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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정치/중국의 정치

베이다이허회의전에 정변이 일어날 수 있을까?

by 중은우시 2022. 6. 24.

글: 자유아주(自由亞洲)

 

최근 해외에서 중국고위층의 정치미래변화에 대한 논의가 진행중인데, '정변'이라는 말이 나타나는 빈도가 적지 않게 늘어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시진핑이 쫓겨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중의 한 추측은 정변이 발생할 것이라는 것이다. 다만, 왕왕 이런 추측은 모두 '정변'이라는 두 글자에서 멈추게 된다. 도대체 중공내부에서 어떻게 해야 정변이 일어나는지, 그것도 수수께끼이다. 본문에서는 신중국건립이후 역대 정변을 살펴보기로 한다. 중공내부에 정변이 발생하는 것은 선례가 있다. 그리고 정변의 성패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기실 아주 간단하다. 누가 총부리를 장악하고 있느냐이다.

 

1. 시진핑의 취임전에 발생한 저우용캉(周永康)의 정변미수

 

최근에 발생한 중공 고위층간의 권력충돌은 2012년 3월 19일이고, 그때는 아직 시진핑이 취임하기 전이다. 당시, 무경부대(武警部隊)에 대한 지휘권을 가진 정치국상위, 중앙정법위서기 저우용캉이 무경을 동원하여 정변을 기도했으나, 내부인의 고발이 있었다. 후진타오는 38군을 동원하여 중앙정법위의 몇개 업무장소를 포위했다. 중국의 매체가 사후에 보도한 바에 따르면, 당시 38군에 하달한 임무는 "음모분자의 군사정변음모를 분쇄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사후 저우용캉은 체포되어 수감되고, 저우용캉 일파 인원들의 잇따른 체포를 불러왔다.

 

무경부대는 경량무기만을 소지하는 경찰이 아니라, 준군사부대이다. 1995년 5월 3일 중국국무원과 중앙군사위는 국발(1995)5호문건인 <중국인민무장경찰부대영도관리체제를 조정하는데 관한 결정>을 선포한다. 여기에는 "무경부대는 국무원편제서열에 속하며 국무원, 중앙군사위원회가 이중영도한다." "무경총부는 공안부의 영도와 지휘를 받는다. 총대 및 그 산하의 무경부대는 동급 공안부서의 영도를 받는다."

 

이렇게 하여, 무경부대의 지휘권은 공안부서가 제1지휘자이고, 중앙군사위는 단지 무경의 조직편제, 간부관리, 훈련등을 책임진다. 무경부대의 일상임무, 규모와 편제정원, 지휘, 경비물자보급등은 모두 공안부에서 결정한다. 1996년 10월 중앙군사위는 전후로 육군의 14개 을종보병사단을 무경부대로 배속시켜, 무경 내위(內衛)부대기동사단으로 편제하고, 무경총부의 직속지휘와 관리를 받는다. 중앙정부의 등급에서 직접 무경부대를 지휘하는 것은 저우용캉이다. 이는 저우용캉이 2012년 무경부대를 이동시킬 수 있었던 원인이다.

 

2012년의 그 "3.19"사건은 미수로 끝난 정변이다. 이 사건이 발생한 것은 중공의 일부 군대에 이중지휘권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는 시진핑이 취임한 후 군대체제를 변경하고, 새로 군권을 장악한 원인이다. 시진핑은 그후 군대의 주요 장군을 숙청하고, 중공이 오랫동안 총참모장과 총정치부주임이 군대핵심권력을 장악하는 쌍두체제(雙頭體制)를 변경하고, 원래의 총참, 총정, 총후(總後)와 총장(總裝)의 4개 군사위안에 총부를 설치하는 것을 취소했으며, 군사위 각 총부의 2급부를 16개의 분관부문으로 편성하고 각자 '군위연합지휘부'에 직속된다. 이 과정에서, 시진핑은 '무경부대'라는 상대적으로 독립된 군종도 취소시킨다.

 

역사상, 중공의 군사위 주석이 군대에 대하여 관리감독권을 가지는 것은 명목상이다. 군사위주석은 군대의 일상운영유지를 책임지지 않고, 단지 총참모장과 총정주임이라는 두 사람의 개인적인 충성을 통해 군대를 장악해왔다. 시진핑은 군사위주석을 실제 군대의 일상운영을 장악하는 직위로 바꾸었고, "군사위연합지휘부판공실"을 통해 직접 군대를 자신의 손아귀에 완전히 장악했다.

 

2. 모택동사후 화국봉의 정변성공

 

신중국건립후, 역사상 유일하게 성공한 정변이다. 즉, "사인방"을 체포한 것이다. 비밀리에 체포한 것은 회의에서 다수를 점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만 당내 고위층내의 반대파 주요인물을 체포함으로써 정변에 성공할 수 있었다.

