. 그러나 거기서도 물이 한 방울도 나오지 않는다. 흑장군은 성이 위급하고, 실패는 피할 수 없다고 보고, 상대와 최후의 결전을 벌이기고 결정한다. 싸우기 전에 만일의 사태를 위하여, 그는 창고안에 있는 80여수레의 황금과 다른 수없이 많은 보물을 모조리 이 물이 나오지 않는 우물 속에 감춘다. 그리고 직접 자기 손으로 처자식을 죽인다. 모든 준비를 마친 후, 흑장군은 성의 서북쪽 성벽에 구멍을 내어, 병사를 이끌고 성밖으로 나가 싸운다. 자신이 앞장서서 적진으로 돌진하며, 필사적으로 적과 싸우지만 중과부적으로 전멸하고 만다. 결국 흑장군도 자결하고 만다.
지금도 흑성 유적지에는 서북쪽 성벽에서 낙타가 드나들 수 있을만한 크기의 구멍이 있다. 전해지는 바로는 이것이 바로 흑장군이 포위망을 뚫기 위해 꿇었던 구멍이라고 한다. 흑성안의 서북쪽에 있는 큰 구덩이는 전해지는 바로는 바로 물이 나오지 않아 성안의 모든 보물을 숨겼던 그 우물이라고 한다. 현지인들이 "보거드보르그(寶格德波日格)"라고 부르는 높은 모래언덕이 바로 옛날 조정대군이 물을 막기 위해 쌓은 제방이라고 한다.
서하황제의 군대는 흑수성을 함락시킨 후, 성을 완전히 파괴한다. 흑성은 이때부터 황량한 폐허로 변한다. 그후 인근 성의 한인과 현지의 몽골인들은 여러번 흑수성으로 가서 이 보물을 찾으려 했지만, 아무런 성과없이 돌아오거나 신비롭게 실종되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흑장군은 죽기 전에 치명적인 저주를 남겼다고 한다. 현지인드은 흑수성의 귀신과 저주의 마력이 겁나서, 가능한 한 이곳을 피해 다녔다. 이곳은 점점 폐허로 되고, 사람들이 "죽음의 성"이라고 부르게 된다.
흑성 유적지는 내몽골자치주 어지나기(額濟納旗) 달라이쿠부진(達賴庫布鎭) 동남쪽 약 35킬로미터 지점. 나린하(納林河) 동쪽의 사막 가운데 있다. 지금 남아있는 유일한 당항족(黨項族)의 언어 이름이 붙여진 성이다. 당항인들은 흑수(黑水)를 "어지나(額濟納)라고 불렀다. 흑수성은 바로 어지나성이다. 몽골어로는 '카라후트(喀拉浩特)"이라 부른다. 과거 이곳은 상당히 큰 수역(水域)이었다. 유명한 고거연해(古居延海)만 하더라도 726평방킬로미터이다. 흑수성은 3면이 물로 둘러싸인 오아시스에 있었다. 1226년 2월, 흑수성에서는 치명적인 혈전이 벌어진다. 지금 흑성밖에는 모두 뼛조각들이 사막의 흙속에 반쯤 덮여 있는데, 아마도 당시 성안의 사람들을 죽일 때 남겨진 것일 것이다. 멀리 흑성의 바깥을 둘러싼 높은 성벽이 보인다. 비록 세월의 침식이 있었지만, 여전히 옛날 성의 휘황함을 엿볼 수 있다.
현존하는 성벽은 원나라때 확장해서 만들었던 것이다. 평면은 장방형이고, 동서로 길이 434미터, 남북으로 너비 384미터이다. 주위는 약 1600미터이다. 가장 높은 곳은 10미터이고, 동서양쪽에 성문이 있다. 그리고 옹성(瓮城)을 쌓았다. 성벽의 서북쪽에는 높이 약 13미터의 복발식(覆鉢式, 뒤집어엎은 사발모양) 타이 하나 있다. 성안의 관청, 저택, 창고, 불사, 민거와 길거리유적은 여전히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이다. 성밖 서남쪽에는 이슬람교 공북(拱北)이 하나 남아 있는네 높이 솟아 있다.
