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은래(周恩來)와 유소기(劉少奇)의 암중각축(暗中角逐)
글: 고문겸(高文謙) 1966년 8월 5일, 모택동은 에서 이상하리만치 격렬한 어조로 직접 이름을 거명하지는 않았지만, 유소기를 통렬하게 비판한다. "반동의 부르조아계급입장에 서서, 부르조아계급독재를 실행하여, 프롤레타리아계급의 거대한 문화대혁명운동을 탄압하고, 시비를 전도하고, 흑백을 혼동하며, 혁명파를 토벌하고, 다른 의견을 억누르며 백색공포를 실행하며 스스로 득의하며 부르조아계급의 위풍을 키우고, 프롤레타리아계급의 뜻을 꺽었다. 어찌 그렇게 독하단 말인가?" 모택동은 글에서 1962년 조정시기의 소위 '우경'문제를 연결시켜, 기세등등하게 유소기와 최종대결을 벌이겠다는 자세를 취한다. 모택동의 이 글은 그후 전체회의에 인쇄되어 배부되어, 회의참석자들이 유소기를 공격하는 무기가 된다. 전체회의는 바로 ..
2023. 5. 18.
6.4 천안문사태때 진압명령을 내린 핵심인물은......?
글: 일진천설(一眞濺雪) 1986년말, 베이징, 상하이, 허페이...등지의 대학생들은 대규모 시위에 나섰다. 학생들은 탐관오리의 부패를 처벌하고, 정치체제개혁을 진행하고, 민주, 자유를 실현할 것을 요구했다. 당시 당과 국가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등소평과 그 주위의 완고한 원로들은 등소평의 추종자들인 리펑, 천시통같은 자들과 함께 학생들의 행위는 국외반중세력의 책동에 의한 반당, 반사회주의적인 행동이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당시 당중앙주석을 맡고 있던 후야오방등 당내의 개혁파들은 학생들의 행위를 애국행위로 보았다. 그들의 많은 요구는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학생들을 정확하게 인도하고, 설명하고 소통하여 갈등을 해소시키는 것으로 사태를 안정시킬 수 있다고 보았으며, 학생들에 대한 무력진압에 반대했다..
2021. 10.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