 

중앙당교 교수인 션바오샹(沈寶祥)은 2010년 <영도문췌(領導文萃)> 제5기에 발표된 <호요방과 화국봉>이라는 글을 싣고, 화국봉은 일찌기 호요방과 두 차례에 걸쳐 길게 얘기를 나누었으며, 1977년 12월의 담화 주요내용은 이 정변의 원인에 관한 것이었다. 화국봉은 이렇게 말한다: "무슨 방법을 쓸 것인가? 전체회의를 개최하는 것은 안된다. 여론도구도 그들의 손에 장악되어 있다....오직 그들을 체포하는 수밖에 없다."

 

판슈어(范碩)의 <왕진이 본 섭검영>이라는 글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당시 군대에 아직 통제력이 있던 섭검영이 먼저 왕진을 여러차례 진운에게 보내어 의도를 전달했다. 진운은 깊이 고민한 후, 직접 섭검영과 면담한다. 진운은 이렇게 생각한다.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밖에 없다: 하나는 중공10기3중전회를 소집하여, 합법적인 수단으로 '사인방'을 끌어내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특수한 수단을 동원하여 '사인방'을 체포하는 것이다.

 

섭영렬(葉永㤠)의 <그가 중국에 영향을 끼쳤다 - 진운전전>에서는 중요한 세부사항을 보충했다: 진운은 집안에서 10기 중앙위원회 명단을 가지고 이리저리 계산해 보았다. 중공10기 3중전회에서 통과시키고, 참석자들에게 거수로 투포하게 하여 '사인방'을 타도하는 목적을 달성하는데는 완전한 자신이 없었다. 섭검영은 무력해결을 주장했고, 진운은 섭검영을 굳은 태도를 확인한 후, 명확하게 찬성표시를 한다. 그리고 이 투쟁은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확실히 당시 군대측 의견을 대표할 수 있었던 사람은 섭검영이다. 그가 이번 정변의 막후주요의사결정자이다. 중앙경위대권을 장악하고 있던 왕동흥(汪東興)은 정변의 중요집행자이다. 왜 진운이라는 당시 중공고위층내에서 가장 경력이 있는 원로는 직접 정변을 조직하고 지휘하는데 참여할 수 없었을까? 이치는 아주 간단하다. 그는 문관(文官)이고 군대를 지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섭검영이 결심을 내리면서, 화국봉은 군대의 지지를 획득하게 된다. 그래서, 실제 군대를 장악한 군대의 주요인물이 기실 이번 정변의 핵심이다. 반대로 만일 섭검영이 정변에 반대했다면, 화국봉과 왕동흥은 감히 움직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군대와 맞서야 하는 위험에 직면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은 설명한다. 만일 군대의 실제지휘자의 묵인이 없다면, 최고지도자가 단순히 중앙경위국의 권력만 동원하여 정변을 실시하다가는 내전에 직면하게 될 수 있는 것이다.

 

3. 수장의 경위(警衛)가 수장을 체포하다.

 

중국 고위관료의 곁에는 모두 경위가 있다. 고위관료중 누군가를 체포하려면 반드시 경위라는 이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다만, 중공이 고위관료에게 경위를 제공하는 제도는 바로 정치국위원이상의 국가급, 부국급 고위관료가 언제든지 체포될 수있다는 가능성이 숨겨져 있다는 것은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전 중공중앙주석 화국봉은 유일하게 비밀정변을 조직하여 성공시킨 인물이다. 모택동 사후, 화국봉은 모택동의 뜻에 따라, 중공의 최고권력을 계승했다. 그후 즉시 모택동파의 고위층 골간(사인방)을 체포하는 정변을 일으킨다. 왜 이렇게 가볍게 성공할 수 있었을까? 화국봉이 죽기 전에, 일찌기 중공고위층 경위제도가 정변에서 한 역할을 얘기한 바 있다.