이 죽음처럼 적막한 인류의 유적지는 사막에서 6세기가량 잠들어 있었다. 1907년, 러시아 지리학자이며 동시애 해군중령인 코츠로프는 '죽음의 성 여행"단을 조직한다. 이는 그가 6번째 중국땅을 밟는 것이었다. 원래, 그는 이번 탐험목적을 몽골, 청해 및 사처늬 서부와 북부지역으로 정했다. 다만 다음 해, 그가 몽골남부 고비사막을 지나면서 돌연 14세기 저명한 여행가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에 언급된 바 있는 전설적인 색채로 충만한 '흑성'을 떠올린다. 그는 즉시 이 전설상의 '사망의 성'으로 가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순조롭게 흑성으로 들어가 고찰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그는 먼저 흑성 현지의 관리자인 다시(達希)를 찾아간다. 그리고 그에게 '귀한 선물'을 준다. 다시의 도움으로 코츠로프와 그의 4명의 고찰대원은 '가볍게 입고' 출발한다. 그리고 순조롭게 흑성에 들어간다. 여기에서 그들은 발굴을 시작한다. 이날이 1908년 3월 19일이었다.
그들은 성안의 거리와 사묘유적지에서 10여상자의 비단으로 만든 불화, 화폐등 문물을 발굴한다. 이들 문화재는 성페테르스부르크로 운반된다. 문화재중에서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문자와 조형이 독특한 불상은 러시아 지리협회로 하여금 즉시 결정을 내리게 만든다: 코츠로프 탐험대는 원래 사천으로 들어가는 계획을 취소하고, 즉시 흑수성으로 돌아가서, 일체의 댓가를 치르고서라도 흑수성에 대한 대규모 발굴을 진행하라.
"하라후트에서 며칠만에 고찰대가 얻은 물건이 가득했고, 종류도 다양했다. 서적, 편지, 금속화폐, 여상장신구, 가구와 일상생활용품, 불상 그리고 기타 물품까지 수량으로 계산하면, 우리가 요 며칠 수확한 것은 10개의 상자에 가득채웠다. 나중에 우리는 이 물건을 러시아 왕실지리학회와 러시아과학원으로 보냈다." 코츠라프는 말했다. "나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마침내 1호폐허에서 하나의 불상을 발견했을 때 전신에 충만한 희열의 감각을."
같은 해 5월, 코츠로프는 현지에서 민공을 고용하여, 흑성에 대한 제2차발굴을 시작한다. 이는 대규모의 야만적인 발굴이었다. "사망의 성이 부활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여기에서 활동하기 시작한다. 도구를 내려치는 소리가 울리고, 하늘에는 먼지가 휘날렸다." 이번 발굴시간은 4주에 달했고, 그들은 성의 서쪽 약 400미터지점의 말라버린 하상(河床)의 오른쪽 제방에서 대불탑을 연다. 거기에서 발견된 것은 '역사박물관'이었다. 이는 복발탑식의 건축이었고, 안에는 많은 불교조상과 수천수백의 서적, 회화 ,경권등이었다. 다시 햇볕을 보게 된 이들 예술진품은 폐허 속에서 옛날의 영광을 다시 보여주고 있었다.
코츠로프는 이 '위대한 탑'을 발견한 후, 탑이란 탑은 모두 발굴한다. 흑성의 주위에서 모두 30여개의 탑이 발굴된다. 이렇게 흑성의 80%의 탑이 파괴되어 버린다. 9일간에 걸친 융단폭격식의 발굴이후, 그들은 고성의 모든 탑과 고성을 파괴해 버린다. 코츠로프가 파내간 문물이 나중에 명성을 떨치게 된다. 그는 서적 2000여종을 파내갔을 뿐아니라, 300장의 불화와 대량의 목제, 청동도금의 불상들도 파내 갔다.
코츠로프는 성페테르스부르크에서 그가 중국 흑수성에서 가져온 문물 문헌을 전시해서 세상을 깜짝 놀라게 만든다. 러시아의 저명한 한학자 이봉각(伊鳳閣)은 무더기로 쌓여 있는 문헌 가운데 <번한합시장중주(番漢合時掌中珠)>라는 책을 발견한다. 원리 이것은 서하문(西夏文), 한문(漢文)의 쌍해사전(雙解辭典)이었다. 코츠로프는 두번에 걸쳐 낙타로 운송해 왔는데, 그것은 바로 중국중고시기 서하왕조의 190년 역사였다. 1038년에 굴기한 소수민족왕조는 약소한 세력으로 북송 요 및 남송, 금과 삼족정립을 형성하고, 신속히 자신의 정치, 경제, 문화를 전성기로 끌어올렸었다.
코츠로프가 떠난 후, 남은 것은 상처로 얼룩진 흑성이었다. 코츠로프는 야만적으로 발굴함과 동시에, 자신이 그렇게 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도 잘 알았다. 다만 욕심이 그의 이성을 앞섰다. 코츠로프는 흑성에 상처를 남긴다. 코츠로프는 자신의 야만적인 행위로 흑성을 떠날 때 약간의 양심이 발동했는지, 자신의 '고찰기'에 이렇게 쓴다: "고찰대와 사망의 성 사이의 거리가 멀어질 때, 부지불식간에 마음 속으로부터 안타까운 심정이 강력하게 나를 눌렀다. 나는 마치 아무런 생명이 없는 폐허 속에서, 아직도 나에게 친근하고 귀하며 나중에 나의 이름과 계속 연결될 것이 남아 있는 것같았다. 그리고 일부 나와 헤어지기 싫어하는 것이 있는 것같았다. 나는 무수히 이 먼지로 뒤덮힌 성을 뒤돌아보면서, 나의 '늙은 친구'와 작별했다. 그때 나는 어떤 무서운 느낌을 받았다. 카라후트성(흑성)에는 현재 1개의 외로운 탑이 서 있는데, 이 탑의 내용은 이미 만회할 수 없도록 죽어버렸다. 인류의 호기심과 지식욕으로 파괴되어 버린 것이다..."
색을 잃어버린 흑성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서하문화에 관심있는 사람들의 가슴 속에 영원한 상처로 남았다. 그외에 사막에 묻혀 있던 흑성은 사람들이게 이런 다툼없는 사실을 증명해준다: 오늘날 사막 속에 매몰되어 있는 성은 서하왕국 당시에 가장 아름답고 특별히 발달했던 성이었다. 이곳의 모든 사구는 모두 유목민들의 당시 집이었다. 하얗게 된 소뼈, 남아 있는 기왓장, 고고학자들이 막 발견한 600여년전의 아동건시(乾屍)...모두 흑성의 과거를 얘기한다.
서하는 800년전에 중국의 서북에서 송, 요(금)과 정립했던 189년의 역사를 지닌 봉건왕조이다. 서하의 흥성과 쇠락은 아마도 우리에게 너무나 많은 '수수께끼'를 남긴 것같다. 서하는 당항족을 주체로 하여 건립된 봉건왕조이다. 당항족은 처음에 오늘날의 티벳, 청해, 사천등의 교차지역에 거주했고, 수나라말기, 당나라초기에 강(羌)족에 속하는 당항족이 흥성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성씨를 부락의 명칭으로 삼은 것이다. 과거 원시유목생활을 하던 당항족의 여러 부락 중에서, 특히 척발씨(拓跋氏)가 가장 강대했다.