 

2005년 1월 12일 오전, 여러번 화국봉을 찾아간 바 있는 창사(長沙)사위서기 장신치(蔣新祺)는 다시 화국봉의 집을 찾아간다. 화국봉과 장신치는 30년전에 일어난 "사인방체포"의 경과에 대해 얘기를 나눴고, 중공의 고위층 경위제도를 설명한다. "우리의 경위제도는 통일영도이다. 경위원은 오직 수장의 안전을 책임지고, 나머지는 모두 경위국의 말을 따른다. 수장의 지시와 경위국의 지시가 모순될 때, 반드시 무조건적으로 경위국의 명령을 집행해야 한다. 수장이 외출하면 경위원은 매일 경위국에 수장의 안전 및 행적을 보고해야 한다. 회의개최시, 경위원은 수장을 회의장소까지 호송하고, 최우선적으로 해야할 일은 바로 회의장소주둔경위에 총을 반납하여 보관하는 것이다. 수장의 회의가 끝난 후에 다시 총기를 수령한다." 이 말은 그때 정변이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을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먼저, 수장의 경위들은 무조건적으로 그들이 명을 받들어 보호하는 수장이 내린 지령을 따르지 않는다. 반대로, 경위들은 반드시 무조건적으로 그들의 상급영도인 중앙경위국의 명령을 집행해야 한다. 만일 경위국이 그들이 원래 보호해야하는 수장을 체포하라고 명령하면, 경위들의 총은 아무런 망설임없이 그 수장을 겨누게 될 것이다.

 

다음으로, 고위관료의 경위들은 명을 받들어 자신이 책임진 수장을 보호하는 외에, 매일 경위국에 이 수장의 행적을 보고해야 한다; 바꾸어 말하면, 이런 보고제도는 동시에 신변경위에 의해 수시로 고관에 대한 감시통제를 실시하는 것이고, 그 고관은 사실상 행동의 자유가 없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고관들이 주소 혹은 사무실을 떠나 중남해, 인민대회당, 조어대, 옥천산 혹은 경서반관등 고위층이 회의를 여는 장소에 도착하면 그들의 신변경위는 반드시 회의장소에 도착하여 총기를 반납하고, 경위휴식실에서 대기해야 한다. 고관들의 회의장에서의 운명은 기실 중앙경위국의 회의장소경위들에 의해 장악된다. 그래서 만일 이런 회의장에서 정변이 일어난다면, 고위층의 어떤 인물을 체포할 수 있다. 다만 이는 중앙경위국의 최고지도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가 만일 경위국에 명을 내려 어느 고관을 체포하라고 하면, 그것은 가볍게 성공할 수 있는 일인 것이다.

 

중공고위층 경위제도의 이 세 가지 특징은 다음을 설명한다. 중공고위층인원의 신변안전은 기실 언제든지 최고지도자의 손에 장악되어 있는 것이다. 이 특징은 지금까지도 바뀌지 않았다.

 

4. "총을 가진 자"와 "종이를 가진 자". 누가 정변을 일으킬 수 있을까?

 

중공고위층에 만일 정변이 발생하면, 반드시 총으로 말해야 한다. 근본적으로 중앙위원 혹은 정치국위원들이 사전에 투표를 하여 어느 한 사람 또는 몇 사람을 비밀리에 체포할 것을 결의하지 않는다. 만일 체포행동이 있다면, 반드시 먼저 비밀리에 체포하고, 사후에 회의를 개최한다. 형식적으로 중앙위원 혹은 정치국위원이 거수로 찬성하게 하는 것이다. 회의개최시에는 이미 상황이 정리된 이후이다. 만일 어느 정치국위원이 체포에 반대한다면 아마도 그도 체포당할 것이다.

 

그러므로, 중공고위층의 정변을 얘기하면서, 반드시 분명히 해야할 것이 있다. 누구를 잡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이 답안은 분명하면서도 간단하다. 당연히 "총을 가진 자"가 "종이를 가진 자"를 체포하는 것이다. "종이를 가진 자"가 "총을 가진 자"를 체포하는 것이 아니라. 소위 "총을 가진 자"라 함은 군권을 손에 쥔 고위층 인원을 말한다. "종이를 가진 자"는 바로 다른 고위층 인원을 가리킨다. 그들의 권력은 단지 문건상으로 동의 서명을 하는 것이고, 그들의 손에는 총이 쥐어져 있지 않다. 다른 사람의 총이 그의 등 뒤를 겨누고 있는 것이다.

 

"총을 가진 자"는 군권을 장악한 사람이다. 만일 당수가 동시에 효과적으로 군권을 장악하고 있다면, 그리고 중앙경위국의 지휘권을 장악하고 있다면, 그는 바로 유일한 "총을 가진 자"가 된다. 나머지 "총을 가지지 못한" 고위층 인원은 단지 "종이를 가진 자"의 자격밖에 없다. 그저 정변을 당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중앙고위층 구성원중에서 군권을 장악한 최고지도자를 제외하고, 나머지 사람들의 개인행동, 건강과 통신연락은 수시로 감시상태에 놓여 있다. 정치국상위간의 전화도 감청되고, 핸드폰은 허용되지 않으며, 집을 나서면 경위와 비서가 신변에서 감시한다. 그래서, 최고지도자는 다른 고위층의 일거일동, 일언일행을 파악하고 있다. 누구든지 시진핑의 정적이 되고자 하면 시진핑이 바로 알게 되고, 언제든지 대응할 수 있다. 시진핑 이외의 정치국위원에 있어서, 이것은 바로 "다른 사람이 가진 총이 자신의 등 뒤를 겨누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만일 이들 고위층이 서로 연락하고, 방문하거나 수시로 내부전화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혀 잘못된 추측이다.