당태종때인 정관8년(634년), 당항족의 추장 척발적사(拓跋赤辭)는 무리를 이끌고 당나라에 귀순한다. 그후 다른 각부의 추장들도 연이어 부락민을 이끌고 당나라에 귀순한다. 당나라는 그들을 32개 주로 나누고, 척발적사를 도독으로 삼으며, 그에게 "이(李)"씨성을 하사한다. 황소의 난이 발발한 후, 당희종(唐僖宗)은 사천으로 도망친다. 당항족 수령인 척발사공(拓跋思恭)은 당항족과 다른 소수민족의 수만 군대를 끌어모아, 황소의 난을 진압하는데 나선다. 당희종은 척발사공이 반란을 진압한데 공이 있어, 883년 그를 하국공(夏國公)에 봉한다. 그리고 다시 한번 황성인 "이(李)"씨의 성을 하사한다. 이후 척발사공은 점점 강대한 지방할거세력이 되고, 오대십국때, 그들은 세력범위를 확장하여 계속 자신의 역량을 확대한다.
송나라 초기, 척발사공의 후손인 이계천(李繼遷)은 요(遼)나라에 귀순하여 송(宋)에 항거한다. 요나라는 이계천은 서평왕(西平王)에 봉한다. 한족 봉건정치,문화의 영향을 받아, 이계천과 그의 아들 이덕명(李德明)이 계속 발저시킨 결과 이덕명의 아들 이원호(李元昊)에 이르러, 당항족은 기본적으로 씨족추장에서 봉건지주로의 변신을 이룩한다. 이제는 자신의 통일정권을 세워서 자신의 이익을 보장받을 필요가 절실해진다. 1038년(서하 대경2년 십월 십일일), 이원호는 도성 흥경부(興慶府) 남축대(南築臺)에서 황제에 등극한다. 국호를 대하(大夏)라 한다. 지리적 위치가 서북이고, 황하의 서쪽에 있으므로, 역사학자들은 이를 '서하(西夏)'라고 부른다.
"서하"지방할거정권이 건립된 후, 송나라와 때로는 전쟁을 벌이고 때로는 화해한다. 1115년, 금나라가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성니린, 남으로 이전한다. 서하는 남송, 금에 대하여 우호정책을 쓴다. 그리고 널리 생산경험과 기술을 지닌 한족을 받아들여, 왕조의 정치, 경제, 문화발전에 상당히 견실한 기초를 쌓는다. 당시 형식적으로는 서하가 송, 요에 칭신납공(稱臣納貢)했지만, 실제로는 서하가 이미 서북의 군사강국이었다. 서하는 당시의 강역이 '동으로는 황하에 이르고, 서로는 옥문에 이르며, 남으로는 소관에 접하고, 북으로는 대막을 장악했다. 지방이 만여리였다." 이렇게 송, 요, 하 삼국이 정립하는 국면이 형성된다.
서하와 몽골의 접촉은 징기스칸이 몽골을 총일하기 전부터 시작되었다. 징기스칸의 대막초원통일이 날로 임박해 짐에 따라, 그의 지역은 서하와 국경을 마주하게 된다. 두 이익집단이 대치하면서, 전쟁은 피할 수 없었다. 서하가 위치한 지역은 당시 아주 중요한 전략요충지였다. 몽골, 금이 싸우는 필쟁지지였다. 그래서 여러 강국들이 서로 차지하려고 다투는 지역이 된다. 그외에 몽골이 만일 금을 공격하려면, 반드시 먼저 서하라는 후고지우(後顧之憂)를 제거해야만 했다. 서하는 몽골군이 물자를 배치하거나 병력을 보충하는데 아주 유리한 곳이다. 이런 원인으로, 징기스칸은 서하를 칭신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 1205년, 징기스칸은 군대를 이끌고 처음 서하를 공격한다. 이때부터 육전서하(六戰西夏)의 서막이 열린다. 당시의 서하 하환종(夏桓宗) 이순우(李純佑)는 몽굴군이 강대한 것을 보고 겁을 먹는다. 몽굴군은 과주(瓜州, 치소는 지금의 감숙성 안서 동남쪽 쇄양성), 사주(沙州, 치소는 지금의 감숙성 돈황)등 주를 약탈한다. 사월, 한여름이 오면서 몽골군이 퇴각한다. 하환종은 파괴된 성을 수리하도록 명하면서, 경내에 대사면령을 내린다. 그리고 도성 흥경부를 중흥부(中興府)로 고친다. 이번에는 천시(天時)가 서하를 도왔다고 말할 수 있다. 