 

5. 시진핑은 4번에 걸쳐 중앙경위국장을 교체했다.

 

경위국을 장악하는 것이 중공의 최고지도자에게 이렇게 중요하기 때문에, 중공의 영도방식이 집단지도체제이든 개인독재이든간에 최고지도자가 바뀔 때마다 전임이 남긴 경위국장은 교체되곤 했다. 시진핑은 더욱 자주 바꾸었다. 7년동안 4번이나 바꾸었다. 이는 정변을 방지하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것같다.

 

시진핑이 취임할 때, 중공중앙판공청 경위국장은 후진타오시대에 발탁된 차오칭(曹淸)이다. 시진핑은 취임 2년후에 비로소 기회를 잡아 경위국이 시진핑의 전용기로 아프리카에서 상아를 밀수한 건을 뉴욕타임즈와 BBC에 제공하여 해외에서 폭로하게 만든다. 그후에 차오칭을 내보내 그를 베이징군구 부사령관에 임명한다. 

 

이어서, 시진핑은 차오칭의 부하로 중앙경위국 부국장으로 있던 왕샤오쥔(王少軍)을 후임 국장에 임명한다. 몇년이 지난 2020년 11월, 시진핑은 푸젠 장저우의 육군제31집단군 91사 정위 천덩뤼(陳登鋁)를 중앙경위국 부국장에 임명한다. 2021년 7월 다시 북부전구 부참모장 저우홍쉬(周洪許)를 중앙경위국 국장에 앉히고, 왕샤오쥔의 국장 직무를 면직한다. 다만 금년 1월 왕샤오쥔은 시진핑에 의해 다시 경위국 국장으로 다시 돌아온다.

 

시진핑이 이렇게 자세하게 경위국장의 인선을 반복하여 안배하는 것은 아마도 이러한 요소들 때문일 것이다.

 

첫째, 시진핑은 원래 부국장에서 경위국장으로 임명된 왕샤오쥔에 대하여 항상 안심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야전군에서 데려온 장군으로 교체하고자 했다. 야전군의 장군이 일거에 어림군의 중추위치로 올라온 것이다. 그 본인은 생각해본 적이 없었을 것이고, 감격해 마지 않으며, 시진핑의 말이라면 무조건 따를 것이다.

 

둘째, 비록 이런 야전군의 장군에 대하여 사전에 반복하여 평가해보았지만, 그들은 하급부대를 지휘하는데 익숙하고 두뇌가 간단하다. 일단 중앙경위국 국장이라는 아주 복잡한 중추적 임무를 많으면 많은 사정과 임무를 제대로 알아듣고 지휘할 수가 없다. 이런 일은 야전군사령관이 쉽게 적응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셋째, 중앙경위국장이라는 직위는 지금까지 내부에서 발탁되었었다. 그런 사람은 경위업무에 비교적 익숙하다. 동시에 여러 해동안 같이 일해온 부하들에 대하여도 잘 알고, 적절히 지휘한다. 그러나, 야전군 장군이 와서 경위국장을 맡으면, 경위국의 중간층간부들이 그를 따르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암중으로 제지하고, 새로 온 국장의 지휘는 제대로 집행되지 않는다. 그래서, 시진핑은 결국 할 수 없이 면직시켰던 옛 국장을 다시 불러온 것이다. 그러나 이런 면직과 재임명을 통해 왕샤오쥔은 다소 고분구분해졌을 것이다.

 

최근 중공고위층의 베이다이허 휴가기간이 개시되면서, 중공정변론의 촛점은 다시 그곳으로 옮겨지고 있다. 기실 베이다이허의 경위제도는 베이징과 같다. 리커창이 정변을 기획하고 실시할 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

 

동아시아국가에서 정변을 통해 암살에 성공하엿지만, 사후에 정변에 실패한 사례도 있다. 그것은 바로 1979년 10월 26일 한국의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궁정동의 안가에서 연회를 열었고, 거기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한다. 그는 바로 박근혜 대통령의 부친이다. 암살후, 군대가 김재규의 정변계획에 협조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사형을 선고받는다. 한국의 정치역사드라마 <제5공화국>의 첫 3편이 바로 이 정변이 암살에 성공하나 결국 실패하는 내용이다. 이것도 정변을 이해하는데 하나의 참고가 될 것이다.