징기스칸이 칸에 오른 다음 해, 즉 1207년, 다시 친히 군대를 이끌고 서하를 두번째로 공격한다. 이번에 징기스칸은 서하가 납공(納貢)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유로 들어, 서하의 변방요새 알라해성(斡羅孩城, 지금의 내몽골 우라터중후기 서쪽)을 파괴하고, 병력을 4로로 나누어 공격한다. 이번에 서하군대는 완강하게 저항한다. 징기스칸도 더 이상 진격하기 어려워 5개월간 주둔하다가 양식이 떨어져 다음해 2월 군대를 이끌고 돌아간다. 이번에는 인화(人和)가 서하를 도와 겁난을 피해가도록 해주었다고 할 수 있다. 1209년, 징기스칸은 대부대를 이끌고 제3차 서하토벌을 시작한다. 몽골군은 파죽지세로 서하의 도성 중흥부(지금의 영하성 은천)의 외곽에 앳는 요새 극이문(克夷門)까지 쳐들어가서, 중흥부를 포위한다. 서하의 하양종(夏襄宗)은 친히 성에 올라가 독전한다. 몽골병은 계속 실패하며 성을 함락시키지 못한다. 9월에 계속 비가 내려서 황하물이 범람한다. 징기스칸은 병사를 보내어 제방을 싸하, 물을 끌어들여 성으로 보내 수공(水攻)을 한다. 서하의 병사와 백성들이 많이 다친다. 12월, 중흥성은 물에 잠겨버린다. 몽골군도 계속 주둔하기 어렵게 되었다. 하양종은 성에 올라가 물을 사이에 두고 징기스칸과 대면한다. 그리고 서로 화해하기로 하고 딸 찰합(察合)을 징기스칸에게 바치기로 한다. 몽골군이 퇴각한다. 하늘이 다시 한번 서하를 보우했다고 할 수 있다. 1217년, 몽골이 호라즘을 정벌하고, 다시 서하에 병사를 보내줄 것을 요구한다. 서하는 더 이상 병력을 모을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출병을 거절한다. 징기스칸은 서하가 징병에 응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유로 군대를 이끌고 네번째로 서하를 공격한다. 12월, 몽골군은 황하를 건너 서하 경내로 들어선다. 그리고 서하의 도성 중흥부에 이른다. 하신종(夏神宗) 이준욱(李遵頊)은 황급히 서경(西京, 즉, 靈州, 지금의 영하성 영무의 서남, 일설에는 서량(西凉)이라고 한다. 즉 지금의 감숙성 무위이다). 그리고 태자를 중흥부에 남겨둔다. 서하는 즉시 사신을 보내 항복을 청한다. 징기스칸은 호라즘 정벌로 바쁜 때여서 퇴각을 명한다. 그러나 징기스칸은 한 마디를 남긴다: "서정에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 다시 손을 봐주겠다." 징기스칸은 1226년 봄에 서하가 출병하여 도와주는 것을 거절하고, 아들을 인질로 보내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어, 양로로 병력을 나누어, 동서에서 다시 한번 서하를 공격한다. 징기스칸은 청수현(淸水縣, 지금의 감숙성 청수현)의 서강(西江)에서 중병에 걸린다. 그러나 하늘이 서하를 망하게 하려는지, 몽골인들은 이 소식을 봉쇄한다. 그리고 서하국의 총사령은 매년 몽골군의 공격을 막아내며, 몽골군에 대한 두려움에 바로 징기스칸이 죽은 다음 날, 성을 열고 투항한다. 몽골인은 그리하여 미친 듯이 일대천교(一代天驕) 징기스칸의 복수로 도성(屠城), 살륙, 굴묘(掘墓), 분서(焚書)를 자행한다. "백골이 들판을 덮고, 수천리가 맨땅으로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서하왕릉은 모조리 파괴된다. 예전의 화려했던 건축물들도 모조리 불태워지고 파괴된다. 서하는 이렇게 멸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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